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장. 이연정과 이문회
이연정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이 강했지. 내가 너를 한마디도 꾸짖지 못할 정도로 강했지. 폐하께서 젊으실 때, 무심코 너를 노비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네가 기어코 보름이 지나도록 폐하와 대화하지 않았던 걸 기억하느냐? 그 일로 폐하께서 절대로 너를 노비라고 부르지 않았고, 다른 환관들을 부를 때도 노비라는 호칭을 쓰지 않으셨다.
폐하는 너의 주군이자 지기(知己)이다. 서생은 지기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하지. 그래, 너는 네가 원해서 이 죽음을 택한 거라지만, 이곳에 남겨진 폐하와 나는 어찌 하라는 거냐?”
이문회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들이 죽지 않는다면 간신들이 또다시 폐하를 위협할 것입니다. 폐하의 신하로서, 주군께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연정이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똑똑하면서, 왜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않느냐?
너는 나의 희망이다. 너는 폐하의 기둥이자 든든한 팔이다.
하지만 네가 죽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냐.
내 나이 벌써 칠순이 다 되어가는 늙은이인데, 내가 아들을 잃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보았느냐. 너 이문회만 자식을 위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다. 너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마음씨를 가진 아비라 생각하느냐.”
이문회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의부를 보았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의부, 아들은 죽어야만 합니다. 아들이 죽지 않는다면, 모든 압박이 폐하께 향할 것이고, 그때는 아들이 아무리 이 한 몸 불태운다 해도 국면을 만회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아들은 진정한 불충 불효의 신하가 되는 겁니다.”
부아가 치밀어오른 이연정은 마음 같아선 이문회를 반쯤 죽여놓고 싶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아들이냐. 기나긴 만 리 길을 달려서 간신히 목숨을 살려놨더니, 돌아오는 말이 아직도 죽겠다는 말이라니.
이문회는 어려서부터 이랬다. 황소고집인 데다 자존심이 세서, 한번 결정한 것은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이연정이 소매에서 황제의 성지를 꺼내서 펼쳤다.
“이문회는 명을 받들라.”
갑작스러운 성지에 깜짝 놀란 이문회가 무릎 꿇은 자세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제가 명하노니, 이문회의 광서 동창 진무사 직을 면하고, 안남 왕국으로 좌천한다. 이문회는 안남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며 안남국의 천도를 돕도록 해라.”
안남 왕국에 왕도 두 곳이 있는데, 지금의 왕도는 순화부이고, 승룡부는 부도(陪都)였다.
현재 완씨 반란군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순화부를 둘러쌌고, 진남공과 안남국의 수십만 연합군이 순화부에서 반란군과 결전을 치르려 하고 있었다.
이 결전은 안남 왕국의 운명은 물론 대녕 제국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반왕 완씨가 안남 왕국을 점령하게 된다면, 대녕 제국은 여씨 가문의 영역과 반왕 완씨가 점령한 안남 왕국 국경과 맞닿게 된다. 언젠가 여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완씨도 절대로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고,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내전이 일어난 대녕 제국에 칼을 꽂을 게 분명했다.
황제가 이문회를 안남 왕국으로 파견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맹우인 안남 국왕을 도와주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이문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문회, 명을 받들어라.”
이연정이 말했다.
이문회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제가 죽지 않으면 문무 집단이 폐하를 가만히 둘 리 없습니다. 아들이 죽어야만 폐하께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제국에는 저 이문회가 없어도 되지만, 폐하가 없을 순 없습니다.”
이연정이 고집불통인 아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이럴 줄 알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럴 일 없을 테니. 아무도 폐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죽어라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문회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점점 더 크게 뜨더니, 이내 안색이 변해서는 이연정을 바라보았다.
이문회는 이연정이 무슨 결정을 내리고 자신을 구하러 온 건지 단번에 눈치챘다.
이문회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면서 미친 듯이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의부,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이연정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미 늦었다. 네가 동의하지 않을 걸 알기에 나도 일단 지르고 봤지.
동창 대도독을 사직하겠다고 정식으로 폐하께 말씀드렸다. 오늘부로 나는 폐하의 신변 보호만 전담하는 잡인에 불과하다. 문무 집단은 내 결정에 몹시 만족했고, 폐하와 황실을 위협하지 않을 게다.”
이문회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연정이 동창의 대도독 자리를 지킨 지 벌써 17년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이연정은 막강한 영향력으로 문무 집단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국의 거물인 이연정이 발을 한 번 구르면 제국 전체가 들썩였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이미 십수 년간, 엄당의 다른 파벌과 문무 집단이 얼마나 많은 음모로 이연정을 몰아내려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서도 좋다며 온갖 음모를 꾸몄지만, 매번 성공하기는커녕 되레 이연정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수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연정이 스스로 물러났다.
문무 집단은 이연정이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황제와 황실에 위협을 가하지 않기로 했다. 십수 년을 간절히 바라왔던 일이 드디어 이뤄졌으니, 그들은 이문회가 죽지 않는 것도 눈감아줄 수 있었다.
이문회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고위 관직자 십여 명, 남해도장 학생 수백 명, 권력가 수십 명이었지만, 문무 집단은 이에 대해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문무 집단은 죽은 자의 한을 산 자의 몸에 새겨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손꼽아 바라던 것을 이뤘으니,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엄당에게는 이연정의 퇴위가 천재지변 수준의 일이었다.
이문회는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목놓아 통곡했다.
“아들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아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연정이 이문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불효를 저지른 건 맞지만, 이 일 때문은 아니다. 내가 이런 결정을 한 건, 너 이문회만 눈물 나는 부정이 있는 아비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네가 저지른 불효는 네가 죽기 전에 이 아비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일모레 칠순인 내게 돈 따위가 중요할 것 같으냐? 내 삶에서 중요한 게 몇이나 된다고 네가 그중 반이나 빼앗아 가려고 하느냐. 이렇게 늙은 내가 그런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아들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다 아들의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동창 대도독의 권세가 하늘을 뒤덮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내가 권력에 연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있던 건, 내 야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다.
내가 동창을 떠나게 되면, 동창에는 지붕이 없어지게 된다. 내 옷소매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햇병아리들을 눈비에 맞아서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않으냐. 원래는 네가 더 성장할 수 있게 5년이 더 지난 뒤에 네게 이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니, 이번 일 때문에 내가 5년 일찍 퇴직했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이문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과거의 나는 동창 소속도 아니었고, 그냥 무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권력 같은 것엔 관심도 없고, 무도 수련에만 온 정신을 쏟았었지. 그해 선조께서 붕어하셨을 때, 지금의 폐하께서는 너무도 어리셨고 선조께서 나와 영종오의 손을 잡고 부탁하셨다. 둘 중 한 사람이 동창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폐하께서 믿는 심복이 어린 폐하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 있도록 동창의 수장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이연정이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알다시피 영종오는 무공 하나는 헉 소리 나올 정도로 뛰어나지만, 꼭 여편네들처럼 허구한 날 징징거리지 않으냐. 영종오가 선조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듣자마자 우느라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동창 대도독을 맡게 되었고, 그렇게 17년 동안 우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제 중년이었던 사내가 칠순을 앞둔 노인네가 되었다. 한창 좋을 시절을 동창에서 보내게 된 셈이지.
그런데 영종오 그놈은 무공 수련을 부지런히 해서 나를 앞지르지 않았느냐. 게다가 네가 그놈에게 무도를 배운다고 했을 때, 내가 속으로 얼마나 샘이 났는지 아느냐.
문회야, 이 아비는 너와 다른 점이 있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지도자 자질을 갖고 태어났고, 뛰어난 결단력과 단호함이 몸에 배어있다. 그런 매력 덕에 지금처럼 너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을 석판처럼 굳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겁주는 것밖에 없다. 다들 동창 주인 이연정이 1년에 두어 마디 하는 게 전부이고, 표정이 없는 사람이어서 무섭다고 하지. 내가 가만히 있어도 다들 알아서 내 눈치를 보고.
그런데 사실은 말이다. 내 말수가 적은 것은 정말로 내가 말을 잘하지 못해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게 두려웠다. 얼굴에 표정을 보이지 않는 건 선조께 배운 것이다.
그때 선조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네가 필요한 건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겁주는 것이다. 말을 잘할 줄 모른다면 그냥 말을 하지 말아라. 명령만 내려도 만인이 너를 따를 것이다.’라고. 그래서 나는 이 얼굴로 십여 년을 살았다.
내가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사람 하나는 잘 보지. 그 덕에 유능한 의자 세 명을 거두고, 실력이 뛰어나고 충실한 수하들도 얻을 수 있었다. 할 일이 있으면 너희를 시켰는데, 놀랍게도 아주 잘 해오더구나. 특히 불효자식인 네가 해내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경이로울 지경이더구나.
동창 주인의 자리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하루도 편히 쉬질 못했는데, 그게 벌써 17년이다. 다행히도 크게 잘못한 것 없이 퇴직했으니, 내가 밑지는 장사를 한 건 아니지. 퇴직하기 직전에 육부 시랑 두 명을 없앴고, 상서 한 명의 관복을 벗기고 고향으로 유배 보냈다. 유배 보낸 게 찝찝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내 뜻대로 집에서 자결했다더구나. 아, 그리고 어마감의 그 재수 없는 영감도 죽였다.
동창 대도독 자리는 사례감 병필(秉笔) 태감에게 겸직을 맡아달라고 했다. 5년 뒤에 그 자리는 네 것이 될 것이다. 아들아, 너는 이 아비를 믿어야 한다. 폐하도 믿어라.”
눈시울이 붉어진 이연정이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이 불효자식아, 아직도 죽고 싶으냐.”
이문회가 엎드려서 큰절을 올리면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이문회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성지를 받았다.
이 순간부터 이문회는 잠시 동창을 떠나, 꽤 긴 시간 동안 안남 왕국에서 지내게 된다. 그는 안남 국왕의 개인 고문이 될 것이고, 그의 신변 보호와 안남 왕국의 천도를 도울 것이다.
안남 왕국의 수도는 원래 승룡부였다. 하지만 대녕 제국의 전조(前朝)였던 달단 제국이 중원지역의 땅을 흉포하게 쳐들어갔고, 더 나아가 안남 왕국까지 위협하려고 하자 당시 안남 국왕이 달단 제국의 위협을 피해 왕도를 승룡부에서 순화부로 옮겼다.
그러니 이번에 순화부에서 다시 승룡부로 왕도를 옮기는 건, 안남 왕국의 원래 왕도를 되찾는 것이며, 승룡부를 영원한 왕도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왕도를 이전하는 데에는 인력과 자본 등이 어마어마한지라, 대녕 제국이 안남 왕국을 위해 인력을 지원해주기로 했고, 이문회가 그들을 지휘하는 수령이 된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문회와 안남 국왕 여창은 벗과 같은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