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95화 (195/648)

195장. 태양이 뜰 무렵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이옥당은 괴로워서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이문회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이문회, 내가 예전엔 너를 인정하지 못했다. 늘 내가 너보다 강하다고 믿었었지. 하지만 지금 정식으로 패배를 인정한다. 나는 너보다 못한 놈이다.”

이옥당이 감정에 북받쳐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울먹이던 그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부탁을 모두 들어주겠다. 네가 만들어준 이 깨끗한 광서를 아끼고 아껴서 더욱 나은 광서를 만들겠다. 네 아들도 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마.

하지만 내 성미가 안 좋은 건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제국으로 봐서는 나도 얼마 못 살 것 같구나. 나도 너무 늦지 않게 너를 만나러 지하 세계로 가마.”

“감사합니다, 옥당 형님.”

이문회는 자신의 보검과 광서 동창 진무사 인장, 그리고 황제가 하사한 ‘편의행사’ 성지를 이옥당에게 전달했다.

그가 황제의 성지마저 이옥당에게 준 이유는 자신이 남해도장의 학생들을 죽인 것, 광서 고위 관직자 태반을 죽인 것 등, 지금껏 저지른 일들은 모두 자기가 가짜 성지를 들고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들이지, 황제와 무관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문회는 ‘편의행사’ 성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스스로를 대역 죄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옥당 형님, 그만 가보시지요. 동창 무사들을 데려가 주시고 제가 자른 머리들도 함께 가져가 주십시오.”

이문회가 희미하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옥당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문회야, 네 아들놈 얼굴 한 번 안 보고 가려는 것이냐.”

이문회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렵니다. 그놈 얼굴을 봤다가는 죽기 아까울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이옥당이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닦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이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 그만 가보마. 다음엔 지하 세계에서 보자.”

이옥당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 위로 몸을 던졌다.

“가자. 계림부로 돌아간다.”

무천추를 비롯한 동창 천호 몇 명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직감이란 게 있었다.

그들은 마음 같아서는 목놓아 울거나, 이문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함께 죽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주군인 이문회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주군이 죽음을 택한 건 자신들을 위한 것일 테고, 주군이 바라는 건 자신들이 소주인 두변을 잘 보필해서 대녕 제국의 중흥을 이뤄내는 것이리라.

수하로서 최고의 충성은 주군의 뜻을 따르는 것.

동창 무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서는 조용히 이문회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무천추 등은 한참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눈물을 참으면서 이를 악물고 말 위에 올라탔다.

동창 무사들은 그렇게 이문회를 남겨두고 이옥당을 따라 계림부로 향했다.

어느 산 아래, 이문회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말을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해발 천 미터 산 위에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끝없는 심연처럼 흑룡들이 몸을 도사리고 있는 듯 무수한 산들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문회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이문회는 이 땅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 비로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암흑이 갈기갈기 찢기고 광명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태양이 뜬다는 것은 희망을 뜻하니까.

이문회는 일출을 지켜보는 것을 즐겨 했다.

매일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은 힘찬 희망을 뜻했고, 일출을 보는 짧은 시간 동안 절망으로 채워진 그의 마음이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이 나라에서 정말로 제국을 위하고, 제국을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은 온통 절망뿐이었다.

영종오, 장양명, 이문회 등 하루라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고, 유무환도 밤낮 할 것 없이 술에 취해서 정신을 마비시켜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이문회는 조용히 인생의 마지막 일출을 기다렸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눈 깜빡할 사이에 몇 시진이 지났다.

동쪽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태양이 곧 떠오를 것이다.

이문회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밝고 붉은 태양이 하늘 끝에 걸리면서 눈부신 금빛을 쏟아냈다.

금빛의 곡선이 끝이 안 보이던 암흑을 찢고 환한 빛으로 세상을 채웠다.

“언젠가 제국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다시 눈부신 중흥을 이룰 수 있기를.

폐하, 힘드시더라도 끝까지 제국을 지켜주십시오.

제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더는 폐하를 곁에서 모시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이문회가 엄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품속에서 황금 단검을 꺼냈다. 이 황금 단검은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그때 황제는 매우 젊었고, 그도 젊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던 이문회의 눈에는 태양이 마치 두변의 얼굴이 되어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것처럼 보였다.

“얘야, 이제 남은 건 네게 달렸다.”

산 중턱.

눈썹과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노인이 미친 듯이 산 정상을 향해 달렸다.

그는 대종사급 무도 강자이자, 황제의 마지막 수호자인 동창 주인 이연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에서는 동창 주인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이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나뭇가지와 가시덤불 등에 긁혀서 옷 여기저기가 찢겨 있었다.

세상에 아비보다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문회가 남해도장을 공격해서 수백 명 학생을 죽였다는 전서구를 받는 순간, 이연정은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직감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곧장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한 뒤,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계림으로 향했다.

이연정이 계림부에 도착했을 때, 이문회는 이미 광주로 향한 뒤였다.

이연정은 쉬지 않고 광주부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계림부를 떠나자마자, 한 청년이 맨발로 그의 앞길을 막으면서 외쳤다.

“창공(廠公) 대인, 제 의부 이문회를 구해주십시오. 지금 이 산 꼭대기에 있을 겁니다.”

청년이 다급하게 그림 한 폭과 지도를 그의 손에 쥐여줬다.

이연정은 그 청년과 말을 섞을 겨를도 없이 그가 건넨 그림과 지도를 보자마자 곧장 이문회가 있는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연정은 이문회가 해가 뜰 무렵, 이 산 정상에서 자결할 거라는 걸 단번에 짐작했다.

몇 년 전, 이문회가 이연정에게 물었다.

“의부, 제국의 미래가 너무도 어두워서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때 이연정이 대답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면 마음이 한결 나아질 게다. 제국을 태양이라고 생각하거라. 지는 때가 있으면, 떠오르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이후로 이문회는 틈만 나면 일출을 보러 산을 올랐다.

이옥당은 자신이 지금 떠오르는 태양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 산 정상에 도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평지에서 보는 것보다 좀더 빠르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연정은 산 중턱부터는 타고 있던 말을 내팽개치고 대종사급 내력을 발휘하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빛보다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이연정이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문회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이문회가 있는 곳까지 몇십 미터 더 달려야 했지만, 이연정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사자후와도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저 불효자가 감히!”

이연정의 포효는 거대한 파장이 되어 수십 미터 밖의 이문회를 공중으로 튕겨 냈다. 이내 이연정은 빠르게 달려가 공중에 뜬 이문회를 품에 받았다.

이미 이문회의 가슴에 단검이 박힌 걸 보자, 이연정은 오장육부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연정의 포효 때문에 단검이 가슴에 일 촌 정도밖에 박히지 않았다.

이연정은 서둘러 이문회의 맥을 잡았고,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았다! 단검은 아직 이문회의 심장까지는 찌르지 못했다.

몇 날 며칠 밤낮으로 분주히 달려온 이연정은 그제야 한숨을 돌린 후 긴장이 풀리면서 거의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그도 이제 내일모레면 칠순이었다.

아슬아슬했다. 너무 아슬아슬했다.

아주 조금만 더 늦었다면, 이연정은 흑발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백발 부모가 됐을 것이다.

이연정은 침착하게 단검을 뽑아낸 뒤, 혈도를 눌러 지혈하고, 현기를 이용해서 이문회의 태양혈을 지압했다.

잠시 후, 이문회가 눈을 떴다.

이문회의 눈앞에 10년은 더 늙은 초라한 모습의 이연정이 있었다.

이연정은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그가 이문회를 향해 삿대질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호통쳤다.

“이놈의 불효자식아. 나도 아직 안 죽었는데, 네놈이 뭐라고 나보다 먼저 죽어? 뭘 잘했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죽겠다는 것이냐!

이 못난 놈아. 내가 널 몇 마디 나무랐다고, 광서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고 이렇게 죽어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꾸중 몇 마디 듣는 것도 그렇게 힘들더냐. 이 불충 불효한 자식아!”

이문회는 흥분한 모습으로 욕을 퍼붓는 이연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문회는 살면서 이렇게 흥분한 모습의 이연정을 본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초라하고 의관이 엉망인 모습도 처음이었다.

이연정은 영종오와 사뭇 달랐다. 둘 다 대종사급 무도 강자이지만, 이연정은 영종오와 달리 언제나 빈틈이 없고 상대방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위엄으로 가득 찬 위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연정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엉망이었고, 원래 위엄이 가득했던 얼굴에는 온갖 고생을 다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는 동창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문회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이연정은 이문회를 욕한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어린아이를 때리는 아비처럼 이문회의 등짝을 몇 대 후려쳤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연정이 이문회를 향해 두어 번 걷어찼다.

“죽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죽으러 가는 놈이 어디 있느냐. 의부인 나를 안중에 두기라도 한 것이냐? 나 이연정이 그렇게 무능하고, 동창이 그리도 쓸모없더냐? 내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이연정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화를 냈다.

이문회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하에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도 그럴 수 없는데, 이연정이라고 구할 수 있을까.

실컷 욕을 한 이연정이 씩씩대면서 옆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앉았다.

이문회가 무릎걸음으로 이연정 앞으로 다가가, 엉망이 된 이연정의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야윈 이문회를 보면서 이연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그날 너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게 아니었다.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불효자식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거였지. 아비가 네게 사과하마. 미안하다.”

이문회는 흠칫 놀라서는 바짝 엎드려 이연정의 신발에 이마를 댔다.

이연정이 말했다.

“내가 만약 너를 불효자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네가 이후에 한 선택들이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너는 이 아비와 기 싸움을 한 거다. 네가 맞다는 걸 이런 식으로 증명하려는 게지. 게다가 너는 네 죽음으로 두변을 받아들이고 인정해달라고 나를 협박하는 거 아니냐?”

이문회가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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