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장. 그 두 달이 있었기에
계속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심연 속으로 뛰어든 두변은 끝없이 추락했다.
두변은 자기가 뛰어든 곳이 어느 정도 깊이의 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상 몇천 킬로미터는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구두사 신의 심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천천히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가속도까지 붙으면서 말 그대로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 추락, 또 추락.
한없이 추락하던 두변이 이대로 이제 자신은 다짐육이 되나 보다 싶던 찰나, 그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정지했다.
슈우우욱.
그리고 어디선가 엄청나게 강한 힘이 그를 빨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저게 뭐야?
두변이 괴물의 정체를 알아보기도 전에, 괴물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숨을 들이마셨다.
두변의 온몸의 피가 모공을 통해 허공으로 빠져나오더니, 핏덩어리가 되어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뾰족한 송곳니로 목을 물어뜯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 피를 빨았다.
“하하하하! 아주 신선한 피구만. 맛있어. 너무 맛있어!”
심연의 아래에 있던 것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사람이었다. 그자의 두 손과 두 발은 잘려 있었고, 온몸이 쇠사슬로 뚫려 심연의 절벽에 묶인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나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악귀와 같은 사람!
오죽하면 여완완이 이자가 구두사 신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고 했을까.
맞다. 이 세상에 사람보다 더 무서운 괴물은 없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니, 두변 스스로가 먹히는 쪽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연 입구에서 여완완 요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마(老魔)! 이번에 보내 드린 음식은 어때요?”
괴물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좋아. 참으로 싱싱하고 맛있구나.”
두변은 자기 피를 빨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만족하신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꼭 물건을 내게 넘겨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전 가볼게요.”
여완완이 심연 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두변은 자신의 생기가 쏜살같이 빠르게 닳고 있음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괴물이 쉬지도 않고 제 피를 빨아들이고 있는지라, 그를 막지 못한다면 이대로 피 빨려서 죽을 기세였다.
‘빌어먹을 꿈속 세계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건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 흡혈 괴인(怪人) 임무 시작.
- 임무 목표: 흡혈 괴인을 정복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라.
- 임무 포상 1: 막씨 조상의 신물(信物)을 얻게 되고, 막씨 토사의 신비한 보물을 얻게 된다.
- 임무 포상 2: 숙주 두변의 역량 대폭 향상.
- 임무 포상 3: 십만 대군 획득 임무 첫 개시 성공.
- 임무 포상 4: 계청주의 딸 계표표와 혼례를 올리는 임무 정식 개시.
또 엄청난 포상이네.
그나저나, 포상을 얻으려면 눈앞에 있는 저 흡혈 괴인을 멈추게 해야 하는데? 그리고 저놈이 알아서 목숨을 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터무니없는 임무 때문에 두변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꿈속 시스템이 맛이 간 거야, 아니면 저 흡혈 괴인이 미친 거야. 이대로 1분만 더 있다가는 내가 죽게 생겼어!
바로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 불상처럼 장엄한 견사 대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국보급 정신 대사이자, 일대 고승이었던 견사 대사의 정신 계승을 받았을 때, 두변은 오직 정신력 15점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견사 대사가 두변에게 정신 계승을 해준 것 중, 대사가 평생을 살면서 쌓아온 삶의 지혜와 깨달음, 그리고 그의 소중한 기억이 제일 값진 것이지만, 두변은 그런 귀한 걸 받고도 정신력 점수에만 정신이 팔렸다.
물론, 꿈속 시스템이 두변에게 견사 대사의 기억을 한동안 읽지 말라고 했던 것도 있다.
이 위험한 순간, 불현듯 견사 대사의 정신이 갑자기 일깨워졌다.
두변의 뇌리에 수많은 기억이 영화 장면처럼 하나하나 펼쳐졌다.
젊고 준수한 승려, 그리고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화원에서 나란히 산책을 하고, 강가를 거닐고, 산봉우리에서 마주 보고 앉아 바둑을 두는 장면이 차례로 나타났다.
여인의 눈빛은 점점 더 애틋해지지만, 젊은 승려의 눈빛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두변은 이 장면이 왠지 눈에 익었다.
이 둘의 모습은 마치 <서유>의 삼장법사와 여인국 국왕의 모습과도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 기억이 두변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마침내 달빛 아래, 절세미인이 승려의 품에 안긴 채 곤히 잠이 들자, 승려는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미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결국 슬픔을 누르고 단호하게 그녀의 곁을 떠났다.
이 준수한 승려가 바로 젊은 시절의 견사 대사란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다면 견사 대사의 마음을 흔들었던 절세미인은 누구일까.
이때, 견사 대사의 정신력이 갑자기 폭발하더니, 두변의 머릿속을 관통하면서 그의 안면을 가득 채웠다.
순간, 두변의 얼굴이 젊은 시절 견사 대사의 얼굴로 변하면서 일대 고승의 특유의 분위기까지 풍겼다.
견사 대사의 목소리가 두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영아! 이 어리석은 사람아.”
댕!
만 장 깊이의 심연 속인데, 마치 새벽녘 사찰에서 울리는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친 듯이 두변의 피를 빨아대던 흡혈 괴인이 갑자기 뭐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흡혈이 멈추고, 흡혈 괴인의 광기 어린 눈빛이 차츰 진정되더니 이내 고요하고 청명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괴인의 눈빛에는 추억, 따뜻함, 그리고 무한한 애정이 어려 있었다.
“아사, 당신이에요?”
흡혈 괴인의 입에서 놀랍게도 가녀리고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변은 이 흡혈 괴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흡혈 괴인은 한때 제국의 서남을 평정했던 최강 토사의 수장 막영(幕影)이었다. 그녀가 바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여여해에게 배신을 당하고 진남공 송결에게 패배했던 막씨 토사였다.
조금 전 두변의 기억 속에 있던 절세미인도 바로 젊은 시절의 막영이고.
당시 그녀는 한겨울에 내리는 첫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졌고, 견사 대사와 함께 거닐던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생연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 두변의 눈앞에 있는 막영은 더는 인간 같지도 않은 짐승 그 자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할 수 없는 외양에 머리카락은 절반이 빠져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처럼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눈언저리가 움푹 패고 콧대가 높아서 얼핏 보면 지옥에서 온 대머리독수리 같기도 했다.
두변의 기억 속 막영은 눈빛 하나로 정을 표현하고, 촉촉한 눈가에 행복함이 묻어났는데, 지금 흡혈 괴인이 된 그녀의 모습은 견사 대사가 와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
두변은 기억 속의 두 사람이 왜 이별하게 된 건지 추측할 만했다.
당시 막영은 토사가 아닌 토사의 딸이었는데, 자유롭게 강호를 누비고 다니던 젊은 시절의 견사 대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매력에 매료되어 깊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견사 대사는 일생을 불법에 바치겠다고 맹세한 승려인지라, 속세의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너무도 아름다운 정신적 연애를 했지만, 견사 대사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막영을 떠나게 되었다.
막영은 견사 대사와의 이별 때문에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와 함께했던 두 달의 시간을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이후, 막씨 토사의 아들들이 장애나 지병을 얻거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면서, 문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재능이 출중한 막영이 막씨 토사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녀는 안륭 토사의 저홍면처럼 서남 지역의 여인 토사가 된 것이다.
막영의 지혜와 계략 덕분에 막씨 토사는 급속도로 세력을 넓혔고, 그러던 중에 야심이 가득한 사내 감타(甘陀)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막씨 토사는 더 매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했고, 서남 지역 최강 토사가 되었다.
막영과 감타는 모두 종사급 무도 강자로, 휘하에 수만 대군을 거느리면서 소금장, 비금광, 철광 등으로 막대한 금화를 벌어들였다.
감타의 야심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그는 서남 토사 연맹을 통합하겠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대녕 제국의 북쪽에서 전투가 일어나면서, 감타가 막씨 토사와 서남 토사 연맹의 십몇만 대군(대외적으로는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후의 일은 모두가 알다시피, 토사 연맹의 이인자였던 여여해가 막씨 토사를 배신하면서 막씨 토사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일로 막씨는 멸족에 가까운 학살을 당했고, 막씨 토사 영지가 조각조각 나뉘게 되면서 파멸을 맞이했다.
막영이 죽지 않고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여씨 토사의 영지가 아닌 십만대산 깊은 심연에 혼자 감금된 것도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아사, 정말 당신이에요?”
흡혈 괴인이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떨면서 다시 물었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견사 대사가 아니라, 견사 대사의 정신 계승을 받은 사람입니다. 대사께서는 귀적하셨고, 좌화(坐化: 앉은 채로 왕생往生하는 일)하시기 직전에 제게 정신력을 계승해주셨습니다.”
흡혈 괴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아, 아사가 죽었다고?
내 사랑 아사가 죽었단 말이야?
내가 평생을 사랑한 그 사람이!
아사, 당신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흡혈 괴인이 올빼미 소리 같기도 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두변이 서둘러 말했다.
“그게, 돌아가신 게 아니라 귀적, 좌화하신 건데, 돌아가신 것과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그리고 견사 대사의 기억과 정신이 고스란히 제게 남아있습니다.”
흡혈 괴인이 차츰 진정하더니, 다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아사가 아니야. 아주 순간적으로는 너에게서 아사의 분위기와 향이 났었지만, 아사는 너보다 훨씬 더 평온해. 그의 곁에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던 바람을 느끼는 것 같고, 구름을 보게 되는 것 같고, 그리고 물을 보는 것 같았지.”
흡혈 괴인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혹시 잠시라도 나를, 이 가엾은 여인을 떠올렸을까?”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제게 남겨주신 기억 중 대부분이 당신의 것입니다. 두 사람이 화원에서 산책하는 모습, 강가를 거니는 모습, 산꼭대기에서 별을 구경하는 모습, 바둑을 두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빛 아래서 견사 대사께서 고통스럽게 눈물을 머금고 당신을 떠나는 모습까지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두변의 말에 따라 흡혈 괴인의 눈빛이 점점 더 부드러워지더니, 이내 달콤한 꿈속에 빠진 사람처럼 몇십 년 전을 회상했다.
“그만, 그만하면 충분해. 내 생은 그 두 달이 있었기에 헛되지 않았어.”
흡혈 괴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변은 흡혈 괴인을 부를 호칭을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이 바로 막씨 토사를 이끌던 마지막 토사, 막영이 맞으십니까?”
“그래, 내가 막영이지.”
흡혈 괴인이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감금되어 있으신 겁니까? 여씨 토사가 왜 어르신을 이곳에 묶어둔 것이고요?”
흡혈 괴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씨 토사의 짓이 아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곳에 가뒀어. 그 야심으로 가득 찬 독사 놈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