491장: 살 방법
이원은 이 와중에도 악착같이 살고 싶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원은 그저 본능적으로 살고 싶었다.
이원은 두변에게 자신이 동방 연합 왕국의 사람이니, 보복당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을 죽여선 안 된다고 협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번에 같은 말을 했던 방검지는 이원보다 신분이 훨씬 더 높았음에도 거세당하고 머리가 잘렸다.
이원은 무릎을 꿇고 두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평생 두변을 위해 충효를 다하겠다고.
하지만 이젠 누가 자신을 믿을까.
“두변 아우, 나도 대녕 제국을 배반하기 싫었어. 진짜야!”
이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여진 제국에 투항한 뒤로, 공작에 봉해지고, 금태극의 의형제가 되긴 했어도, 내겐 아무런 권력이 없었어. 그들은 내가 동방 연합 왕국의 첩자라는 걸 알고 있어서 나보다 원등 공작이나 난오 공작을 더 믿었다고. 차라리 그들에게 병권을 쥐어줄 만큼 난 티끌만큼도 믿지 않았어.”
이원이 통곡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대녕 제국에서 권위가 높고 신분도 꽤 괜찮고, 새로운 황제께서도 나를 총애하셔서 10만 대군의 병권을 쥐여주셨지. 나는 대녕 제국에서 떠오르는 젊은 장수여서 여진 제국에 투항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투항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동방 연합 왕국이 날 죽일 테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라고. 두변 아우, 나는 너보다 더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을 증오해. 그놈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니까.”
이원이 눈물을 훔치고 큰소리로 외쳤다.
“두변 아우, 아우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주술사들이 있으니까, 내 몸에 맹독을 하나 심어놔. 너만 날 해독할 수 있는 그런 맹독 말이야. 내가 동방 연합 왕국으로 잠입해서 네 첩자가 될게. 어때? 그렇게 하게 해주라.”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내다니, 이원이 똑똑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두변의 첩자가 되길 자처했다.
두변이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원.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네 유일한 가치는 나한테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산 채로 내 화풀이를 다 받아내는 거야.”
이원은 입이 열 개라도 필사적으로 애원해야 했다.
이원이 더 애원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그의 입에서 말 대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변이 이원의 혀를 잘라버렸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리지 바로 지혈조치를 했다.
“아아, 아아아.”
이원은 공포에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두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지 근맥을 모두 끊어버렸다. 마혈 무사들이 이원을 단단히 묶은 뒤, 변이 마랑의 등 위로 던져버렸다.
“가자.”
두변이 1천 5백 명 마혈 기병을 이끌고 다시 심양성으로 달렸다.
그들은 초속 30미터의 속도로 달렸고, 순식간에 항구에서 사라졌다.
항구에는 완안영도가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는 소리만 남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금태극, 호과, 다마곤 등의 시신 사이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두변이 심양성에 돌아왔을 때는 전투가 이미 끝난 뒤였다.
원래 여진 제국에는 10만 여진 무사, 5만 몽골 무사, 투항한 한군 15만으로 이뤄진 30만 대군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은 무사는 여진 무사 2만 명, 몽골 무사도 2만 명, 한군은 8만 명이 남았다. 30만 명 중 18만 명이 전사한 것이다.
남은 12만 대군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투항했다.
두변은 그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대녕 제국의 전 진북 공작 원등과 선화 공작 난오. 두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죄인, 두변 공작을 뵙습니다.”
원등 공작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어금니를 깨문 채 말했다.
그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원래 그는 대녕 제국의 최대 군벌이자 백 년 동안 이어진 훈귀 가문이었다.
두변이란 환관은 안중에 두지도 않았고, 그를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었다.
원등 공작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원정도 소환관 두변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던 게 다였다.
그런데 한때 그 위풍당당하던 진북 공작이 두변의 포로이자, 대녕 제국의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다니.
두 사람은 여진 제국에 투항할 때도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죽기보다도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운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두변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두변은 두 공작을 바라보면서 심경이 복잡했다.
한때 두변은 원등 공작의 아들 원정이 자신의 주요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원정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원등 공작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두변은 원등이나 난오에게 큰 살심은 없었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군벌이었다. 천윤제를 면종복배(面從腹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배반함.)하면서 오랫동안 방계와 얽혀 있었을 뿐이다.
왼손에는 황제의 은자를 쥐고, 오른손엔 방계의 은자를 쥐면서 제국의 뿌리를 갉아 먹으며 자신의 가문을 풍요롭게 일궜다.
두 사람이 두변 자신과는 직접적인 은원관계가 없다지만, 그렇기에 두변은 이 둘을 죽여야만 했다.
죽이고 나서 얻는 이익만 봐서도, 이원보다 이 둘을 죽이는 게 더 값어치 있었다.
이원은 비빌 언덕이 없어서 영덕제를 배신한 뒤로는 대녕 제국에는 이제 그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하지만 원등과 난오 공작은 제국의 최대 공훈 군벌이기에 그 뿌리가 누구보다도 두텁고 깊었다.
만약 이들을 살려두면, 두변이 북방을 떠나자마자 바로 북방을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두변이 생각하는 북방의 군두(軍頭)는 오직 한 사람, 영설 공주뿐이었다.
“원등 공작, 난오 공작, 죄송하게 됐습니다.”
두변이 손을 휘젓자, 원등 공작이 깜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두변 공작, 우리도 자네에게 투항하겠네. 서남으로 온 가족을 데려가도 좋고, 우리 원씨는 대대로 두변 공작에게 충효를 다하겠네.”
난오 공작도 다급하게 외쳤다.
“두변 공작, 우리 난씨 가문의 모든 사람과 병력, 그리고 모든 은자를 바치겠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게.”
두변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두 대인을 살려둘 수 없습니다. 대인들의 가족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세력이니, 두 분을 서남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에 두기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 두 분의 세력을 뿌리째 뽑는 게 제 일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두변이 손을 휘젓자, 대종사 이도진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녕 제국에서 평생을 호령하던 두 사람은 춥고 외로운 요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어서 두변의 군대는 손쉽게 요동 지역의 모든 주와 현을 탈환했다.
8만 한군과 2만 몽골 군대는 포로로 잡힌 뒤, 두변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되어서 순한 양처럼 두변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군대를 재편성했다.
하지만 여진 제국의 2만 무사는 재편성을 거부했다. 그들은 재편성을 거부하기만 했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침묵만 유지했다.
여진 무사들은 복종하지 않고 냉담한 태도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투력은 몽골 병사나 한군 병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인내심이 이미 바닥나기 시작한 두변은 여진 무사들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바로 저들을 없애야겠다는 것이었다.
여진족은 인구가 워낙 적은지라, 여기 남은 2만 명이 여진족의 최후의 무사들이었다. 만약 이들을 모두 죽이게 되면, 여진족은 멸족하게 되는 것이다.
“죽여야겠다. 전투력이 아깝긴 하지만 주제를 모른다면 죽여야지. 내겐 저 2만 명이 모자라지 않다.”
두변이 2만 여진 무사를 전부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려던 때, 완안영도가 달려왔다. 그는 두변 앞으로 달려와서 곧장 무릎을 꿇고 그의 신발에 이마를 찧으면서 애원했다.
“주군,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두변은 완안영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며칠 못 본 사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때 금태극은 완안영도에게 두변에게 투항해서 여진족의 멸족을 막으라는 유지를 남겼다. 두변이 안동항을 떠날 때, 완안영도는 시신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목놓아 울고 있었다.
두변이 담담하게 물었다.
“완안영도,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완안영도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두변을 올려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죽을 권리가 없습니다. 소인이 죽으면 여진족이 멸족합니다.”
“여진 무사들이 강한 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마음 깊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군대는 필요 없다. 내가 이 2만 여진 무사를 죽이지 않을 이유를 대라. 단 두 문장의 기회만 주겠다.”
완안영도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소인이 여진 무사를 이끌고 대대손손 주군께 충효를 다하겠습니다.”
“별로 필요하지 않다. 한 문장 끝났다.”
완안영도의 말 한마디에 여진족의 운명이 결정된다.
완안영도가 몸을 벌벌 떨면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동방 연합 왕국을 이기고자 하신다면, 화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계의 기운을 이용하는 노선으로 가신다면, 실험 대상이 필요하시겠지요. 우리 여진 무사들은 주군께 자발적인 실험 대상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우린 실험 결과가 아무리 끔찍해도, 기꺼이 희생할 실험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두변은 완안영도의 말에 솔직히 놀랐다.
완안영도가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군, 소인은 이미 한 번 배신했던 터라 도저히 두 번 배신할 힘이 없습니다. 소인은 주군의 가장 충실한 주구가 될 것이며, 일생일세 절대로 주군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충성을 맹세할 땐, 피가 끓고 의리가 넘쳐야 하겠지만, 완안영도는 이 말들을 뱉는 게 죽기보다도 고통스러웠다.
“여진족의 운명을 위해서 내게 투항했으니, 나중에 마찬가지로 여진족의 미래를 위해 동방 연합 왕국에게 투항하는 것 아닌가?”
완안영도가 비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군, 만약 세계에 큰 이변이 없었다면, 우리 여진족은 중원지역을 점령해서 천하에 군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여진족이 더욱 강대해지기도 전에 이미 퇴물이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완안영도가 힘겹게 한숨을 내쉰 뒤, 이어서 말했다.
“우리 여진 무사들은 무척 용감합니다. 아마 주군의 절세 지하성 무사들과 비슷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퇴물 신세인지라, 동방 연합 왕국의 화포와 화총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동방 연합 왕국에게 우리의 가치는 오직 대녕 제국을 빼앗을 때 쓸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여진, 건로를 몰아내고 대녕 제국의 정통 황실이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소모될 도구 말입니다.
주군, 우리 여진 무사들이 주군께는 티끌만큼의 가치가 남았겠지만, 동방 연합 왕국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똑똑한 자이군. 시야가 넓고 안목이 탁월한 자야.’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해 천윤제께서 영설 공주를 너에게 사혼하려고 할 때 네가 거절한 건가?”
완안영도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예, 소인이 거절했습니다. 공주와 혼례를 올리지 않고 싶어서가 아니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방의 전쟁이 거의 끝났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 금태극이 다른 사촌 동생 고이민을 조선의 진수 대신으로 보내 놓았었다.
며칠 뒤, 완안영도가 2만 여진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서 고이민을 설득했고, 다음 날 고이민은 2만 여진 무사를 이끌고 돌아와 두변에게 투항했다.
대녕 제국 경성.
경성은 몇 개월 내내 신년 명절을 보내는 것처럼 온 성이 들떠있었다.
경성의 백만 백성은 두변 공작이 4만 군대를 이끌고 요동 지역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두변이 연이어 승전보를 전하면서 사람들의 근심을 말끔히 없애줬다. 요동의 주요 주와 현을 연달아 탈환했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경성에 도착했다.
당시 두변 공작이 심양 전투를 치를 때, 방계의 밀정들이 또 유언비어를 퍼트렸었다. 금태극이 30만 대군에 화포 수백 대로 두변을 포위했고, 두변의 군대가 전멸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하지만 두변 공작은 방계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가장 놀라운 소식이 경성에 퍼졌다.
‘두변 공작이 심양을 수복했고, 대금 제국 황제 금태극이 자결했으며, 대금 제국이 멸망했다!’
경성 전체가 끓어올랐다.
무수히 많은 백성에겐 두변은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혼자서 대녕 제국의 멸망을 수차례 막아낸 신!
게다가 무적인 여진 제국까지 혼자서 무찔렀다.
지금 이 시간,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는 딱 한마디였다.
“이제, 제국이 중흥하는구나!”
황궁의 영덕제는 두변의 희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 않고 놀랍기만 했다.
두변이 하늘도 놀랄 만한 기적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금성의 옥좌를 차지할 뻔하던 그렇게 막강한 나라가 두변의 손에서 멸국했다.
신기에 가까운 그의 행보에 영덕제는 오금이 저려왔다.
어떤 이유 때문인진 모르지만, 영덕제는 최근 머리가 어지러웠고,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지금 두변의 손에 있는 군대는 50만이 넘고, 북방에만 20만 대군이 있었다.
하늘을 집어삼킬 권력을 가진 신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이렇게 엄청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어떤 포상을 내려야 하나?
이때, 환관 하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두변 공작께서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들어와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영덕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할 두변이 드디어 왔어. 그를 마주해야만 할 때가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