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솔직함
시간은 30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하는 말은 밑에서 듣지 못해요. 당신은 운중사가 아니잖아요. 예전에 그와 싸운 적이 있어서 알아요. 나이도 어릴 텐데,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도대체 누구죠?”
두변의 머릿속에서 꿈속 시스템의 강력한 경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숙주! 절대로 네 신분을 밝혀선 안 된다. 절대로!
기이한 불빛이 경고했다.
두변이 명상 상태가 아닐 때 기이한 불빛의 목소리가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변도 명상 상태에 돌입하지 않고 바로 기이한 불빛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미래에 나와 계표표의 관계가 어떻게 될 예정인가요?’
-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된다.
‘그럼 그게 더 나쁘죠. 가장 각별한 사람한테 거짓말을 왜 해요.’
- 그게 뭐 어때서. 최종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할 땐 주위 누구든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네가 만나는 여인들은 다 도구에 불과해.
‘누구든이라뇨? 제 의부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건가요?’
기이한 불빛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중요한 때에는 누구든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네 사명은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중요하다.
계표표가 두변을 진심 어린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면서 물었다.
“난 진실만을 믿고, 당신의 말을 믿을 거예요.”
꿈속 시스템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 절대로! 절대로 네 진짜 신분을 밝혀선 안 된다.
두변은 이를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백색부 동창 시백호 두변입니다.”
이때, 머릿속의 꿈속 시스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 숙주 두변이 중대한 사안을 위반했다. 결괏값 측정 불가. 결괏값 측정 불가!
이때,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두변에게 자신의 평생을 약속했던 혈관음이 나타났다.
처음엔 혈관음도 무척 놀란 눈빛으로 운중사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1초 만에 그자가 바로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두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이 이내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픈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혈관음을 마주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표정 관리를 잘한 덕에 계표표는 혈관음을 발견한 두변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계표표가 놀란 눈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환관 두변이라고?”
“맞습니다.”
“그런데 왜 청혼하러 온 거지? 날 사랑하나?”
계표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꿈속 시스템이 두변의 머릿속에서 말했다.
- 절대로 진짜 목적을 말하지 말고, 평소에 줄곧 존경해오고 흠모해왔다고 말해라.
혈관음도 두변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두변이 계표표를 사랑하고 흠모해왔다고 대답한다면, 혈관음은 분명히 그에게 실망할 뿐 아니라 너무도 가슴이 아플 것이다.
두변은 다른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건 그럴 수 있다지만, 자신이 다른 여인을 감정적으로 사랑한다고, 심지어 그 여인 앞에서 다른 여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너무도 두려웠다.
두변을 빤히 바라보는 계표표의 눈동자는 무척 맑았고,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두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이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변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온 사람이고, 거짓말할 때는 이보다 더 당당할 수 없었다.
계표표는 두변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여인의 직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법.
아무리 진실 같은 거짓말이어도, 거짓말은 결국 거짓말이다. 사내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여인들은 사실 거짓인 걸 알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게 아닐까.
- 계표표는 자기가 한 말을 기필코 지켜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네 진짜 목적을 말해선 안 돼. 지금 거짓말을 해서 나중에 계표표가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너에게 있어서 계표표는 그저 청룡회를 이용하는 수단이고, ‘육맥신검’ 비급을 얻기 위한 도구이다.
기이한 불빛의 말에 두변이 대답했다.
‘시스템은 생명이 아니니까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시스템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죠.’
두변이 계표표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대녕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창이 백색부에서 입지를 다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고요.”
꿈속 시스템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두변의 말을 듣는 순간, 혈관음의 얼굴에 다시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두변,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역시 내가 사랑하는 남자다워. 내가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남자다워.’
계표표도 두변의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선 두변의 솔직함은 높이 살 만했다.
“그럼 날 구하게 된 건 어떻게 된 일이지?”
계표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우연이자, 필연이라고 할 수 있죠.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인지라, 똑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똑같이 목숨을 걸고 계 소저를 구했을 겁니다.”
계표표가 두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당신이 내게 솔직하게 말해준 대가로 무척 큰 뒷감당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주 큰, 심각한 뒷감당을 해야겠죠.”
두변 스스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뒷감당이 얼마나 심각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꿈속 시스템의 명령을 거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 순간이 찾아올 줄 몰랐다.
계표표가 혈관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긴 내 친구 혈교방의 방주 혈관음이다. 혈관음이 왜 여기 있나 궁금하겠지?”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혈관음이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
계표표가 설명했다.
“안남 왕국의 결전이 시작된 터라, 매일 무수히 많은 대녕 제국의 병사가 다치거나 죽지. 전장에서 쓸 약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까, 혈관음이 비밀리에 백색부로 잠입해서 내게 약을 구해주길 부탁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서남 토사 연맹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게 바로 약인데, 여씨 토사가 대녕 제국과의 거래를 완전히 봉쇄했거든. 하지만 청룡회는 대규모로 약을 구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대녕 제국을 죽어도 돕지 말라고 하셔서 혈관음이 이렇게 몰래 와서 약을 가져가는 것이지.”
혈관음이 말했다.
“표표 언니가 몰래 우리를 많이 도와줬어. 의부의 대군에 쓰이는 약 중 대부분이 계 표표 언니가 구해준 약이고. 언니 덕분에 많은 병사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 표표 언니는 우리만큼 대녕 제국을 사랑해.”
계표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
계표표가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녕 제국과 여씨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길 원해. 그래야만 지금 같은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난 아버지의 입장을 동의하지 않아. 이렇게 위태로운 중립을 지속했다간, 언젠가 완전히 파멸하게 될 테니까. 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에 과거 시험으로 인해 고통받으셨던 건 맞지만, 그 일로 대녕 제국을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대녕 제국의 신민을 외면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봐. 너무 극단적이잖아.”
이야기를 들은 두변은 계표표가 너무도 존경스러웠다.
계표표가 혈관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관음, 여기서 잠깐 기다려. 밑에 금방 다녀올게.”
“알겠어.”
혈관음이 대답했다.
계표표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두변, 당신이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나도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게.”
계표표가 두변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혈관음은 두변의 뒷모습을 향해 있는 힘껏 입맞춤을 날렸다.
계표표가 두변의 손을 잡고 계청주와 소목지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계청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버지, 저는 이 사람과 몸을 섞었으니, 이 사람과 혼례를 올려야겠습니다.”
계표표의 단호한 말에 계청주의 눈동자가 충혈되더니 순식간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최고의 사윗감은 소목지일 뿐, 운중사는 인간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딸이 인간쓰레기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정말 속이 썩어 문드러져만 갔다.
소목지는 몸을 섞었다는 표현에 흠칫 놀랐다.
계청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표표, 너와 소목지는 어렸을 적 정혼을 하지 않았더냐.”
“아버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목지 동생을 무려 10년 넘게 기다렸잖아요. 그 정도면 의리를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원래 이번 생엔 혼례를 안 올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사람과 몸을 섞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 사람을 덮쳤으니까, 꼭 제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요. 심지어 이 사람과 혼례를 올리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지켜야 해요.”
“이젠 내 말도 들리지 않는 게냐? 네가 저놈과 몸을 섞었던 건, 순전히 독 때문이었다. 네가 정말 원해서 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 목지야, 너도 그 점을 개의치 않지?”
계청주가 소목지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물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누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그대로입니다.”
계표표가 계청주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고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뱉은 말은 꼭 지켜내는 사람이고, 이건 감정과 무관한 일이에요. 제가 맹세했으니까요.”
계청주는 피가 목구멍에서 울컥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그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손을 번쩍 쳐들었다. 저놈의 머리를 갈겨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속이 풀릴 듯했다.
그때, 계표표가 두변의 앞을 막아섰다.
계청주가 속상하다 못해 울고 싶은 심정으로 계표표를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내 딸아, 정녕 이 아비가 화병 나서 죽는 꼴을 봐야겠느냐. 여태 한 번도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이리된 것이냐.”
계표표가 대답했다.
“아버지, 사실 저는 아버지께서 취하시는 몇 가지 입장에 완벽히 동의하지 못해요. 아버지께서 대녕 제국과 여씨 토사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시는 것도요. 지금이야 초연하시겠지만, 훗날 대녕 제국과 여씨 토사가 정면충돌하게 될 때, 우리 청룡회는 그사이에 껴서 파멸할 겁니다. 두 거대한 세력 앞에서 중립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아버지께 말씀드리네요.”
계청주가 격노하면서 계표표를 꾸짖었다.
“무엄하다. 지금 이 아비의 신념을 질책하는 것이냐!”
계표표가 말없이 계청주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욱 강력한 법이다.
부아가 더욱 치밀어오른 계청주가 소리쳤다.
“그건 차치하고 나중에 얘기하자!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운중사 저놈에게 너를 보낼 순 없다. 아비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 너를 말리는 것이야. 저놈은 무림의 인간쓰레기고, 인간말종이고, 그 이름을 입에 담기도 더러운 놈이다. 네가 저런 놈에게 시집가면 얼마나 불행해질지 아느냐! 아비는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네가 분명히 후회할 날이 온단 말이다!”
계표표가 소목지에게 말했다.
“사제, 잠시 나가 있어 줄래? 아버지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소목지가 약식으로 예를 표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곧장 문을 나섰고, 고탑 밖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청 안에 두변, 계청주, 계표표 세 사람만 남았다.
계표표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날 믿어?”
방 안의 분위기는 이미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두변도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계표표가 계청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사실 이 사람은 운중사가 아니라, 동창 시백호 두변이에요.”
계청주는 순식간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두변 머릿속의 꿈속 시스템도 폭발 직전이었다. 이건 시스템의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인간말종 운중사가 청혼하는 건 그렇다 쳐도, 환관 주제에 자기 딸에게 청혼하다니, 계청주에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