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54화 (454/648)

454장: 밀서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별일 없습니다. 마마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뒤에 요동에 서신을 보내려고 한단다. 영설이 돌아올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두 사람이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얼마나 좋겠니? 아니면 네가 요동으로 가는 건 어떠하니? 둘이 혼례만 올렸지, 그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잖느냐. 그러면 안 되지.”

“앞으로 볼 시간이 많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순진한 황후는 두변이 요동 전장에 한 발자국도 들여놔선 안 되고, 이미 경성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

“폐하, 우리의 목표를 위해, 제국의 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변이 황제의 손을 힘껏 붙잡고서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고는 곧바로 황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황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그럴 수야 없지. 서남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당장 갈 필요는 없지 않으냐. 밥 한 끼라도 먹고 가야지. 적어도 영설이 돌아오고 하룻밤만이라도 같이 보낸 뒤에 가야지.”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서남 일이 정말 너무 바빠서요.”

황후가 그래도 완강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된다.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고 가거라. 나를 그렇게 매몰찬 장모로 만들 셈이냐.”

황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반 시진 뒤.

두변, 태자, 황후 세 사람이 작은 탁자에 나란히 앉아서 식사했다. 요리는 평범한 가정식이었지만, 무척 맛이 좋았다.

황후가 두변에게 계속해서 반찬을 집어주면서 그를 챙겼다.

“많이 먹거라. 정말 그렇게 급한 것이야? 하룻밤도 못 자고 갈 만큼?”

황후가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는 두변을 진심으로 아꼈고, 그를 친조카처럼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자기 남편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고, 제국의 위급한 국면을 수차례 막아냈지 않은가. 황후의 눈에는 두변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위이자 신하인 것이다.

태자가 물었다.

“두변, 하룻밤 자고 가는 건 어떤가? 안 그러면 모후께서 나를 한 달 동안 욕하실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바쁠 것 같습니다. 이런 긴박한 순간엔 도저히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어서요.”

“알겠네. 그럼 내가 이따 자네를 배웅하지.”

황후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너희들 참 말을 안 듣는구나. 당시에 영설도 그랬지. 내게 말 한마디 없이 요동 전장으로 가고 말이야. 이젠 두변까지 황궁에 오자마자 떠나고. 폐하와 내가 그렇게 너희와 시간 보내는 게 어렵다는 것이냐.”

두변은 황후가 눈시울을 붉히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황궁을 떠났다. 두변이 경성에서 머문 시간은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듯했다.

태자가 두변을 직접 경성 밖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경성 교외.

태자가 한참을 동안 고민하다가 물었다.

“두변, 요동에 있는 자네의 5만 대군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냐?”

두변은 정말이지 화가 났다.

‘내가 그 정도로 소인배는 아닌데. 정말 나를 시기 질투나 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본 건가? 요동 전투가 처참하게 패배하길 바라는?’

두변이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하, 저보다 더 요동 대전에서 대녕 제국이 대승을 거두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일 좋은 건 건로까지 처치하는 것이고요. 북방에서 대승을 거둬야 제가 있는 서남도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서남 신법에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니까요.”

두변이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대국적으로 보았을 때, 두변은 요동 전투가 대승으로 끝나길 바랐다.

이 대전에서 대녕 제국이 승리를 거두면 이원이 작위에 봉해지는 것도 알고, 태자가 이원을 두변을 견제하도록 키울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어쩌면 이원이 두변을 대신해서 대녕 제국의 구세주가, 일대 군신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로 두변은 그런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두변은 누군가와 공로를 두고 다툴 생각이 아예 없었고, 유명세를 두고 경쟁할 생각도 없었다.

두변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발전이고, 사명을 완수할 만큼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진심으로 대녕 제국이 요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길 바랐다.

하지만 교룡의 직감이 계속해서 일이 뭔가 예측할 수 힘든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태자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서 사과했다.

“내 실언이네.”

“신, 가보겠습니다.”

두변은 별다른 말 없이 예를 갖추고는 그대로 야생마를 타고 기마병들을 이끌고 경성을 떠났다.

태자의 시야에서 벗어난 걸 확인한 순간, 두변이 명령을 내렸다.

“내 대역을 호위해서 빠른 속도로 서남으로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기마병 부대가 대답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두변은 동남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려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심양성 방어선.

대녕 제국과 여진 제국의 운명의 대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양측의 총병력은 60만에 육박했다. 대녕 제국의 병마 40만, 여진 제국의 병마 20만.

양측의 국운이 걸린 전투인 만큼, 여진 제국이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멸국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대녕 제국이 만약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요동 전체를 잃을 수도 있고, 여진 제국이 그 기세를 몰아 곧바로 산해관까지 치고 내려와서 경성을 위협할 것이다.

이연정의 의손자, 태자의 직속, 두변의 의형이자 요양 총병인 이원의 군영 안.

대녕 제국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혜성이자, 연달아 몇 번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두변을 대체할 수 있는 젊은 군신인 이원이 멍하니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원의 마음에 수천, 수만 가지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막사 안에는 이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주위에 누군가가 있는 걸 불편해했다. 이원은 십여 년 내내 냉담한 사람이었다. 다만 이연정, 두변 등, 몇 사람 앞에서만 무척 열정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이때, 그림자 하나가 이원의 막사 안으로 조용히 들어와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주인의 밀서이다. 아주 급한 밀서.”

이원이 말없이 밀서를 받아왔다.

바다 비린내가 이원의 코끝을 살짝 스쳤다.

밀서를 열어서 내용을 확인한 이원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밀서에는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때가 됐다.’

두변은 하루 반나절 뒤에 북명검파에 도착해서 영도현 앞에 나타났다.

북명 종주 영도현이 두변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지금 영도현이 느끼는 경악과 놀라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세계의 갈라진 균열에 던져진 두변이 살아서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두변의 신체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가 영도현을 더욱 놀라게 했다.

두변은 정상적인 남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꼭 맹호나 교룡이 된 것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때, 두변이 눈을 감았다.

두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눈빛, 얼굴, 체형이 완전히 바뀌고 신비한 빛이 그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북명검파 제12대 종주 오애지의 정신력이 이 공간 전체를 장악하면서, 그의 모습이 두변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서는 익숙한 북명대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북명검파 제20대 종주는 명을 들으라.”

영도현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예, 말씀하십시오.”

제12대 종주 오애지의 빛무리가 말했다.

“두변은 북명 선조께서 예언한 자, 사명의 주인이 맞다. 두변을 다음 종주로 모실 것을 명한다.”

이원의 막사 안.

밀서를 확인한 이원은 제자리에서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서를 가져온 비밀스러운 사람이 물었다.

“왜, 무슨 불편한 것이라도 있나?”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밀서를 가져다준 사람은 소리 없이 막사를 나갔고, 이원은 밀서를 화로에 던져서 태운 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화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십수 년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연정의 자애로움, 황제의 중용, 태자의 간곡한 지도.

한참이 지난 뒤, 이원은 막사를 나서서 말에 올라탔다. 이원이 향한 곳은 영설 공주의 막사였다.

이원이 가는 길에 마주친 모든 병사들이 열광적이고 동경 어린 눈빛으로 이원을 쳐다보았다. 요동 지역에 있는 대녕 제국의 군대 전체가 그를 영웅처럼 추앙했다.

이원 대인이 바로 우리들의 구세주이자, 희망이다!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야 두변 후작이 서남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어찌 됐든 이원 대인이 두변보다 훨씬 대단할 것이라 생각했다.

두변이 서남에서 상대한 적은 여씨 토사이고, 이원 대인이 상대하는 적은 여씨 토사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절대 강적 여진 제국이니까.

그러니 이번 대전이 끝나는 대로 이원 대인이 두변 후작처럼 작위를 받을 것은 분명했다.

“이원 대인, 만승하십시오!”

“이원 대인, 공후만대(公侯萬代)를 기원합니다!”

병사들은 이원을 마주치게 되는 족족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구호를 외쳤다.

이원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요양 총병, 공주 전하를 뵙고자 합니다.”

이원이 밖에서 말했다.

30초 뒤, 군장을 입은 영설 공주가 막사 밖으로 나와서 공수했다.

“이원 의형.”

영설 공주는 두변을 따라 이원을 의형이라고 불렀다.

요동 날씨가 워낙 추운지라 영설 공주는 군장 위에 표범 모피로 만든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모피 덕택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고귀하고 화려하게 돋보였다.

두 사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영설 공주가 물었다.

“이원 의형, 상의할 군무가 있는 건가요?”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영도라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영도, 그러니까 완안영도는 한때 대녕 제국의 가장 뛰어난 젊은 장수였고, 하마터면 영설 공주의 남편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녕 제국의 희대의 배신자가 되었지만.

완안영도는 여진 제국 공주의 남편이면서 여진 제국에서 서열 5위에 드는 거물이었다. 그는 요동 지역 대녕 제국 군대의 최강 적수이고, 열 번의 전투 중 아홉 번이나 주장(主將)으로 나선 사람이었다.

완안영도만큼 대녕 제국의 전투 방식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녕 제국의 군대가 완안영도와 전투를 벌이게 되면 열의 아홉은 패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심양 전투에서 여진 제국을 이끌 주장군이 완안영도였다.

영설 공주는 그 이름을 듣고도 무척 담담한 태도로 웃으면서 말했다.

“적군의 주장군에 대해선 나도 직접적인 접촉을 한 적이 없으니,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알고 있죠.”

“그럼, 공주 전하께서는 이영도가 당시에 왜 대녕 제국을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설 공주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시 요동 전장에서 이영도는 원등 공작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대 전원을 잃을 정도의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서 대녕 제국 입장에선 이영도의 배신이 무척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영도의 배신으로, 심양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모든 거점을 함락당하는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원이 물었다.

“두변 의제는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까?”

영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영설 공주는 두변이 이미 대녕 제국으로 돌아온 지 20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이원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자, 영설 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의형, 할 말이 있다면 편히 해요.”

“북명 종주가 두변을 세계의 갈라진 균열로 던진 뒤, 그가 실종된 지 벌써 1년이 다 돼가고 있습니다. 만약…… 두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를 위해서 평생을 독수공방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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