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장: 피를 토하는 장군들
심양 대전.
대녕 제국과 여진 제국의 국운을 건 결전이 시작된 지 이미 15일째를 접어들고 있었다.
요양 총병 이원이 이번 대전에서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이원의 화포 200대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면서, 성벽 위의 여진 제국 병사들은 성벽 밖으로 머리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다.
40만 대군이 심양성을 포위해서 공격했고, 이원의 6만 대군이 제일 많은 공을 세웠다.
남은 34만 대군은 최전방에 있음에도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보름이 지날 동안, 대녕 제국이 심양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미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원의 화포 덕분에 대녕 제국의 대군은 이미 몇 차례 심양성의 성벽을 오르기도 했다.
대녕 제국의 군대는 싸우면 싸울수록 전투태세가 용맹해졌고, 여진 제국의 사기는 점점 더 떨어져만 갔다.
모두가 보기에 대녕 제국이 심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요 며칠, 이원은 정말 위풍당당하게 전장을 거닐었다.
40만 대군이 전부 그의 이름을 칭송했고, 여진 제국에도 그의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원의 휘황찬란한 업적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날이었다.
경성에서 온 새로운 성지가 전장에 도착했다.
“황제가 명하노라. 요양 총병 이원을 요동 변진 부총독으로 임명한다.
황제가 명하노라. 요양 변진 부총독 이원을 요양 자작에 봉한다!”
두 성지의 내용이 전해지는 순간, 전군이 놀라워했다.
두변도 처음에는 남작으로 시작했고, 그것도 황제의 목숨을 구한 대가였다. 그리고 두변이 백색 자작이 된 건 백색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원이 심양성을 함락시킨 건 아니지만, 경성은 벌써 이원을 부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심양성이 함락되면, 이원은 곧바로 백작으로 봉해질 것이고, 이대로 총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가 되면, 이원은 두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두 성지 외에, 더 좋은 소식이 요동 전장에 전해졌다. 여진 제국이 화의를 위해 사자를 보낸 것이다.
원등 공작과 이원 등이 그 사자를 내쫓았지만, 사자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소식이었고, 여진 제국이 더는 못 버틴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원은 이 두 가지 희소식을 축하하기 위해, 황족의 천은에 감사하기 위해 대연회를 열었다.
이원은 당직을 서는 병장들 외에, 대녕 제국의 만호 이상의 장수들을 전부 연회에 초대했다.
영설 공주는 전투중에 이런 연회는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지만, 대녕 제국의 떠오르는 혜성인 이원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전군의 수백 명 장군이 모두 이원의 연회에 참석했다.
게다가 지금 밖에는 눈까지 내리고 있으니, 갑작스러운 습격이나 전투가 벌어질 리가 있을까.
연회석에 앉은 이원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평소처럼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로 장군들과 한담을 나눴다.
“건로도 더는 못 버티는 것 같소. 평화 담판을 하기 위해서 사자까지 보내다니요.”
“앞으로 닷새요. 적들이 기껏해야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닷새. 닷새만 지나면 심양성은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
“심양성을 수복하는 건, 건로와 여진 제국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오.”
“강대한 여진 제국을 상대로 멸국의 공을 세우다니. 서남 여여해 같은 아무개와 비교할 게 아니지.”
“옳소. 이원 대인께서 세운 공로가 두변보다 훨씬 크지.”
“심양성을 수복하게 되면, 이원 대인의 작위는 두변보다 낮을 리 없소. 이런 큰 공을 세웠는데도 두변보다 작위가 낮은 건, 너무 불공평한 일 아니겠소.”
“맞지요. 나중에 다 같이 상주서를 올립시다. 이원 대인을 후작으로 봉해달라고요. 두변과 똑같이 작위를 받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아니지, 두변보다 작위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소.”
자리에 있던 장군들은 이원에게 아첨 떨기 바빴다.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은 이런 광경이 썩 보기 좋지 않았지만, 굳이 나서서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다.
영설 공주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녀가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당직을 보러 가야겠군. 그럼 이만.”
영설 공주는 이 말을 남기고 곧바로 연회석을 떠났다.
영설 공주가 떠나자, 자리에 있던 장군들이 이원을 추켜세우고 두변을 짓밟는 발언이 더 노골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영설 공주가 있을 때는 그나마 술도 자중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녀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더욱 흥이 오른 채 마음껏 술을 퍼마셨다.
연회석에 앉은 이원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곤 했지만, 그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이원은 취기가 오른 것처럼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걸음을 내디디면 이제 돌이킬 수 없지.
아니지. 내가 돌이킬 필요가 뭐 있겠어?
영설 공주, 똑똑히 봐라. 나 이원이 두변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잔혹하다는 것을. 대녕 제국이 내 손에 망하는 것도 꽤 재미있겠군.”
이원이 얼큰하게 취한 장군들을 스윽 둘러본 뒤,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수십 명의 종복들이 조용히 술 주전자 속의 기관을 누르고는, 장군들에게 술을 따랐다.
그 술은 독주였다.
이원은 지금 당직 중인 병장들 제외하고, 대녕 제국 40만 대군의 고위 장군들을 한 번에 죽일 작정이었다.
이원의 연회가 시작된 지 벌써 반 시진 이상 술을 마신 상태였다.
동방 연합 왕국이 준 맹독은 무색무취여서 자리에 있던 진북 공작 원등, 선화 공작 난오 등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종복이 따라주는 술잔을 그대로 기울여 쭉 들이켰다.
독이 든 술은 전혀 이상한 맛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술맛이 더 좋고 향긋하다고나 할까.
두 공작, 그리고 수백 명의 장군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때, 진북 공작 원등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술에 독이 들었다는 걸 눈치챈 게 아니라, 이원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것이다.
비록 이원이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 떠오르는 혜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이원과 두변의 차이는 두드러질 만큼 크기만 했다.
원등과 난오 공작은 두변이 겉치레로 사람과 교류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는 걸 이미 간파한 상태였다. 두변은 소수 사람에게만 친절하지, 나머지 사람들에겐 영원히 차갑고 고고하기만 했다.
두변과 달리 이원은 혼자 있을 때만 냉랭하지, 사람들 앞에서는 무척 겸손하고 늘 자신을 낮추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원은 예전에 보이던 겸손한 모습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냉랭함이 가득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술을 따르고 혼자서 술을 마셨다.
이원이 연회석을 바라보는 눈빛도 잔혹하고 하찮기만 해서, 원등은 이원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원등 공작이 말했다.
“이원 총병, 오늘은 자네가 기분이 좋아야 할 날인데 왜 갑자기 표정이 안 좋은 건가?”
이원이 원등 공작을 흘깃 쳐다본 뒤,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원등 공작은 경악했다.
항상 겸손하기만 하던 이원이 갑자기 이렇게 거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를 보이다니! 벌써 이렇다고? 아직은 아니지!
원등 공작이 격노해서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내팽개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갑자기 발이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윽.”
원등 공작은 자신의 손이든 발이든 제 맘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서 아무리 일어나려고 애써보아도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쿵, 쿵, 쨍그랑!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의 장군들이 한 명 또 한 명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증상은 원등 공작과 똑같아서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서 통제력을 잃고 몸을 떨기만 했다.
사람들이 뒤늦게 이원을 쳐다보았다.
원등 공작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술, 술에 독이 들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고, 혓바닥까지 굳은 상태였다.
“그렇지. 술에 독이 들었지.”
이원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왜 이런 짓을?”
원등 공작은 이원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심양성을 수복하는 날이 코앞인데? 대녕 제국이 대승을 거두는 건 시간문제인데? 이원이 천하의 공로를 세우는 대로 곧 백작에 봉해질 텐데? 대녕 제국의 거물이 될 텐데?
이원이 원등 공작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을 짓밟으면서 말했다.
“아둔한 늙은이 같으니, 이건 다 거짓이라고. 여진 제국이 정말로 질 줄 알았던 건가? 정말로 내가 6만 대군과 화포 200대로 손쉽게 요양성을 수복한 줄 알았어? 내가 전장에 나섰다 하면 이기는 게 이상하지도 않았나 보지? 심양전에서도 그렇지. 내가 맡은 성벽 쪽만 여진 제국 병사들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게 이상하지도 않았나? 여진 제국에선 나 이원이 전쟁의 신이라고 소문까지 났다고? 심지어 금태극이 진심으로 우리와 화의하자고 사자를 보냈을까? 다 거짓이라고. 모든 게 다 음모일 뿐이라고!”
원등 공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원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연기를 너무 잘했나 보군. 당신들은 내가 정말로 전쟁의 신이라도 된 줄 알았나 보네.”
이원이 원등 공작의 얼굴을 더욱 세게 짓밟으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녕 제국의 태자도 참 재밌는 사람이지. 없는 은자를 그렇게 긁어모아서 준격이간국과 와나간국을 임시 휴전상태로 만들고 와나간국이 동쪽의 여진 제국을 공격하는 모양새를 만들다니. 꼭 천하가 여진 제국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원이 손에 든 술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아 뭐, 태자가 대단하긴 하지. 멍청한 제 아비보다는 훨씬 나아. 하지만 태자도 결국 황궁 깊은 곳에서 자란 화초인지라, 제왕의 계략이란 게 탁상공론에 그치지 뭐야. 와나간국의 십만 대군도 여진 제국을 간지럼 태우는 것밖에 안 돼. 공작, 여진 제국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여진 제국이 연달아 패배한 것도 다 가짜거든. 다 우리의 음모였어. 우리의 목적은 하나이지. 대녕 제국의 40만 마지막 주력을 전부 다 없애는 것. 이번 음모에서 제일 핵심인 사람이 바로 나였거든.”
이어서 이원이 비수를 꺼내 들더니, 원등 옆에 있던 참장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리더니 그자의 목을 휙 그어버렸다.
참장은 독 때문에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목에서 피를 뿜으면서 죽고 말았다.
“죽여라. 공작 대인 두 분 빼고 다 죽여버려!”
이원을 따르는 수십 명 종복이 소매 속에서 얇은 칼을 꺼냈다. 손목에 감을 정도로 얇고 가벼운 칼을 든 종복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막사 안의 모든 장군의 목을 베었다.
장군들은 독주를 마신 터라, 무공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사지가 마비되어서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한 명, 또 한 명이 죽어갔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막사 안을 가득 메우고, 연회장의 바닥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막사 주위로 몇십 미터 밖까지 아무도 없어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소리 없는 대살육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잠시 후, 백 명이 넘는 장군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만 숨이 붙어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큰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녕 제국 40만 대군은 심양성을 겹겹이 에워싸고는 그 대열이 몇십 리 밖까지 꼬리를 물고 있었다.
“두 공작 대인, 애초에 이번 전투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물론 내가 있어서 당신들이 파멸하는 시간이 좀 더 앞당겨지긴 했지만 말이야.”
이원이 냉소를 지으면서 술잔을 내팽개쳤다.
“태자 전하,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영도의 뒤를 이을 희대의 배신자가 또 나타났네요.”
이원이 연회석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술 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이영도, 내가 너보다 더 강하다! 넌 대녕 제국의 십수 만 명을 죽였을 뿐이지만, 나는 무려 40만 명을 해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