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장. 넌 할 수 있어
영종오 대종사가 거울을 꺼내서 두변에게 건넸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두변은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딴 사람이네. 내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몇 살 더 많아진 운중사만 남았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얄밉게 생겼어? 누가 봐도 나쁜 놈 같잖아!’
운중사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매력과 색기가 흘러서, 누가 봐도 여인들을 강탈하고 다닐 것만 같은 간악한 자였다.
거울을 통해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두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계표표가 나한테 계청주에게 직접 혼담을 넣으라고 하긴 했지만, 운중사는 무림에서 소문난 강간범이잖아? 운중사보다 평판이 나쁜 놈도 몇 없을 텐데, 계청주가 자기 귀한 딸을 이런 인간말종 놈에게 시집보내려고 할까? 내가 거기 가서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는데.
하지만 두변의 신분은 더 안 되지. 환관 주제에 청혼이라니. 그랬다간 온몸의 뼈마디가 부러질 텐데.
하긴 두변이나 운중사나 다 비슷한 처지이긴 한데, 그래도 운중사가 조금 더 낫겠다. 어휴. 난 왜 이 세계에서 찌질한 놈 아니면 죽일 놈으로 살아야 하는 거냐?
두변은 계청주 대종사 앞에 가서 혼담 넣을 생각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대종사, 앞으로 전 운중사의 이름으로 지내게 될 텐데, 제 원래 신분은 절대로 들켜서 안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대종사께서 저를 멀리해주셔야 합니다. 운중사와 두변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어야 하니까요.”
운중사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네 안전은 어떡하느냐?”
운중사는 무림에서 소문난 악질이었고, 길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그를 죽이려는 사람만 수천 명이었다. 이대로 길거리를 거닌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두변이 말했다.
“대부분 시간에는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합니다. 다행히도 백색부엔 그런 사람들이 많더군요.”
하긴 백색부에서 가장 부족하지 않는 것이 남몰래 숨어서 못된 짓을 하는 수상한 놈들이리라.
백색부에는 신분이 불명확하고 수상한 사람들이 워낙 많은지라, 두립을 깊게 눌러 쓰거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럼 이걸 입거라.”
영종오가 두변에게 검은 두봉(斗篷: 소매 없는 외투. 망토) 하나를 건넸다.
이 두봉에는 모자인 두모가 달려 있는데, 두모까지 깊게 쓰고 나면 눈만 보이는 수준이었다.
두변이 두봉을 두르고 얼굴을 가리자, 남에게 보이는 건 그의 두 눈밖에 없었다.
두변은 왠지 자기가 조금은 안전해진 기분이었다.
숲길을 지난 후 두변이 영종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정말로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영종오가 물었다.
“두변이라는 신분이 아니니까 오히려 더 안전할 겁니다. 이제 저도 웬만한 상황에선 저 자신을 지킬 줄 알고요.”
영종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이 물었다.
“동창 천호소의 상황은 어떱니까?”
“여전히 좋지 않다. 아무도 우리에게 먹을 거나 입을 걸 팔지 않아. 우리가 가져온 건량으로 어떻게든 사나흘은 버틸 텐데, 그때까지도 아무런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거길 지키는 다른 사람들처럼 거지가 되거나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지.”
영종오 대종사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빌어먹을 여씨 놈들.’
두변이 이를 악물었다.
영종오가 말을 이었다.
“두변, 네가 먼저 백색부로 출발하거라. 나는 네 한참 뒤에서 따라갈 테니.”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종오와 작별인사를 한 뒤, 야생마왕이 아닌 평범한 준마를 타고 길을 떠났다.
새로운 신분으로 변장한 후부터는 더 이상 그의 뒤를 밟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를 공격하거나 괴롭히려는 사람은 없었다.
두변 같은 차림의 사람이 백색부에 워낙 많았는데, 대부분은 각 세력의 정찰사, 혹은 사자였다.
말을 타고 네 시간 넘게 달린 뒤에야 백색부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두변은 백색부 천호소를 한 번 들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곧장 청룡회로 향했다.
청룡회가 백색부와 제국 서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무도 파벌 중 하나인 만큼, 청룡회 기지는 백색부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었고, 거의 백색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청룡회 기지 앞에 도착한 두변은 거대한 건물에 압도되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룡회는 2천 묘가 넘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담장은 흡사 성벽처럼 높고 단단했다.
대문 앞에는 사자상이 아닌 청룡상이 두 개 놓여 있고, 성벽 같은 담장 위에는 완전무장한 무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지키며 주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문지기 무사들은 하나같이 건장하고 매서워 보이는데, 그 자세가 마치 담 위에 박힌 못처럼 꼿꼿했다.
심지어 담장 밖으로는 완전무장한 순찰 무사들이 길을 따라 걸으며 쉬지 않고 주위를 순찰했다.
‘여, 여기가 무도 파벌의 거점이라고? 이거 완전히 대형 군사 기지잖아!’
청룡회 직속 제자가 오륙천 명이니, 그들을 모으기만 해도 정예 부대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계표표가 초특급 무도 명가에서 자란 규수였구나. 이 정도 집안 딸이라면 무도에 미쳐서 살 만도 하지.
하긴, 이 정도면 여씨 토사가 계청주와 청룡회를 견제할 만하네. 계청주가 조정에서 황제가 내린 성지를 냅다 버린 이유가 있었어!
두변은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청룡회 건물 앞을 지나가는 것도 무서워하리라. 저리 많은 무사들이 건물 안팎을 지키고 있는데, 누가 주눅 들지 않을까.
이게 바로 제국 서남부의 명문 무도 파벌이구나. 무도로 궐기했다는 말을 이때 쓰는 것이로군.
무도 파벌이 조정이나 관부 체제에 속하진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특히 조정의 손이 닿지 않는 백색부에서는 이들의 말이 곧 법이었고 관아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백색부 동창 천호소는 청룡회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존재일 뿐.
청룡회의 지지만 얻게 된다면, 두변이 백색부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마음대로 세력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계표표는 계청주 대종사의 유일한 자식인 만큼, 계표표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청룡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값진 혼수가 또 있을까.
두변은 두 눈을 감고 자기 최면을 걸 듯이 속으로 말했다.
‘임마, 넌 할 수 있어. 네가 계표표를 완전히 가졌잖아. 아, 아니지. 계표표가 너를 완전히 가졌잖아. 이제 남은 건 두 사람이 합심해서 계청주 대종사의 허락을 받아내는 거야. 무서울 거 없어. 계 누님이 말한 것처럼, 계청주는 사위에 대한 요구사항이 그리 많지 않을 거잖아. 딸 이기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딨어?
제발, 계청주가 딸바보이길!’
두변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대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사형, 번거롭겠지만 계청주 대종사께 말씀 하나만 전해줄 수 있습니까? 운(雲)씨가 장인어른을 뵈러 왔다고 말입니다. 제가 정식으로 계 소저와의 혼담을 넣기 위해 왔습니다.”
두변은 말을 하면서도 차마 무사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 계 대소저는 청룡회 회주의 유일한 후계자인데, 감히 대소저께 혼담을 넣으러 왔다고? 요즘엔 제 목 자르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군.’
두변은 속으로 이 무사가 할 말을 짐작했지만, 무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통보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불현듯 계표표가 이미 계청주에게 혼담 얘기를 꺼냈음을 깨달았다.
‘날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런데 저 문지기 무사는 표정이 왜 저렇게 비장해? 꼭 내가 무슨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잠시 뒤, 문지기 무사가 돌아와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회주께서는 저기 보이는 중앙 고탑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오.”
두변은 고개를 들고 문지기 무사가 가리킨 고탑을 내다보았다.
청룡회 부지의 중앙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산꼭대기에 백색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고탑이 하나 있었다.
두변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결의에 찬 모습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주위의 모든 무사들이 그를 잠시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두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을 뿐, 원래 하던 대로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았다.
한 50미터쯤 걸어갔을 때, 또 하나의 담벼락과 문이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문 앞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서른 넘은 나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고, 도복 같은 차림에 등에 철척(鉄尺)하나를 메고 있었다.
그는 강호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같은 모습으로 두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걸음을 멈춰라. 네가 이곳 청룡회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두변이 멈춰 서서 대답했다.
“계표표 소저와 마음이 맞아서 계청주 대종사께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나는 대소저의 오(五)사형이다. 대소저는 회주의 유일한 보물이자 청룡회의 자랑이다. 대소저께 구혼을 하려거든, 우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건 내가 혼담을 못 넣게 하려는 장애물일까, 아니면 계청주가 나를 시험하려는 걸까.’
두변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계표표의 오사형이 말했다.
“우리 대소저는 외모, 무공, 재능, 품행이 완벽한 여인이다. 그러니 대소저의 짝이 될 사람도 그만한 재능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 대소저의 남편이 되려면, 천문, 지리에 통달하고, 문학적 재능과 무도 실력이 특출나야만 한다.”
두변은 그제야 계청주의 의도를 알아챘다.
계청주에게 혼담을 넣으려면, 천문, 지리, 문학, 무공 네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
이 네 분야에 모두 통달한 사람이 무척 드물겠지만, 왜 이런 관문을 만들었는지는 이해가 됐다.
자기 딸이 너무도 훌륭하니,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걸출한 사람이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일 것이다.
계표표는 계청주가 사윗감에 대한 요구사항이 무척 낮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일 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계표표가 드디어 누군가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했으니, 이날만을 손꼽아 온 계청주로서는 사윗감 검증을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오사형이 말했다.
“계 사부는 천문 지리, 문학과 무도에 통달하신 분이다.”
두변도 계청주가 얼마나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계청주가 조정을 적대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젊었을 때 참여했던 과거 시험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계청주는 우수한 성적으로 1등을 해서 해원이 될 뻔했지만, 누군가가 그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며 모함했다. 계청주는 아무런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만으로 향시 과거 시험 결과가 무효가 되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절대로 참지 않는 성격의 계청주는 곧장 관아로 가서 이 일을 따졌지만,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로 감옥에 잡혀 들어갔고, 평생 과거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화가 잔뜩 난 계청주는 그때부터 붓을 내려놓고 무도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스무 살이 돼서야 무도인의 길로 접어든 그는 25년 만에 종사급 무도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세계에도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말은 통하는 모양이었다.
스무 살 때 치렀던 과거 시험 때문에 대녕 제국에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으니, 황제가 그를 총병관 직에 봉한다는 성지도 그렇게 팽개칠 수 있었으리라.
오사형이 말했다.
“우린 계 사부의 제자들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저 사부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자들이다. 천문학 분야에서 우리 사부보다 조예가 깊은 사람이 몇 없지. 그러니 내가 네게 천문학 문제 두 개를 내겠다. 만약 두 문제를 맞힌다면, 너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서 다음 관문으로 갈 수 있다.”
“알겠습니다.”
두변이 공손하게 말했다.
“내가 낼 두 문제는 정말 정말 어렵다는 걸 미리 말해두겠다. 이 두 문제는 사부께서 오랜 연구 끝에 답을 얻은 문제로, 나를 포함한 사부의 모든 제자는 이 두 문제를 풀지 못했다.”
“문제를 내주시지요.”
“첫 번째 문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조석, 즉 밀물과 썰물 현상의 원리를 설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