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39화 (239/648)

239장. 양심도 없냐?

광서에서 작위가 가장 높은 번왕인 계왕, 광서 순무 장양명, 광서 포정사 두강이 기마 부대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광서성 3대 거물이 나타난 것이다.

계왕이 말을 멈추고 성지를 꺼내 들었다.

“황제가 명하노라. 계왕은 백색부를 시찰하고, 광서 순무와 광서 포정사는 계왕을 따라 백색부로 향하여 백색 지부, 백색부 참장부, 백색 동창의 시찰을 돕도록 하라.”

계왕은 말에서 내려온 뒤, 천호소를 향해 달려오던 참장부 기마병들을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손짓했다.

“참장부에서 본왕을 맞이하려고 이렇게 신경 써주다니. 나 참. 됐네, 그만하면 됐어.”

계왕, 장양명, 두강 등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동창 천호소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기마병 부대를 포함한 염효의 몇천 대군이 천호소 앞에 도착했다.

대군을 이끌고 그대로 천호소 안으로 쳐들어가서 두변 등을 몰살할 수 없게 되자, 염효는 명치에 솜이라도 막힌 듯 화가 치밀어올라서 얼굴색이 잿빛이 되었다.

계왕, 광서 순무, 광서 포정사 이 세 거물이 이곳에 있는 한, 동창 천호소를 공격한다는 건 조정을 향한 반역이었다. 하지만 여씨가 아직 반역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염효는 이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백색부 참장이 변검술이라도 부리듯 호탕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와 대인들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말장이 급히 병마를 이끌고 왔습니다. 왕야와 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애썼네.”

계왕이 손짓했다.

염효가 물었다.

“왕야께서 참장부에도 행차해주시는지요?”

“당연히 가야지. 잠시 뒤에 염 장군의 참장부로 가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말장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백색부 참장이 예를 표한 뒤, 대군을 이끌고 천호소를 떠났다.

계왕은 광서에 있는 황실의 대표로서, 주기적으로 백색부를 둘러보면서 민심을 다독일 의무가 있었다.

백색부는 반 독립적인 왕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기에 황실을 대표하는 계왕의 역할이 유독 중요하다 할 만했다.

계왕은 황제의 성지를 이미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두변과 계획했던 것이 있기에 지금에서야 성지를 꺼내든 것이다.

두변이 오주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오늘 일을 이미 계획했었다.

두변이 백색부에서 일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계왕은 즉시 백색부로 와서 황제의 성지를 내밀며 두변을 보호해주기로 말이다.

게다가 계왕이 지금에서야 백색부에 도착한 게 아니라, 그간 종적을 숨기면서 두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변의 신호를 받는 즉시 말에 박차를 가하여 백색부에 도착했고, 비밀 근거지에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계왕부 깃발 치켜들고 천호소로 달려올 수 있었다.

두변이 계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왕야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계왕이 말했다.

“우리가 자네에게 고맙지.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청년이 이 호랑이 굴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백색부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군. 참장 염효가 이렇게나 건방져졌다니. 우리를 앞에 두고도 천호소를 공격할지 잠시 고민하더군.”

계왕과 광서 순무, 광서 포정사가 이곳에 있으니, 두변은 잠시나마 안전한 셈이었다.

이어서 계왕이 해야 할 것은 조정을 대표하여 여씨와 협상하는 것이었다.

말이야 협상이지, 사실상은 여씨에게 두변을 동창, 조정의 대표로서 백색부에 살아남게 해달라고, 그를 더는 죽이려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리라.

“이어서 해야 할 건 여씨와의 협상이다.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동창 천호소에서 묵을 수 없고 백색 지부로 가야 하니, 자네는 이곳에서 우리의 소식을 기다리게.”

계왕이 말한 뒤, 광서 순무 장양명, 광서 포정사 두강을 데리고 백색부 관아로 떠났다.

광서 동창 진무사 이옥당은 계왕을 따라가지 않고 잠시 천호소에 머물렀다.

이옥당이 두변의 어깨를 힘껏 토닥이면서 말했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여기 온 지 며칠 만에 변절자 장소를 죽이다니. 우리 동창을 위해서 큰일을 했어. 이러니 네 아비가 너를 목숨처럼 아끼지. 정말 대단하구나.”

이옥당이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두변은 본 진무사의 명을 들으라. 너는 오늘부터 시백호가 아닌 백호다.”

두변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진무사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두변은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시백호에서 백호로 승진했다. 종6품에서 정6품이 된 것이다.

이옥당이 말했다.

“그리고 백색부 동창에는 따로 천호를 파견 보낼 일이 없으니, 네가 이곳에서 조정을 대표해서 입지를 제대로 다지기만 한다면, 1년 반 정도 지난 뒤에 너를 천호로 승진시켜주마.”

두변은 깜짝 놀랐다. 1년 반이 지나면 두변의 나이 고작 열아홉인데, 이곳에서 입지만 제대로 다지면 열아홉에 벌써 정5품인 천호가 되는 것이다.

이옥당이 이어서 말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걸 잘 해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어른들의 일이다. 우린 이곳의 독사와 얍삽한 여우들과 협상을 해서, 네가 힘들게 이뤄낸 걸 꼭 지켜주마.”

이옥당이 다시 한번 두변의 어깨를 다독인 뒤, 계왕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두변은 백색부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했다.

기음음이 턱을 괸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변이 해주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손오공이 무기를 빌리러 동해 용왕의 용궁으로 갔는데, 거기에 온갖 진귀한 보물이…….”

기음음은 정말로 여덟 살짜리 어린 소녀가 된 듯했다. 이 아이는 이제 천하제일의 마녀가 아니라, 마냥 천진난만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기음음은 두변에게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맛있는 요리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두변도 기음음이 무시무시한 천마교 교주였다는 걸 잊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두변이 손오공의 여의봉까지 얘기했을 때, 이사가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소주인, 백색 지부에서 연회를 여는데, 소주인을 초대한답니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다 광서의 거물들일 텐데, 나를 왜 초대해?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번 연회는 내 운명을 결정할 협상이 이뤄지는 자리겠군.

잠시 고민하던 두변은 기음음에게 손오공의 여의봉 이야기를 마저 해줬다.

두변이 이야기를 마저 끝내자, 기음음의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두변은 곧 백색부 관아에 도착했다.

백색부 지부, 백색부 참장 염효, 천도회주 이도전, 홍하회주 여여지, 광서 순무 장양명, 광서 포정사 두강, 광서 동창 진무사 이옥당은 이미 연회석에 앉아 있었다.

두변은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아 간 동생 두염과 그의 옆에 앉은 교만한 방청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두변이 이 연회에 온 것에 조금 놀랐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방청의가 두변에게 보란 듯이 입술을 움직이며 작게 읊조렸다.

“엄당 주구놈.”

방청의는 엄당의 백호 따위가 이런 거물급 연회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두변이 진무사 이옥당 옆에 앉자, 이옥당이 두변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협상이 순조롭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뒤이어 남녀 한 쌍이 연회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두 사람의 미모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변도 그 두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

소목지가 계청주를 대표해서 이 연회에 참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계청주라는 자야 웬만해서 이런 연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변이 놀란 건, 소목지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잔혈방주 막한이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돼서 지하 세계에서 여왕이라는 역할에 과몰입만 하던 막한이 갑자기 지상에 나타났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평소 막씨가 지상에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는 여씨가 절대로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막한이 소목지와 함께 연회에 나타난 것일까?

심지어 청아하고 차가운 표정의 그녀는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변을 보자, 소목지가 그에게 다가가서 먼저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두 형.”

소목지의 미소는 온화하고 점잖고 여유로웠으며, 햇빛이 꼭 이자만 쫓아다니는 것처럼 그의 주변은 환하기만 했다.

두변도 가볍게 답례했다.

막한은 두변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사실 막한은 일부러 두변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두변이라는 사람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이때, 코끝을 간지럽히는 짙은 여인의 향이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매력을 가진 여완완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여완완은 이전의 요염함 대신, 냉담한 태도로 연회석에 착석했다.

그녀가 나타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잠시 뒤, 이번 연회의 가장 큰 거물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왕과 여씨 토사 여여해가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두변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여여해가 건방지게 계왕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계왕보다 3급은 낮은 후작이고 토사인 주제에 계왕보다 앞서 걷는다? 이는 황실의 체면을 일부러 짓밟는 처사였다.

여여해보다 한 걸음 뒤처진 계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두변, 광서 순무 장양명, 광서 동창 진무사 이옥당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두변은 여여해의 실물을 처음 보는 순간이지만, 여여해는 그가 상상했던 대로 야망이 가득하고 의심이 많아 보였다. 칼로 벤 듯한 각진 얼굴에 전형적인 매부리코, 그리고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에는 탐욕과 의지가 가득했다.

여여해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탓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더 거칠어 보이면서 그 속내를 헤아릴 수 없게 했다.

여여해가 연회석 안쪽으로 들어가자, 백색 지부, 백색부 참장, 천도회주 이도전, 홍하회주 여여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예를 올렸다.

“홍하후(紅河侯)를 뵙습니다.”

두변과 장양명 등은 속으로 격노했다.

계왕이 있는 자리에서, 계왕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여여해에게만 예를 올린다?

이건 국면이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이었다.

여여해와 계왕이 연회석 상석에 나란히 앉은 뒤, 여여해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연회를 시작하지.”

여여해의 손짓은 마치 칼을 휘두른 것처럼 대청 안의 공기를 싹 바꾸었다.

두변은 여여해가 겉으로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무공이 더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여여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영종오보다 한 수 아래인 종사급 무도 강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변이 느끼기에는 여여해는 이미 대종사급 무공 고수라는 생각이 은근히 들었다.

‘뭔가 이상한데?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공 수준이 어떻게 향상된 거지? 예전보다 무공이 더 퇴보해야 정상인데, 어째서 더 강해진 거야?’

두변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여여해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두변은 여여해의 눈동자 색이 좀 이상하고 왠지 눈동자가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변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여완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두변에게 말했다.

“예전에 나와의 결투에서 나를 죽였던 적이 있지. 그런데 그 덕분에 내가 부활해서 성화교의 성화 마녀가 되었잖아? 그러니까 너와 나 사이엔 원한도 있고, 은혜도 있는 셈이네.”

두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여완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죽었다 살아난 거라고 끝까지 잡아떼려는 모양인가? 넌 양심도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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