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장. 이도진의 생사
희민지의 참회를 들은 두변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도진 종사, 그리고 희 부인, 제가 유명신장의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진짜입니다. 하지만 정말 죄송하게도 제 능력으로는 둘 중 한 사람만 살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살린 뒤에 하룻밤 동안 회복한 뒤에야 두 번째 사람을 살릴 수 있고요. 하지만 두 사람은 일각이 지나면 죽게 돼요. 그래서 제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둘 중 한 명뿐입니다.”
희민지의 눈빛에 생존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일렁였다.
“정, 정말로 유명신장을 해독할 수 있다고? 유명신장에 맞은 사람을 구할 방법은 없다고 들었는데?”
“희 부인, 절 믿어주세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유명신장을 해독할 수 있지만 둘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습니다.”
희민지는 살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둘 중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자기가 살길 원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은 없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두변과 똑같은 말을 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도진을 자신이 죽여서라도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희민지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버렸던, 포기했던 친아들이다. 자신이 버렸던 친아들에게 목숨을 구해달라고 어찌 부탁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
“이도진 사저, 여기서 두변의 치료를 받아요. 난 먼저 돌아갈게요.”
희민지가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친아들 앞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희민지는 결국 존엄을 지키며 죽는 길을 택했다.
“잠깐!”
두변의 말에 희민지가 걸음을 멈췄다.
“희 부인, 저는 두씨 가문의 그 누구도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버렸던 건 사적인 원한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씨 가문은 대의를 따르지 않는 간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두씨 가문은 평생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희민지는 두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제가 언젠가 두씨 가문을 없애 버리겠다 말한 적이 있습니다. 두씨 가문에서 감옥으로 가야 할 사람은 감옥으로 가고, 처형당해야 할 사람은 처형당해야 마땅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제겐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모가 바로 제 어머니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오늘부터 저와 남남이 되는 게 좋겠습니다.”
희민지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있는 힘껏 어금니를 깨물면서 눈물을 참았다.
두변이 말했다.
“세상에는 낳아준 은혜보다 키워준 은혜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당신을 어머니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낳아준 은혜가 있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만 당신과 온전히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진짜입니다. 이도진 종사, 저는 이미 당신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적이 있으니, 당신에게 빚진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엔 희 부인의 목숨을 구해드리고자 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도진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해한다. 그리고 저번에 나를 한 번 구해준 적 있지만, 내가 그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해주지 못해서 서운했을 테지. 대은구도 대전에서 내가 자발적으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네가 사형당할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었지만, 언젠가 너로 인해 화를 입을까 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도진이 희민지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희민지 사매는 나 때문에 여마두 막추에게 공격당한 거니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희민지가 죽어선 안 되지. 난 남은 마지막 시간 동안 대은구도 도주께 밀서를 적을 테니 너는 희민지 사매를 구해줘라.”
이도진은 몸을 돌려서 책상에 앉은 뒤 붓을 들고 밀서를 적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두변이 흔들 기둥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천기도 전체가 흔들렸다.
두변이 흔들 기둥을 돌리자 천기도가 흔들렸던 이유는 어떤 신묘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무척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천기도의 깊은 땅속에 거대한 괴수가 살고 있는데, 이 흔들 기둥을 움직이면 괴수에게 먹이를 줄 수도 있고, 그에게 큰 자극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흔들 기둥을 흔들 때마다 괴수가 격렬하게 반응을 보이면서, 천기도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흔들 기둥을 어쩌다 가끔 흔드는 건 괜찮지만, 너무 빈번하게 흔들게 되면 아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거대한 괴수가 지하를 벗어나는 순간 끔찍한 재앙 덩어리가 될 테니까.
조금 전에 두변이 막추를 겁주기 위해서 두 번 흔든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흔들 기둥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천기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변은 일단 천기도가 흔들리는 걸 무시하고 말했다.
“희 부인, 이쪽으로 오시죠.”
희민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존엄을 택했지만,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다.
그녀는 대은구도에서 무공 수준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노력 면에서나 인품 면에서는 대은구도 도주가 높이 사는 인물이었다.
누구든 대은구도 도주가 되고 싶다면, 무공 수준이 얼마나 높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정함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희민지는 이도진을 희생하고, 자신만 살아남게 되는 이 상황이 꼭 자기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생존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희민지는 이도진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사저께서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변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나는 네 어미가 될 자격이 없다. 난 참 비겁한 사람이야.”
“그럼 오늘의 비겁함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대은구도의 도주가 되신다면, 바깥 세속 세계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조금 더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두변의 말에 희민지는 창피해하면서 그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변은 희민지의 등 쪽 옷을 잘라내고 여마두 막추에게 맞은 부위를 살펴보았다.
푸른 손바닥 자국이 등에 깊이 파여있었고, 저승의 기운이 아직도 주위로 퍼지고 있었다.
두변이 푸른 손바닥 자국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린 뒤, 교룡의 피인 황금 기운을 희민지의 등에 불어넣었다.
황금 기운이 희민지의 체내에 유입되자, 마치 따뜻한 햇볕이 눈을 녹이는 것처럼 저승의 사기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교룡의 피로 저승의 사기를 해독하는 건 정신적 환상에서만 해봤던 터라, 실제로도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의 쓸데없는 걱정인 모양이었다.
희민지는 제 몸에 퍼지던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유명신장을 해독하는 방법이 없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고자인 두변이 해독할 줄이야!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이런 천재를 낳았을 줄이야.
두회와 나는 눈뜬장님이었구나!
두변은 희민지의 몸에 끊임없이 내력을 불어넣었고, 그녀의 등에 있던 푸른 자국도 점점 더 옅어졌다.
10분이 지나자, 두변의 내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희민지의 등에 나 있던 유명신장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체내에 남았던 것도 완전히 해독되었다.
“끝났습니다. 희 부인.”
두변의 말에 희민지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지금 제 심정을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두변에 대한 미안함, 후회, 그리고 창피함이 몰려와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두변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희 부인, 저를 낳아주셨던 은혜는 이것으로 갚은 겁니다. 앞으로 우리 서로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처럼 옷깃도 스친 적 없는 사람들처럼 살면 됩니다.”
희민지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희민지의 마음속에 무슨 기회로라도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뜨거운 불씨가 생겼다.
그때 이도진이 말했다.
“희 사매, 밖에서 잠시 기다려줄 수 있어? 두변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도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허약했다.
저승의 기운이 이미 온몸에 퍼진 터라,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일각 남짓했다. 저승의 기운이 이도진의 심장과 뇌까지 퍼지게 되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희민지는 이도진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석실을 나갔다.
조용한 석실 안에는 두변과 이도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두변, 미안하다. 우리 어른들의 세계에 실망했지? 그날 대은구도 대전에서 내가 보인 모습 때문에 서운했던 것 안다. 하지만 우리 북명검파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 마음속에 정의로움이 조금 남아있다고 해도, 뿌리 자체가 냉랭한 사람들이지.”
이도진이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말했다.
두변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은구도 대전에서 이도진이 보인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두변은 이도진의 목숨을 구해줬고, 그녀의 정절을 지켜줬었다. 두변이 아니었다면 이도진은 유린당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이도진이 이어서 말했다.
“막추가 왜 나를 죽이려는지 알고 있지? 전설급 비급 흡성대법 때문이다. 우리 둘이 우연히 이 비급의 행방을 알게 되었는데, 막추가 비급을 독차지하고자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사실 나도 내 탐욕 때문에 대은구도 도주께 제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나도 그 비급을 갖고 싶었거든.”
이도진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흡성대법은 전설급 무공이다. 내가 그걸 손에 넣게 된다면, 몇 개월만 지나면 대종사를 돌파할 수 있었다. 내가 정상급 종사 수준에서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아나? 3년이다. 게다가 향후 5년 동안 대종사급을 돌파할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 흡성대법을 두 달만 수련하면 대종사가 될 수 있고, 10년 이내 북명검파 9대 장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북명검파에서 9대 장로가 곧 천하 지존이니까.”
이도진이 힘없이 웃으면서 자조적인 말투로 읊조렸다.
“바로 그 탐욕스러움 때문에 이제 죽게 됐지만.”
이도진이 복잡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맙다. 내 목숨을 구해줬던 것도, 내 정절을 지켜줬던 것도. 그리고 내게 평생 처음으로 남다른 감정을 선물해준 것도. 그날 밤에 마합산 독 발작이 일어났을 때, 우리 사이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너를 잠시 껴안았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지만, 이제 곧 죽을 테니 고백하는 것이다. 그때의 경험은 내게 좋은 추억이었다.”
두변은 그날 밤의 기억이 아예 없어서 이도진에게 해줄 말도 없었다.
그날 밤 두변은 시스템의 조종에 의해서 아무런 의식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벌써 서른아홉의 나이인데,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척 창피하긴 하지.
두변, 내가 쓴 흡성대법에 관한 밀서를 네가 대은구도 도주께 전달해줬으면 했었다. 도주는 꽤 공정한 편에 속하시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바뀌었다. 흡성대법의 행방이 적힌 이 밀서를 도주께 드리지 말고, 네가 가져라.”
두변이 경악했다.
왜 나한테 주는데?
이도진이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네게 이 밀서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네가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 흡성대법은 북명대법의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니까.
북명대법이야말로 북명검파의 핵심이자 파벌의 근간이지만, 북명검파가 한때 분열하면서 북명대법도 두 개로 찢어지게 되었다. 북명검파에서 북명대법을 잃게 된 지 벌써 천 년이나 지났지. 그래서 지금은 흡성대법이야말로 북명검파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보물이다. 그런데 만약 네게 이 밀서를 전달해달라고 한다면, 북명검파의 거물들이 너를 의심할 것이고, 네가 이 사실을 안다는 것 때문에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이도진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흡성대법의 행방을 알게 되었을 때도 윗선에 보고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 비급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난 이제 죽을 테니, 이 비급의 행방이 내겐 가장 값진 유산이겠지. 지금 당장 내가 계승해줄 사람도 없고, 내 유일한 친인척인 이도전은 나와 원수지간이다. 내 주변엔 어쩌면 속을 터놓을 가까운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이도진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말했다.
“너는 내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이고, 우리 사이에 남녀 간의 각별함도 있었으니,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유산인 흡성대법의 행방을 네게 주마.”
이도진이 밀서를 두변에게 건넸다.
그런데 두변은 이도진이 건넨 밀서를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