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장: 반역자의 후계자
“왜, 또 화났어? 왜 그렇게 속이 좁아서 툭하면 화를 내는 거지?”
“그럴 리가요. 저는 영원히 당신에게 화를 내지 못할 겁니다.”
“입 다물어라. 너랑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옥진 군주,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옥진 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군주, 무얼 기다리냐고요?”
옥진 군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옥진, 지금 무얼 기다리는 거냐고요!”
옥진 군주가 눈을 뜨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썰물을 기다린다! 한 글자만 더 말하면 내가 너를 때리기 시작할 거다.”
두변은 단호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고 큭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웃지? 내가 야만스럽다고 비웃는 거냐?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혈관음처럼 다정해지는 건 전혀 불가능해.”
그런데 인간쓰레기 두변은 지금 혈관음이 아니라 이도진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지은 죄가 많구나. 이 인간쓰레기 같으니라고!
이도진, 송옥진, 두 사람 다 이름에 ‘진(眞)’자가 들어갔지만 성격은 확연하게 달랐다.
한 명은 물처럼 부드럽고 다정한데, 다른 한 명은 주먹으로만 말할 줄 알고.
옥진 군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두변이 눈을 감아 버렸다.
몇 시진 뒤, 드디어 썰물 때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바닷물이 가득 찼던 곳에 지금은 거대한 암초가 드러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암초들은 다섯 사람이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는데, 특이한 예술적 풍격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다섯 사람의 얼굴은 험상궂었다.
옥진 군주가 다가가서 그 암초들을 밀어서 특정한 오각형 방위를 이루게 만들었다.
쿠궁!
순식간에 거대한 암초 다섯 개 사이로 입구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게 바로 환멸도의 입구야. 봐, 섬은 아니잖아.”
두변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다, 당신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고 절대적으로 극비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애초에 옥진 군주가 알 수 있는 곳이 아닌 데다가 진남공 송결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옥진 군주가 아무리 척후병들의 수장이라고 한들 그녀가 비밀을 캐내려고 이런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흘 전에 어떤 이가 내게 지도 한 장을 줬는데 그 위에 환멸도 입구가 표시되어 있었지. 굉장히 흥미롭더라고. 이곳에 병사들을 숨겨놓을 수 있거나 비밀 창고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혼자 한번 와본 적이 있는데, 저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고 괴상한 기운만 감돌던데.”
“누가 당신에게 지도를 줬는데요?”
“그자는 군대 척후병 옷을 입고 있었으니, 내가 지도를 그리라고 보낸 척후병이겠지.”
아니, 절대로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고의로 환멸도 입구를 옥진 군주에게 넘긴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한 목적은 두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이 가정이 맞다면 이 아래는 아마 천라지망(天羅地網: 하늘의 그물과 땅의 그물.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경계망이나 피할 길이 없는 재액災厄)일 것이다.
이 상황을 보면 청군입옹(請君入甕: 그대가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시오, 라는 뜻으로 자기가 정한 규칙 따위에 자신이 당하게 되는 경우를 비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용담호혈(龙潭虎穴: 용이 사는 깊은 연못과 호랑이가 사는 굴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험한 곳을 비유)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음모궤계(陰謀詭計: 음모와 위계)?
과연 모든 것은 두변의 예측대로일까? 그게 아니라면 흡성대법의 행방을 어떻게 도진과 여마두 막추가 공교롭게도 알게 되었을까?
만약 예측대로라면 이 일을 꾸민 배후 인물은 두변이 올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음모이기도 했다.
그러니 옥진 군주가 자신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게 할 수는 없었다.
“군주께서는 돌아가세요.”
송옥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당연히 너와 함께 가야 해.”
“옥진 군주, 앞으로 일어날 일은 당신이 알면 불편할 겁니다. 제가 혼자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너와 함께 가겠어. 절대로 네가 혼자 위험을 무릅쓰게 하지 않겠어.”
두변의 얼굴이 능글맞아지면서 말했다.
“제가 내려가는 건…… 정상적인 남자가 되기 위해서이고, 남자의 당당한 풍모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며, 그 ‘알’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주가 정말 저와 함께 내려가려고요? 만약 그때가 되면 제가 당신에게 그럴까 봐…….”
“이 망나니 같으니!”
옥진 군주는 두말하지 않고 뒤돌아서더니, 배를 타고 그대로 북상했다.
“하아…….”
역시 이런 부류의 여인은 속이기 쉽구나!
두변은 입에 벽사단을 물고 깊이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신 뒤 환멸도 입구로 들어갔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곳은 손을 뻗어도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습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평소에 해저에 있을 텐데도 뜻밖에 조금도 축축하지 않았다.
두변은 계단을 따라 쭉 아래로 내려갔고, 내려갈수록 영문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쿠궁.
저기 위에서 환멸도의 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험상궂게 생긴 암초 다섯 개가 원위치로 돌아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쯤 되니, 두변도 무언가 정말 기이했다.
흡성대법의 비급이 정말 이 안에 있을까?
여마두 막추가 안에 있는 건가? 시스템이 내게 영도현의 젊은 시절로 분장하라고 한 건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지?
두변이 물었다.
‘시스템, 문제가 없다고 확신해요? 뭔가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음모 같단 말이죠!’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안심해라. 내가 모든 걸 파악하고 있으니.’
시스템이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니 그나마 두변도 마음이 놓였다.
다시 계단을 따라 곧장 아래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대단히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우우!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괴수의 머리가 튀어나오더니, 지옥 같은 큰 입을 벌리더니 두변을 덥석 물어서는 그대로 배 속으로 삼켰다.
젠장! 이런데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런데도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한 거야?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하고 괴수가 두변을 곧바로 배 속으로 삼켰다.
두변이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이게 별일이 아니라고요? 이런데도 빌어먹을,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 거예요?’
곧 먹히려고 하는 판인데도 기이한 불빛은 여전히 이렇게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라.’
이후, 두변에게 전에 없던 여정이 펼쳐졌다.
괴수에게 삼켜지기는 했지만 뜻밖에 씹히거나 소화되지는 않았다. 그보다 터널을 관통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주변의 모든 게 다 새빨갰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이었다.
두변은 지금 괴수의 배 속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장장 수백 미터나 미끄러지더니, 어딘가 구멍을 빠져나갔다.
풍덩!
그리고 연못 같은 곳으로 떨어졌다.
한순간 두변은 어리둥절해했다.
이제 보니 괴수에게 삼켜지는 것도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었나 보군.
이 연못도 너무 편안해. 일반적인 온천의 온도보다 더 높은 편이야.
연못 안에서 기어나오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매우 건조하면서도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문도 모르게 몹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안에 흐르는 건 강물이 아니라 암장이었다.
대은구도 아래에도 암장이 있지 않았던가. 이곳 역시 암장의 강이 장장 수십 미터 너비로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 모를 정도로 깊어 보였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두변은 최대한 암장의 강에서 떨어져서 앞에 있는 큰 섬을 향해 걸어갔다. 다만 그 섬은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 암장의 바다에 있는 섬이었다.
어쩐지 전에 옥진 군주가 살폈을 때는 이 아래에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했더라니. 그녀는 목표 인물이 아니라서 거대한 괴수가 그녀를 삼킬 리 없었다. 그러니 환멸도의 지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올 방도가 없었으리라.
결국 이곳은 절대적으로 비밀 보장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설령 누군가가 이 환멸도 입구를 안다고 해도 내부로 깊이 들어올 수 없었다.
고작 수백 미터를 걸었는데 축축하던 옷이 바로 바짝 말랐다. 이곳의 공기가 지나치게 건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하 깊숙한 곳에 어떻게 공기가 있을 수 있을까? 두변은 뜻밖에 이곳의 산소가 부족하지도 않을뿐더러 농도가 몹시 짙다는 걸 발견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지하 환멸도 앞에 도착하니 석문(石門)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그 안이 너무 밝아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문 뒤편에 거대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는데 수십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두변은 한눈에 여마두 막추를 알아봤다.
그녀는 대체 몇 살일까?
대은구도에 있었을 때도 여마두 막추는 겉보기에 희민지와 이도진보다 더 젊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내리쬐는 빛 속에서, 그녀는 지능이 딸리는 막한보다 기껏해야 네다섯 살이 많아 보일 뿐이다.
미모는 어떻냐고? 두변의 친모 희민지도 절색 미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여마두 막추 앞에서는 빛바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대은구도 제일 미녀라는 호칭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게 아니었다. 심지어 천년사요 구슬을 복용한 뒤의 이도진도 미모로는 막추와 적수가 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런 정교한 미모는 정말이지 하늘이 내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명 속에서 두변은 고작 막추를 알아봤을 뿐 나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들의 무공은 알아볼 수 있었다.
죄다 종사 등급 이상에, 심지어 대종사 직전의 종사도 일고여덟 명 정도였다.
하지만 진정한 대종사는 여마두 막추 한 사람뿐이었다. 그걸 보아도 대종사에 오르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모였나? 저 사람이 마지막 한 명이로군?”
갑자기 더할 나위 없이 괴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너무 이상해서 두변은 참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그 괴상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정말 이상하군. 종사급 고수가 서른한 명이 왔는데 말이지. 마교, 서역, 남해, 중원 무림의 고수도 왔고, 북명검파의 배신자도 왔지. 헌데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은 뜻밖에 무공이 이토록, 이토록, 이토록 낮은 젊은이란 말인가?”
두변은 할 말이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의 무공이 몹시 낮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토록’이란 말을 세 번이나 할 필요가 있나?
그때 두변도 마침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 틈에 끼어서 사는 사람인가?’
해골처럼 마른 늙은이가 그곳에 있었다. 늙은이는 머리에 머리카락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지만, 남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몹시도 길었다.
눈은 움푹 튀어나온 데다 크면서도 공포스러웠으며, 얼굴이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랐고, 코는 마치 낫처럼 굽었다.
반면에 두 팔은 놀라울 정도로 긴 데다, 손가락 열 개는 평균 이십 센티미터가 넘을 정도로 길었다.
나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자였는데,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저 노괴물의 목소리가 그토록 괴상하고 괴팍했구나.
노괴물이 말했다.
“너희는 모두 흡성대법 때문에 왔을 것이다. 너희가 무슨 방법으로 흡성대법이 환멸도에 있다는 걸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너희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왔을 것이다. 내 신분은 소개할 필요가 없을 테지. 바로 북명검파 최대 반역자의 후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