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장: 영도현의 체면
북명검파에서 제남부까지 오는 데 최소 두 시진이 걸린다.
만약 두 시진 후에도 북명검파 사람이 두변을 죽이는 걸 제지하러 오지 않는다면, 기천구는 두변을 죽이고, 예상과 이도진, 그리고 계청주까지 죽일 것이다.
시간은 침묵 속에서 흘러갔다.
30분!
1시간!
3시간!
4시간!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하늘에 달이 걸리고, 달빛이 대지를 비추는 시간이 되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표돌천의 물이 흐르는 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졌다.
기천구가 눈을 뜨면서 말했다.
“두변, 시간이 다 됐다. 북명검파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서 참으로 실망스럽겠구나. 이제 그만 황천길에 오를 시간이다.”
기천구가 일어서자, 나머지 네 명의 은포 집행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천구가 검을 뽑은 뒤, 곧장 두변에게 다가가지 않고 이도진의 목에 검을 겨눴다.
“두변, 네놈이 나를 화나게 했으니,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여인을 죽인 뒤에 네놈을 죽여야겠다.”
기천구의 말에도 이도진은 아무 말도 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볼 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두변이 냉소를 지었다.
“영 종주, 오셨으면 얼른 얼굴을 보이셔야지요. 또 뭘 사기 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정적 속에서 몇 분이 흐르고, 달빛 아래 자태가 탁월한 중년 사내가 서서히 걸어 나왔다.
기천구가 허리를 숙여서 예를 올렸다.
“종주를 뵙습니다.”
네 명의 은포 집행자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종주를 뵙습니다.”
기천구가 물었다.
“종주, 종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영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오성 진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기천구가 목소리를 하나의 음파로 압축해서 영도현의 귀에만 닿게 물었다.
영도현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기천구는 경악했다.
오성 진은 북명검파의 핵심 명문(命門)으로, 그렇게 강한 성화교와 천계십자회가 수백 년을 노력했는데도 파괴하지 못한 것을 고작 두변 한 사람이 무력화시키다니.
영도현이 두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조건이 무엇이냐? 무엇을 해야 네가 오성 방어진을 복구해주냔 말이다.”
두변이 콧방귀를 뀌었다.
“조건이요? 복구라뇨? 이 세상에서 오성 진을 복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협상해야 할 조건은 내가 이 비밀을 성화교나 천계십자회에게 넘기지 않는 대신, 북명검파에서 내게 뭘 해줄 수 있냐입니다.”
“네가 그럴 리 없다. 너 또한 동방 세계의 사람이지 않나.”
“내가 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데 뭐든 못하겠습니까.”
이어서 두변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사실상 내가 여기서 죽거나 북명검파에서 열흘 이상 감금되면, 이 소식은 자연스레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성화교와 천계십자회 사이에 얼마나 깊게 앙금이 남아 있든, 즉시 연합해서 북명검파를 파멸시키겠죠. 이런 황금 땅이 이 세상에 딱 세 곳만 있으니까요. 내 말이 틀렸나요?”
영도현이 두변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상, 이도진, 계청주를 네게 돌려주겠다. 너에 대한 북명검파의 추살 명령도 거두겠다.”
“부족한데요.”
“적당함을 알아라. 너는 혼자가 아니지 않으냐. 북명검파에서 너와 가까운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너는 그들의 복수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기천구 장로 때문에 내가 화가 단단히 나서요. 저 사람의 따귀를 몇 대 치면 분이 풀릴 듯하니, 장로에게 저기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해주십시오. 따귀 네 대만 올려치겠습니다.”
기천구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고, 영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로 이렇게 추하게 나올 것이냐? 너는 총명한 사람이니 잘 알 터. 이런 행동은 은원만 더 쌓을 뿐, 그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한다.”
“영 종주가 나를 수차례 추살할 때부터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미 이 지경이 됐는데, 추하고 안 추하고가 중요합니까?”
영도현이 냉랭하게 말했다.
“두변, 내가 네 여인을 죽이게 만들지 말아라.”
두변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은포 집행자 한 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종사급 은포 집행자는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 두변의 검을 맞았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은포 집행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팔을 움찔거렸을 뿐, 영도현의 명령 없이 그 어떤 방어도,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푸슉.
이어서 두변은 다른 은포 집행자의 심장을 찔렀다.
두 번째 은포 집행자도 아무런 반항 없이 두변의 검에 찔렸다.
두변이 말했다.
“영 종주, 옳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종주가 나와 가까운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다 같이 죽자는 심보로 성화교에게 이 정보를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누설하자마자 종주께 죽임을 당할 테니까요. 하지만 난 지금 북명검파의 운석을 딱 한 개만 파괴했습니다. 만약 종주가 내 주변인을 해친다면, 난 두 번째, 세 번째 운석을 파괴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북명검파의 현기 농도가 얼마나 떨어질까요? 북명검파는 어떻게 되는 거고요?”
영도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두변은 북명검파 대장로 기천구 앞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말했다.
“기 대장로, 내가 말했잖아요. 따귀 몇 대만 올려치게 해주면, 일단은 용서해드린다고요.”
기천구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두변, 나와 원한을 맺어서 네게 좋을 건 하나도 없…….”
짜악!
두변은 기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뺨을 올려쳤다.
살살 때린 게 아니라 그런지, 기천구의 뺨이 곧바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영도현의 몸이 움찔거렸다.
영도현은 마치 두변의 손이 자신의 뺨을 올려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변이 영도현의 앞에서 보란 듯이 북명 대장로의 따귀를 치고 있으니, 자신의 따귀를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천구는 속에 천불이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두변을 으깨 죽여버리고 싶었다.
기천구 자신은 북명검파의 대장로로, 무도 세계의 정상에 서 있는 절대 강자였다. 그런데 무공 수준이 한참 아래인 두변에게 따귀를 맞고 있다니!
개미 같은 하찮은 존재에게 따귀를 맞고 있다니!
그럼에도 기천구는 간신히 화를 참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화를 참지 않을 수 없었다.
종주 영도현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자신을 등진 채 조용히 서 있는 것은, 이를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짜악!
짜악!
짜악!
두변이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 써가며 따귀를 네 대 올려쳤고, 기천구의 양쪽 볼이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다.
기천구는 두변을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렇게 몇 분 동안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영도현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남은 은포 집행자 둘이서 이미 죽은 집행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함께 떠났다.
영도현은 똑똑한 사람인지라, 두변과 그 어떤 담판도 하지 않았다. 두변이 오성 진을 복구하러 가지 않을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도현은 일단 이번 일을 조용히 덮어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른 시일 내에 오성 방어진을 복구할 생각이었다.
북명검파 내부에서 오성 방어진을 복구할 수만 있다면, 그럼 그때 두변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복구하지 못한다면, 두변의 계획대로 북명검파는 어떤 막대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에게 복구를 청해야 했다.
영도현은 아직 복구할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담판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엔 두변이 북명검파를 깔끔하게 이긴 셈이었다.
두변은 지금부터 북명검파의 명문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고, 명문을 계속 쥐고 있는 한 더 이상의 추살도 없을 것이다.
두변이 정자 안으로 들어와서 복잡한 눈빛으로 예상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예상의 배가 살짝 불러 있었다.
“부군, 난 서남으로 갈게요.”
예상 선자가 말했다.
두변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계청주가 정신을 차렸고, 복잡한 시선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계청주가 북명검파에 1년 동안 감금되면서, 자기 빼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진 듯한 괴리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계청주가 청룡회 회주였을 때는 항상 모든 것을 내려다볼 만큼의 권력과 지위를 누렸고, 당시 그의 눈엔 두변은 그저 작은 인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계청주가 공수의 예를 표했다.
“두 대인께서 목숨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두변이 허리를 숙여서 답례했다.
“계 대인,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서남의 군무가 무척 바쁩니다. 대인께서는 백색 부총병이시니, 서둘러 서남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계청주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깍듯하게 대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예상 선자가 두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도무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군, 몸조심해요. 난 먼저 갈게요.”
“공작 대인, 몸조심하십시오. 신은 서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곧바로 자리를 뜨자, 이도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대금 제국, 성도.
“아아.”
“으악.”
“아아악.”
지하 밀실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밀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격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2미터에 가까운 건장한 무사가 1대 10으로 혼자서 열 명의 무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거대한 무사는 차가운 표정에 동공이 핏빛을 띠고 있었다.
푸슉, 샤악, 서걱.
거대한 무사는 힘이 장사이면서도 몸놀림이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혼자서 칼 하나만 들고 3분 만에 무사 열 명을 죽였다. 정말 무시무시한 전투력이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강한 걸 보니, 완전무장하게 되면 더욱 폭발적인 전투력을 보일 것이다.
대금 제국의 주술사 국사의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200번이 넘는 실험을 거친 뒤, 그는 드디어 홍마약과 흑마약의 최적 비율을 찾아냈다. 국사가 그 최적 비율의 마약을 여진 무사의 몸에 주입하는 순간, 여진 무사의 겉모습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바뀌기 시작했다.
신장이 1.7미터에서 2.1미터로 바뀌었고, 몸무게가 150근에서 300근으로 늘어났다.
힘, 속도, 민첩성이 급속도로 향상되었고, 전투력은 기존의 열 배가 되었다.
마혈 무사 계획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대금 제국이 황금대제 태무친이 만들었던 천하무적 마혈 무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마혈 무사는 황금대제의 무덤에서 봤던 그 무사들과 외형이 똑같았다.
금태극이 물었다.
“이 두 상자로 얼마나 많은 마혈 무사를 만들 수 있나?”
주술사 국사가 대답했다.
“5천 명을 만들 수 있습니다.”
“5천이라. 비록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충분합니다. 5천 명이면 충분히 두변의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폐하, 마혈 군단은 두변의 변이 마랑 군단과 함께 있어야 더욱 폭발적인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5천 명 마혈 무사는 두변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5천 마랑 군단을 빼앗아 올 겁니다. 마혈 무사는 태생부터 변이 마랑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두변의 손에서 마랑 군단의 조종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5천 마혈 무사에 5천 변이 마랑이면, 정말 천하무적의 기병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이 5천 기병의 전투력은 5만, 10만 기마병의 전투력을 능가할 것이고, 북방 전체를 휩쓸기에 충분했다.
이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무적의 기병만 있으면, 폐하께서는 그 잡종 두변놈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대녕 제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금태극이 말했다.
“이원 아우, 짐이 너에게 바라는 게 하나 있다.”
이원이 곧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제 폐하, 명 내리시지요.”
“짐의 5천 마혈 무사가 곧 완성될 테지만, 그들에게 맞는 갑옷이 없다. 지금 만들기 시작한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고 말이야. 동방 연합 왕국의 갑옷이 그렇게 튼튼하다고 들었다. 창고에 곤륜노 무사들을 위한 갑옷이 잔뜩 쌓여 있을 텐데, 그 갑옷을 우리 마혈 무사들이 입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원 아우가 동방 연합 왕국에게 곤륜노 갑옷 5천 벌을 지원해달라는 서신을 써줘야겠다.”
이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금태극은 일찍이 이원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원이 대답했다.
“신, 명 받들겠습니다.”
대녕 제국 영덕 원년 3월 29일.
두변은 1만 5천 대군은 남아서 산해관을 수비하게 하고,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여진과의 전투를 위한 여정을 떠났다.
두변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적을 쓰러트리며 북쪽으로 향했다.
4월 5일, 두변 대군이 영원성을 수복했다.
4월 13일, 두변 대군이 요동 중진인 광녕성을 수복했다.
4월 25일, 두변 대군이 요동 중진이자, 이전의 요동 총독부가 있던 요양부를 수복했다.
두변 대군은 사흘 동안 재정비를 한 뒤, 계속해서 북상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대금 제국의 경성인 성도였다.
이번 전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로웠다.
대금 제국의 모든 성곽에 있는 수비군은 두변의 대군을 보자마자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결국 두변의 대군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요동 지역의 8할을 되찾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강대하던 여진 제국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대녕 제국의 병사들보다 더 쓸모가 없어진 듯 보였다.
“주군, 뭔가 이상합니다. 여진 제국의 군대가 이렇게 약할 리가 없어요. 분명 음모입니다.”
“당연히 음모겠죠. 우리가 수복한 영토 대부분은 금태극이 자발적으로 포기한 곳입니다. 그는 심양에서 우리를 모두 잡아들일 거대한 망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부홍빙의 말에 두변이 대답했다.
“금태극이 여진 제국의 남은 대군을 전부 집결시켰다던데, 심양에서 대결전을 펼치려나 봅니다.”
부홍빙이 말하자, 옆에 있던 이릉이 말을 도왔다.
“만약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여진 제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금태극의 이번 전술을 보았을 땐, 우리가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심양에 집결한 대군의 수가 최소 30만일 테니까요.”
최소 30만 대군이 심양성을 수비할 테니, 두변의 4만 대군으로 심양성을 함락시키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두변이 말했다.
“심양성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이 30만 대군이 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금태극이 내게 아주 놀라운 선물을 준비해 뒀을지도 모르죠. 금태극은 아마 자기가 이번 전투에서 필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승자는 일찍이 정해져 있습니다.”
두변이 차를 한 모금 음미하면서 말했다.
“주군, 무엇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최근에 마랑들이 초조해하고 불안해합니다.”
부홍빙의 말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