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장. 또 그럴 거냐?
두변은 막야의 안내를 받아 잔혈방 근거지에 도착했다. 이번엔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있는 작은 장원이었다.
대문의 편액에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막왕부(莫王府)!
두변은 혀를 내두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여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하에서 왕 놀이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지상에서도 여왕 놀이를 이어가시겠다? 여긴 조정이 손 닿는 곳이 아니라 다행이지 다른 주부였다면, 이 편액 하나만으로도 역모를 꾀하는 거라고 벌을 받았을 텐데.
막왕부는 작은 곳이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환관도 열댓 명 있었고, 작은 장원이긴 했지만, 건물이 겹겹이 여러 개로 나뉘어서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칭 백색부 여왕 막한은 가장 안쪽의 대전에 있었다.
막야는 두변을 데리고 막한의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두변은 대전 안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 머저리가 5만 냥 금자를 여기다 다 썼나!
그도 그럴 것이 대전 안 곳곳이 금빛 찬란했고, 안에 놓인 집기와 가구가 전부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변이 제일 어이없었던 건, 대전의 바닥도 금으로 입혀 놓은 것이다.
두변의 추측은 정확했다.
막한은 5만 냥 황금을 전부 막왕부를 짓는 데 썼고, 꼬박 일박이일에 걸쳐서 황금 바닥까지 완성했다.
바닥은 7시간 전에 시공이 끝난 터라, 아직 미세하게 열기가 남아있었다.
대녕 제국의 황제인 천윤제가 쓰는 금란전의 바닥도 이렇지 않건만, 자칭 여왕이라는 막한이 진짜 황금을 바닥에 쓰니 두변이 어이가 없을 만하지 않은가.
이 머저리가 가산을 탕진할 작정이군. 5만 냥 황금만 나눠줘서 천만다행이었네. 더 줬다가는 이 장원 전체를 금칠해놨겠어. 여씨를 대적할 군대를 만들라고 돈을 줬더니 이런 데다 5만 냥을 태워?
“변절자 막야, 엄당 주구놈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냐.”
막한의 첫마디였다.
두변은 저 얄미운 막한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뿐이었다.
막야가 침착하게 말했다.
“삼소저, 두 대인께서 어제 대승을 거두었고, 염효의 대군이 전멸했습니다.”
“그게 뭐? 내 알 바냐?”
막한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두변으로서는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제 심기를 제대로 긁는 여인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여완완은 사악하긴 하지만, 얄미운 편은 아니었다. 막한은 몸매가 계표표만큼 화끈하진 않았지만, 전형적인 동방 미인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체형에 청아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계표표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두변이 말했다.
“막야, 잠시 막 소저와 둘이 있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막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대전 안의 모든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아예 100미터 밖까지 물러나게 했다.
이제 대전 안에 두변과 막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막씨 왕족의 보물로 염효를 이긴 거 아냐? 그 비밀 무기는 전부 막씨 선조께서 남겨주신 거지?”
막한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뭐, 그런 셈이죠.”
두변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지금 얼마나 남았지? 다 내게 돌려주어라.”
두변은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어졌다.
물건을 받으러 온 건데, 다짜고짜 나한테 물건을 달라고 해?
“거래 하나 합시다. 소저에게 향마혈질이 한 마리 있다면서요?”
막한이 움찔했다.
그녀는 두변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왜?”
“그 향마혈질을 5만 냥 황금으로 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막한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냉소를 터트렸다.
“누가 마연향과 삼룡탕 맹독에 중독되었나 보지? 십수 년 전 내 아버지처럼? 향마혈질로 그 사람을 살리려고 날 찾아왔나 본데, 난 죽어도 향마혈질을 네놈에게 줄 수 없다. 네가 아끼는 사람일수록 더욱 죽게 만들어야지. 난 네놈이 괴로워할 만한 일이라면, 뭐든 할 거니까. 하하하.”
아, XX, 저걸 죽일까?
아니야. 내가 참아야지.
두변은 막한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말했다.
“제가 염효의 대군을 전멸시킬 때 썼던 죽음의 꽃을 봤겠죠? 아직 그게 100개 정도 남았는데, 그거랑 10만 냥 황금까지 얹어서 향마혈질과 맞바꿉시다.”
“쓸데없는 소리! 원래 막씨 가문의 것이었던 걸 네놈이 빼앗아 간 것이다. 내 물건을 가지고 내 물건과 맞바꾸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우리 왕족의 유산을 네놈이 빼앗아간 건 그렇다 쳐도, 향마혈질을 얻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 네놈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으니까. 왜? 억울해? 그러게 누가 나한테 잘못을 저지르래?”
두 사람은 팽팽한 대치 상황에 빠졌다.
저 여인은 머리에 뭐가 든지 모를 머저리라서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듯했다.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막한은 무공 실력이 막강하다. 그래서 너를 얕보고 아무런 방비를 하고 있지 않은 거다. 지금 당장 단혼영 에너지 6할을 써서 막한을 공격해라. 막한이 쓰러지면, 그녀를 네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해서 미친 듯이 엉덩이를 패. 그리고 요선(妖仙), 너 또 그럴 거냐, 또 그럴 거냐고, 라고 말해라.’
두변이 화들짝 놀랐다.
‘막한이 설마 마조히스트입니까? 그렇게 엉덩이를 패면 갑자기 말을 잘 듣게? 그런 건 황당한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전개잖아요!’
기이한 불빛이 진지하게 말했다.
‘날 믿어라.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 중요한 건, 때리면서 꼭 이 말을 같이 외쳐야 한다. 요선, 또 그럴 거냐? 또 그럴 거냐고, 라고.’
막한이 두변을 흘겨보면서 자리를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엄당 주구놈. 썩 꺼져라. 네놈이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내 적대감과 멸시뿐이다.”
막한이 말했다.
기이한 불빛이 갑자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결국 두변은 막한의 뒷모습을 향해 단혼영 에너지 6할 정도를 쏘았다. 이 정도라면 단혼영 한 마리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다.
두변이 공격하려 함을 눈치챈 막한은 화가 나기도, 가소롭기도 했다.
‘두변 이 새끼가 감히 나를 급습하려고? 네까짓 게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눈을 감고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너를 죽일 수 있다.’
막한은 가볍게 손짓 한 번으로 두변의 내력 공격을 쳐냈다. 그런데 이때, 알 수 없는 기운이 막한의 정신을 공격했다. 막한의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얘지면서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서둘러야 해. 네 정신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단혼영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 거다. 막한은 정신력이 높아서 금방 정신을 되찾을 수 있어. 지금 당장 내가 말한 대로 막한을 네 무릎 위에 올려서 때려. 어른이 잘못한 아이를 혼내듯이 때려야 해. 그리고 내가 해준 말을 꼭 그대로 외쳐야 한다.’
두변은 이 상황이 너무도 황당했지만, 시스템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쓰러진 막한에게 달려갔다.
그는 막한을 자기 무릎 위에 엎드려놓고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요선, 또 그럴 거냐? 또 그럴 거냐고!”
두변은 보여주기식으로 때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를 악물고 엉덩이를 때렸다. 막한을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막한이라는 여인에게 질려버린 그는, 이번 기회를 빌려서 지금까지 그녀에게 느꼈던 괘씸함과 얄미움을 한 번에 터트렸다.
덕분에 두변은 막한을 혼내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스템이 말한 대로 막한을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혼내듯이 사정없이 때렸다.
그런데 막한의 정신력이 어찌나 강한지, 불과 십여 초 만에 정신이 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지각과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변이 단혼영 한 마리에서 나오는 단혼영 에너지의 6할을 썼는데도 막한은 십여 초 만에 깨어난 것이다.
슬슬 정신이 든 막한은 엉덩이가 몹시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선, 또 그럴 거냐? 어? 또 그럴 거냐고.”
정신 공격을 당한 직후라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있지만,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왠지 모르게 두변의 목소리가 점점 변하더니 더 굵은 목소리로 바뀌면서, 이내 두변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었다.
바뀐 목소리에는 딸을 향한 아비의 엄격함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감타의 목소리일 것이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선, 또 그럴 것이냐? 또 그럴 거야?”
막한이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또 안 그럴게요. 아버지. 또 안 그럴게요.”
두변은 막한이 어렸을 때 말을 안 들으면, 그녀의 아버지인 감타가 이런 식으로 그녀를 혼냈다는 걸 알아챘다.
요선은 감타가 막한에게 지어준 별명인 모양이었다. 아비에게는 막한이 꾀가 많은 요녀 같기도, 하늘에서 내려준 선녀 같기도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막한이 가장 오래 간직한 기억이면서, 어린 시절 가장 행복하고 따뜻했던 기억이리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모에게 매를 맞거나 혼났던 기억이 바로 부모의 애정을 느꼈던 가장 따스한 기억이지 않을까.
막한이라는 여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두변이 막한에게 막영 토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막한은 그저 담담하게 알겠다고만 했었다.
그때 막한이 피도 눈물도 없는 머저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막한의 애정은 어머니 막영이 아닌 아버지 감타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영 토사를 미워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막영에 대한 증오심만 남았을 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막영 토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세요? 제가 얼마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데요. 아버지! 저 무서워요!”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막한이 몽롱한 상태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이 머저리가 무서워할 줄도 알아? 평소에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두변은 속으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길 때린 사람이 아버지가 아닌 두변이란 걸 알게 된다면, 자기만의 비밀을 들켰다는 것과 엉덩이를 맞았다는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해서 두변을 죽일 것만 같았다.
두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정신이 몽롱할 때 향마혈질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
마음의 소리를 들은 기이한 불빛이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두변이 인생의 주도권을 잡은 건 맞지만, 굳이 사사건건 시스템과 대립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알겠어요.’
두변이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막한이 이제 정신을 거의 차려서 곧 있으면 정신이 맑아질 것이다. 그땐 막한이 너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때, 막한이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것이다.
막한이 뜨거운 것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두변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검을 뽑아서 두변의 목에 겨눴다.
막한은 낯이 뜨거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 이 새끼가 감히 나를 제 무릎에 엎어놓고 때렸어? 심지어 내 엉덩이를?’
놀라고 창피했던 막한은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두변,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막한이 두변의 머리를 댕강 자르려던 찰나, 두변이 재빨리 잠깐, 하고 외치더니 속사포로 말했다.
“막한, 당신 아버지의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를 모셔다가 집에서 장례를 치러드리고 싶진 않고요? 이대로 아버지의 유골이 아무도 모르는 황량한 곳에서 온갖 풍파를 맞으며 없어지길 바라지는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