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65화 (265/648)

265장. 영설 공주의 혼사

이연정이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두변은 아직 어려서 이렇게 후한 포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대녕 제국의 건국 이래 환관에게 작위를 봉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알고 있는 두변도 황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짐은 이미 결심했다. 두변의 공로를 작위로 포상하겠다.”

황제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조금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두씨 가문에서 버린 아이다. 네가 엄당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네 상실감을 채울 순 없을 테니, 짐이 네게 작위를 주는 것이다.”

황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을 덧붙였다.

“영사도 한때는 엄당이었지만, 나중엔 대종사가 되어 제국의 국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젠 그를 엄당 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두변, 짐은 네가 쓴 시문과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너의 천부적인 재능이 정말로 감탄스럽더구나. 너는 네 아비 이문회와 다르고, 조부 이연정과도 다르다. 그들은 엄당에 입당할 때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너는 어쩔 수 없이 엄당의 일원이 되었다.”

이연정이 황제를 다시 한번 말렸다.

“폐하, 소인은 이미 이문회를 다음 동창의 주인으로 결정했고, 그다음 세대는 이원과 두변이 경쟁하여 그 자리를 얻기로 했습니다.”

황제가 이연정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연정, 자네는 사람을 편협하게 쓰는 경향이 있구나. 난세가 곧 도래할 텐데, 이렇게 큰 재능을 가진 자를 엄당 안에서만 꼭꼭 숨겨두면 쓰나. 큰 인물은 더 큰 물에서 놀게 해야지.”

황제가 두변에게 시선을 돌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짐이 성지를 내리겠노라. 두변을 백색부 남작에 봉하고, 백색부에 남작부를 짓도록 허락하노라.”

두변이 흠칫 놀랐다.

백색부 남작이라면, 황제는 훗날 두변을 계왕과 함께 쌍벽을 이룰 수 있도록 발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황제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지 않나 싶었다.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두변, 너는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다. 네가 쓴 시문은 아름답기도, 호방하기도, 섬세하기도, 굵직한 포부가 깃들어 있기도 해. 짐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지. 짐이 이곳에서 너와 약조를 하나 하지. 너는 마음껏 재능과 포부를 펼쳐라. 남작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네가 끊임없이 공훈을 만들어 낸다면, 짐도 너에게 계속해서 작위를 포상할 것이다. 짐은 사람들이 네가 엄당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두씨 가문보다 훨씬 더 많은 영예를 안겨주겠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짐에게 증명해준다면, 짐은 두씨 가문보다 월등히 높은 권력과 지위를 줄 수 있다.”

권모술수가 있는 황제라면,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윤제는 달랐다.

“문무백관이 짐을 욕하겠다면, 마음껏 하라 그래라. 짐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듣지도 보지도 못 하는 걸로 하면 그만이다. 두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두려우냐?”

두변이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폐하.”

“그럼 지금처럼 앞으로 계속 나아가거라. 백색부에서 관직이 아직 낮긴 하지만, 네가 백색부에 있는 유일한 제국의 대표이자, 짐의 분신이다. 짐의 말을 믿고, 제국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해도 좋다. 짐이 죽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 짐이 책임질 테니 누구든 죽여도 된다. 짐은 제국의 대의를 위해서 충신을 죽이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흥분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지난번에 문무백관이 짐에게 이문회를 죽이라고 협박했지만, 지금 보아라. 광서, 백색부의 좋은 국면은 다 너와 이문회가 만들어 낸 것이다. 짐은 확실히 결정했다. 만약 한 제국이 충신을 죽이라는 협박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 제국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다.”

두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가 끓는 걸 느꼈다.

정말로 사람을 쓸 줄 알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앞세우는 황제라면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절대로 내비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윤제는 그런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 마음을 조종할 줄 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신하의 충심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많은 신하가 그의 믿음을 져버렸고 그의 솔직함을 공격했지만, 그는 또 한 번 두변에게 자신의 모든 믿음을 걸었다.

두변이 감격스러워하면서 큰절을 올렸다.

“신,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신,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연정이 두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변, 폐하의 뜻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느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정이 말했다.

“오늘부터 너는 나 이연정, 네 의부 이문회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폐하의 사람이다. 관직이 작긴 해도 폐하의 직속 신하인 셈이다.”

“소손, 폐하를 위해서 서남에서 폐하의 천지를 열어보겠습니다.”

이연정이 말했다.

“우리의 폐하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한 사람을 인정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시는 분이지. 십몇 년 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그 청년도 아주 영준하고 다재다능한 청년이었지. 스물 몇 살이었는데 제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말이야. 그는 너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영설 공주가 아직 어렸었는데, 조금만 더 컸다면 폐하께선 아마 영설 공주와의 사혼을 고려하셨을 테지. 폐하께서는 그 젊은이에게 스물세 살에 참장이라는 큰 관직을 하사하셨다. 그런데…….”

이연정이 말끝을 흐리자, 두변이 물었다.

“전사한 겁니까?”

이연정이 고개를 저었다.

“건로에 투항하여 만주 여진왕의 사위가 되었다. 여진족의 제일 영웅이 되어서 건로 대군을 이끌고 대녕 제국의 병마를 인정사정없이 무찔렀지.”

두변이 물었다.

“혹시 그 청년이 이영도(李英圖)입니까?”

“지금은 이영도라고 불리지 않고, 완안영도(完顔英圖)라고 불린다는구나. 여진족의 제일 용사로 말이다.”

“천벌 받을 변절자로군요. 대녕 제국의 천하를 천 리나 잃게 한 데다 영설 공주의 좋은 혼인을 놓치게 하다니요.”

이연정이 두변을 빤히 바라보다가 탄식했다.

“아휴, 참으로 아깝구나. 아까워.”

황제가 두변을 제국의 남작에 봉했다는 소식은 대녕 제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수히 많은 문무 관리들이 황궁 앞에 무릎을 꿇고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대녕 제국의 조칙을 운운하며 군공을 세우지 아니하면 작위에 봉해질 수 없다고 소리쳤고, 엄당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어린 환관을 남작으로 봉했다는 건 망조의 징후라고 울부짖었다.

황제는 쏟아지는 상주서를 일절 모른 척했다.

몇몇 대신들은 황제의 침전까지 무릎을 꿇으러 갔지만, 황제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들에게 되물었다.

“짐의 목숨이 남작 작위 하나만도 못하단 말인가?”

대신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신 하나가 간청했다.

“폐하, 두변에게 다른 포상을 하사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작위까지 봉하시는 건 조정의 조칙을 위배하는 것이옵니다.”

“그래.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게나. 두변에게 무슨 포상을 내려야 할까? 막씨 왕족의 보물을 찾아서 얻은 6백만 냥 은자를 전부 짐에게 바쳤는데, 짐이 그에게 무슨 포상을 내려야 해? 그에게 금은을 포상하란 말인가?”

대신이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의 조상에게 포상을 내려도 되지 않습니까. 그의 가족에게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에게 묻기 전에, 두회에게 가서 먼저 물어보게나. 그가 그 포상을 받고 싶은지.”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폐하, 환관에게 작위를 봉한다는 건 조정의 조칙을 어기는 것이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명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신들은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조정의 조칙에 의하면, 내각은 짐의 비서(祕書) 기구이지. 현령조차 짐의 책봉을 거쳐야 하고. 조칙에 따르면 금의위도, 여경사, 현무위도 없애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짐이 그대들과 함께 조칙을 운운해볼까?”

대신들이 흠칫 놀랐다.

황제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흘깃 쳐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신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대신들이 자리를 떠났다.

이건 황제의 의지에 굴복하겠다는 게 아니라, 황제와 더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궁문 밖으로 나오자, 대신 중 한 명이 말했다.

“좋은 일에는 참 방해가 많구려.”

대신이 앞뒤 없이 한 말에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나 말이오. 좋은 일에는 걸림돌이 참 많아. 쳐죽일 엄당 놈이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

대역무도한 말이었다.

황제가 죽지 않은 것 때문에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이문회의 일 때문에 황제와 문무백관은 이미 많이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문무백관과 황제 사이에 뜻을 함께할 여지가 더는 남아있지 않자, 그들은 말을 더 잘 듣는 황제로 바꿔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두변이 신기를 이용하여 황제의 목숨을 살렸으니, 이제 그 두변이 눈엣가시가 되었을 수밖에.

새로운 남작이 된 두변은 경성에서 반나절을 채 있지 못하고 바로 백색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황제는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에 영종오 대종사가 한동안 그의 곁에 남아서 그를 돌보기로 했다.

영설 공주가 직접 나와서 두변을 배웅했다.

“표표 누이 말에 따르면, 공주 전하께서는 벌써 1품 무도 고수를 돌파하셨다고요?”

두변이 물었다.

“맞아. 1년 동안 수련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년까지만 해도 2품이었는데, 어느날 순조롭게 1품 무사를 돌파했지.”

“경축드립니다. 공주 전하. 어쩌면 조만간 계표표 누이의 무공을 뛰어넘어서 제국의 가장 젊은 종사급 고수가 되시겠군요.”

“그러긴 어렵겠지. 예전엔 무도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젠 군사 훈련을 해야 하다 보니, 수련할 시간이 많이 줄더군.”

“아, 그러고 보니 공주 전하의 군대 양성은 어떻게 돼가십니까?”

“이문회 대인이 주신 은자 덕분에 군대 양성 군비가 충분하다. 강남 농촌 지역으로 가서 가난하지만 글공부를 조금 했던 건장한 청년들을 많이 모으고 있는데, 효과는 아주 좋아. 그들은 용감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지. 기본기가 부족하긴 하지만, 매일 훈련하는 걸 봐선 3년이면 정예병이 될 수 있을 테고. 다만, 북쪽 지역의 전투가 내게 3년이라는 시간을 줄지는 잘 모르겠군.”

“긴박한 상황입니까?”

“건로와 북달 간의 전투가 최소 3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완안영도가 참전해서 아마 반년 이내에 전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 동몽골의 와단 가한이 곧 투항할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되면 건주의 여진이 2백만 땅과 수십만 기마병을 얻게 되지.”

“그게 대충 언제쯤일까요?”

“곧일 거다. 아마 금방 그 소식이 전해져 올 것이다.”

“그런데 왜 경성에서는 아무런 긴박함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도리어 여유로운 모습까지 보이고요.”

“내가 예전에 와단 가한의 아들을 죽였는데, 그의 십몇만 기마병이 남하하면서 대녕 제국과 몇 번 전투를 치렀었지. 그런데 문무 관리들은 건로 여진이 그 넓은 땅과 병마를 얻게 되면 그걸 소화하는 데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몇 년간은 우리 대녕 제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두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강도들이 배불렀을 땐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다니, 정말 한심한 생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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