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장. 역사는 반복되고
“말 한마디가 이어지지 않으니, 이쯤 하시지요. 아, 그리고 두 대인께서 아셔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이번엔 제가 대국을 위해 많이 참은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우는 손이 잘린 것에서 그치지 않았겠지요. 대인께서 계림으로 가시게 되면 장양명 순무 대인과 대면하시게 될 때,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두변의 말에 두강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노인이 정말로 황제의 중지를 받들었단 말이냐. 쯧쯧. 늙어서 평생 쌓아온 공덕을 다 날리게 생겼구나.”
두강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조금 전에 계왕이 무척이나 위엄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두변이 대답했다.
“슬프다고 느꼈습니다.”
두변은 슬픈 것에 그친 게 아니라, 계왕이 얼마나 수치심을 느꼈을지 생각하며 화가 났다.
조정의 번왕이 문관과 무장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헛소리한 탓에 자애로운 계왕이 참장을 때려죽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네가 멍청한 놈은 아니구나.”
두강이 짧게 대꾸한 뒤, 콧방귀를 뀌면서 자리를 떠났다.
두강은 가족들과 오주 지부, 몽산 현령, 그리고 천여 명의 병마를 데리고 오씨 장원에서 깨끗하게 물러났다.
두강은 떠날 때도 계왕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지만 얼굴은 이미 한쪽이 싸늘해져서 앞으로 계왕에게 이 이상의 공손함은 없을 것이라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떠나자, 계왕이 그제야 말에서 내려와 오정도 부부에게 말했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본왕이 잠시 실례해도 되겠소? 아, 누구처럼 주인을 내쫓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오정도 부부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누추한 집에 이런 귀한 분을 모시게 되니, 소인들은 송구할 따름입니다.”
두변, 계왕과 이릉 세 사람이 오씨 장원의 가장 고급스러운 객청 안에 앉아 있었다.
계왕의 얼굴에는 이미 조금 전의 위풍이 사라졌고, 한없는 슬픔만 남아 있었다.
두변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왕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지고 보면 계왕이 이문회의 사형이기 때문에, 두변은 후배로서의 예를 올렸다.
계왕이 손을 저었다.
“아니다. 본왕은 원래 왕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이문회가 대녕의 강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것을 보고만 있기가 부끄러웠다. 문회가 그러고 있는데, 친왕인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물러서기만 할까.
그나마 본왕이 오주부에서 목소리를 조금 낼 수 있는 거지, 오주부를 벗어나게 되면 본왕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본왕이 봉지를 조금이라도 이탈했다가는 현령 정도의 문관도 본왕을 체포할 수 있겠지.”
계왕이 자조적으로 농을 하는 게 아니었다.
대녕 제국의 번왕은 조정의 지의가 있지 않는 한, 절대로 봉지를 떠날 수 없었다. 번왕이 지의 없이 봉지를 떠나는 건, 역모를 꾀하는 대죄로 간주된다.
몇십 년 전에 봉지를 임의로 이탈한 번왕이 있었는데, 바로 옆의 현령에게 붙잡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답답하지. 참 답답해. 진남공 송결이 병마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본왕이 얼마나 송결을 따라 전장으로 나가고 싶었는지 아는가. 본왕이 송결 밑에서 천호, 아니 백호를 해도 좋으니 본왕의 일품 무공을 이대로 썩히고 싶지 않았다.
본왕이 어딜 봐서 번왕이냐? 완전히 울타리 안에서 먹고 자는 돼지지.”
계왕이 한탄했다.
두변이 진지하게 말했다.
“왕야,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서남의 격변이 곧 시작될 것입니다. 만약 여씨가 다시 반역을 일으킨다면 진남공이 계시지 않으니, 계왕 전하께서 서남의 최고 군권을 쥔 분이 되실 겁니다. 몇만 병사가 계왕 전하만 믿고, 전하의 명령을 따라 맞서 싸울 것입니다.”
계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나 나나, 각자의 위치에서 어렵게 버티는 게지.”
“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시던 왕야께서 이 일로 갑자기 문무 집단의 뺨을 치셨으니, 저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왕야께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계왕이 콧방귀를 뀌었다.
“분명히 복수하겠지. 계왕부에 쓰는 돈을 줄이거나, 계왕부 소유의 전답 면적을 줄이거나, 계왕부 병마의 수를 줄이거나 하겠지. 더 심하면 본왕의 아들에게 시비를 걸 테고. 뭐, 마음대로 하라 그래라. 본왕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계왕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 졸업 시험에 관해서 들었다. 전 과목 만점이라니, 정말 놀랍더군. 이러니 네 아비가 너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겠지. 본왕의 세자는 태생이 나약한 터라, 본왕의 딸이 더 배짱이 좋단다. 아 참, 졸업 후에 곧바로 동창으로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가기로 결정했는가? 우리 오주부에 올 생각은 없는가?”
옆에 있던 이릉이 눈을 반짝이면서 두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릉은 이문회가 어렸을 적부터 키운 의자인지라, 정말 이문회의 친아들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릉은 두변이 자신의 동생인 만큼, 자기가 두변을 챙겨줄 수 있도록 그가 오주부에 오길 내심 바랐다.
두변이 대답했다.
“백색부로 가기로 했습니다. 백색부 동창 천호소의 시백호를 하기로 했고요.”
계왕과 이릉의 안색이 급변했다.
백색부? 제국 서남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그곳? 거긴 호랑이 굴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동창이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했는데?
문회가 보낸 천호 셋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계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곳이 여씨 토사에 저항하는 최전선이긴 하지만, 이연정 도독이 용케 너를 그리로 보냈구나. 넌 아직 어리다. 아무리 단련을 위한 것이라지만, 거기는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야.”
“사실 전 그곳이 여씨 토사의 숨통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곳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무장 군단을 만들 수만 있다면, 여씨 토사의 복부에 날카로운 비수를 찔러 넣는 게 되니까요.”
계왕이 잠시 곰곰이 생각한 뒤에 말했다.
“지금 백색부에는 주된 세력이 총 세 개가 있다. 여씨 토사 6할, 계청주의 청룡회가 3할,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막씨 토사 1할이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조정의 사람처럼 보이는 전주부 지부와 참장은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여씨 토사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두변이 물었다.
“조정에서는 이미 그들이 여씨 사람이 됐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조정이 보낸 관리가 보내는 족족 다 죽어버리니, 더는 그곳에 가려는 관리가 없구나. 지부와 참장도 목숨을 보존하기 힘든 곳이니, 꼭 몸조심하거라.”
두변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왕야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옅은 노란색 옷을 입은 소녀가 다기를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두 눈은 총기가 가득했고, 작고 귀여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가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작고 귀여운 체구를 가진 소녀는 대충 열여섯 살처럼 보였다.
오씨 장원에 이렇게 예쁜 소녀가 있었나?
두변이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아버지, 저, 저는 차를 올리기 위해서 온 것이지,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계왕이 묻기도 전에 소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이 소녀가 계왕이 애지중지하는 이강 군주 영리(寧漓)였다.
아름답고 총기가 가득해 보이는 이강 군주는 계왕을 ‘부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아버지’하고 불렀다.
“차를 올리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두변 사형을 보기 위해서 온 거겠지. 얼른 인사하거라.”
계왕이 딸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강 군주가 부끄러워하면서 두변을 향해 간단하게 예를 표했다.
“두 사형을 뵈어요.”
“군주를 뵙습니다.”
두변이 허리 숙여 답례했다.
이강 군주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두 사형이 쓴 ‘명월기시유’는 내가 들어본 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예요. 요즘에 새로 쓴 작품 있어요?”
알고 보니, 이강 군주는 두변을 열성적으로 흠모하는 모양이었다.
두변이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새로 쓴 작품이 있다면 꼭 군주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강 군주가 기뻐하면서 손뼉을 쳤다.
“좋아요. 꼭이에요. 꼭!”
이강 군주는 두변이 지금껏 ‘창작’한 모든 시와 문장을 알고 있었고, 최근 졸업 시험에서 쓴 것까지 알고 있었다. 계왕이 두변을 도우러 간다는 걸 알게 된 이강 군주가 거의 떼를 쓰면서까지 따라가게 해달라고 애원한 모양이었다.
계왕은 워낙 딸바보인지라 이강 군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를 남장시키고 자신의 시위로 위장한 뒤에 이리로 데려왔다.
계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얼굴도 봤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보거라. 아비가 네 두 사형과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
이강 군주가 아쉬운 기색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 사형, 새로 쓴 작품이 있으면 꼭 내게 보여주기로 한 약속 꼭 기억해줘요. 나는 영원히 두 사형을 응원할 거예요! 두 사형이 최고예요!”
이강 군주의 어휘는 무척 단순했지만, 그만큼 진심이 묻어났다.
두변은 진심으로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들어서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계왕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강 군주가 쪼르르 객청을 나가는 걸 다 본 뒤에야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언제 백색부로 부임하러 가는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오주를 떠나서 계림으로 가고자 합니다. 중간에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곧장 백색부로 가려 합니다.”
“백색부에 갈 때 이것 하난 기억해라. 그곳에선 계청주의 명망이 더할 수도 없이 높다. 여여해도 그를 볼 땐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이니 말이다. 그의 인정을 받기만 하면 백색부에서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왕야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두변이 예를 올렸다.
계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왕이 비록 조정의 친왕이긴 하나 계 종사에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게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계 종사는 줄곧 조정을 배척해왔거든. 다행인 건, 내 친위 중에 4품 고수가 있는데 그가 청룡회의 제자였다. 계 종사 앞에선 별 존재감이 없긴 하지만, 백색부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내일 떠날 때 데려가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왕야.”
두변이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아니다. 본왕이 너희들에게 고마워해야지. 이렇게 많은 충신이 대녕 제국의 강산을 위해 불바다로 뛰어드는데, 황실의 친왕인 본왕은…….”
계왕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뒤, 계왕이 두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바라보았다.
“어쨌든, 몸조심해라. 안전이 최우선이다.”
오씨 장원에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지만, 침상에 누운 두변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두강도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 장양명 선생이 적수를 제대로 만나셨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여씨 토사를 타파할 때만큼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계왕 전하는 일대 영웅호걸이 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번왕이라는 신분 때문에 포부를 펼치지 못하시는구나. 그나저나 이강 군주는 꼭 막내 누이처럼 귀엽고 주위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네.
두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졸업 시험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왜 꿈속 시스템이 잠잠한 거지? 포상 안 주나?
두변은 양기 포인트, 공훈 포인트, 그리고 무공 비급을 얻을 생각에 흥분했다.
예전에 듣기로는 이 세계의 무공 비급이 1품부터 9급까지 나뉘고, 그 위에 절대 비급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이 세계에서는 외공(外功)으론 무수히 많은 무공 비급을 수련할 수 있지만, 내공은 오직 한 종류의 비급만 수련할 수 있다.
무도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력 수련이고, 내력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무공의 수준이 높아진다.
그래서 내공 비급이 더욱 중요한 것이고, 상급의 내공일수록 수련의 속도가 빨라지고 진급도 훨씬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