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장. 황제의 무게
이문회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들은 다 여씨 가문이 광서에 심어둔 밀정입니다. 여씨 가문과 연루해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들은 전부 제거해야지요. 제가 아무리 그들의 거점을 송두리째 뽑았다고 해도, 저들이 있는 한 여씨 가문은 한두 해 후면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옥당 형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여씨 가문이 사륭석을 격패했으니, 여씨 가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이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화교의 성화 마녀가 나타났으니, 성화교를 믿는 서남 토사 연맹은 더욱 빠르게 단합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재기하기 전에 여씨 가문의 돈줄을 끊어야 합니다. 저들이 은자를 마련할 수 있는 모든 수단도 없애야 하고요.”
이문회가 간절한 눈빛으로 이옥당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우리가 쓰던 방법은 이제 저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진남공께서 안남 왕국에서의 마지막 대전을 앞두고 계시니, 만에 하나 그사이에 서남 토사 연맹이 연합한다면, 만에 하나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안남 반란군과 함께 진남공을 협공한다면, 제국이 멸망하는 재앙이 펼쳐질 겁니다.
형님,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때 무슨 원리원칙이 있겠습니까!”
이문회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쳤다.
“죽여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 광서 순무이자 현 이강 서원 산장 구양담, 광서 안찰사, 계림부 지부, 염주부 지부 등 십여 명 고위 관리들의 목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이옥당이 뻣뻣하게 굳어진 목을 돌리면서 동창 무사들의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쿵 떨어지고 눈앞이 새카매졌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겠구나!
이옥당은 이문회가 남해도장을 공격한 게 끝일 줄 알았고, 광서 순무 낙문을 죽인 게 다일 줄 알았다.
누가 알았을까. 이문회가 광서 고위 관리 태반을 모조리 죽일 줄이야.
이문회가 이 모든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건 황제의 ‘편의행사’ 네 글자가 적힌 성지, 단 하나 덕분이었다.
이문회가 이옥당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옥당 형님, 이건 제가 의부께 드리는 절필서입니다. 형님께서 의부께 전해주십시오.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아들 된 도리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제게 남은 건 죽음뿐입니다.
또한, 저로 인하여 폐하께서 대신들에게 퇴위 협박을 받으실 수도 있으니, 제게 남은 건 죽음뿐입니다.”
이문회가 비장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저들에게 폐하를 위협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폐하께서 치욕스러운 일을 겪지 않게 할 것입니다.
저는 남해도장에서 수백 명 학생을 죽였고, 양광 총독부를 급습하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낙문을 죽였으며, 광서성 고위 관직자 태반을 죽였습니다. 이 일 중 하나만 두고 보아도 천하의 대죄를 저지른 것이지요. 몇백 년 역서에서도 보지 못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 일들을 시작할 때부터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옥당 형님, 제가 광서를 깨끗하게 정리해놨으니, 부디 형님께서 깨끗한 광서를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광서 동창 진무사 직도 형님께서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제 아들놈 두변은 이제 날개가 꽤 단단해졌습니다. 두변은 장차 엄당의 가장 걸출한 지도자가 될 것이고, 제국의 위험한 국면을 만회할 힘을 가진 보기 드문 천재입니다.
형님,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제 아들놈 두변을 잘 부탁 드립니다. 두변이 하늘을 나는 법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문회가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이옥당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광서 환관 학원.
사람들이 숨 쉬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경악한 얼굴로 대련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그 누구도 상황파악을 빠르게 하지 못했다.
종소리가 울리기 1초 전까지만 해도 당엄의 필승을 예상하던 산장 왕굉은 눈가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당엄을 바라보았다.
비무에서 진 사람이 당엄이라니, 그는 도저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두변은 절대로 7품 무사 이상이 아닌데, 어떻게 폭원단까지 먹은 당엄을 이길 수 있지?
무려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하던 몇천 명 학생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엄당 학생들의 마음속에 당엄이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영웅이자 청년 지도자 두변이 확실히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은 두변이 어떻게 이겼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변이 지금껏 써낸 신화 같은 기적에만 감탄할 뿐이었다.
주시험관 어만루가 옆에 있던 시험관들과 시선을 나눈 뒤,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향해 성적을 발표했다.
“전투 무도 비무의 승자는 두변이고, 두변에게 20점을 부여한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두변이 총점 500점을 획득하여 수석을 차지했고, 당엄은 총점 480.5점으로 차석이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험관들에게 아주 인상적인 졸업 시험이었다.
시험관들 모두 당엄과 두변에게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지만, 그건 우리가 너무 늙은 탓에 요즘 세대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과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건 아마 우리 늙은이들의 잘못일 것이다.”
어만루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두변과 당엄이 보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로 격렬히 겨루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재능이 출중한 청년들끼리 힘을 합쳐서 제국의 미래를 위해 이바지하는 게 더 보고 싶구나.”
뒤늦게 깨어난 당엄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귓가가 먹먹했다.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결투를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두변을 죽일 수 있었는데, 왜 갑자기 머리가 아프면서 의식을 잃었던 걸까.
당엄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몇 대 세게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슴이 울컥하면서 가슴팍에서 피가 새어 나왔고, 동시에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당엄은 그제야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한 힘이 놀랍게도 직접 그의 정신을 공격했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정신 공격을 당한 그는 머리가 갑자기 터질 듯이 아파오면서 의식을 잃었었다.
당엄은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느낌과 함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때 당엄이 깨어난 걸 본 어만루가 그에게 대련장으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당엄은 애써 침착한 모습으로 앞섶을 여민 뒤, 아픈 몸을 이끌고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두변 형제, 졸업 시험에서 내가 진 걸 인정한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오늘부로 광서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 오늘 이후로 네가 있는 곳에서는 무조건 삼보 양보하겠다.”
당엄이 두변에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다.
두변도 말없이 당엄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이만 간다.”
당엄은 짧게 인사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조금 전, 두변은 충분히 당엄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 시험은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니니, 당엄을 죽이게 되면 명성에 타격을 입을 것이고, 시험관들도 그의 행동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리 소중한 단혼영인데 새로운 보충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되도록 아껴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당엄을 죽일 수 있는 필살기이지만 너무 아쉬워서 단혼영의 3분의 1만 사용했다. 물론, 당엄은 이 정도 공격에도 심각한 정신 손상을 입었을 테지만.
“참으로 위대한 순간이구나. 광서 환관 학원 설립이래, 최초로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라니. 심지어 대녕 제국 모든 환관 학원에서도 이런 만점자는 없었다. 이런 귀한 천재가 우리 앞에 급작스럽게 나타났구나!”
대환관 어만루가 대련장 위로 올라와서 두변을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두변이 다시 어만루 곁으로 다가갔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사람만이 동창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과거 동창의 제독이었다. 물론 별로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동창을 대표해 자네가 동창의 일원이 되는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어만루가 말했다.
두변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졸업 시험은 해가 저문 뒤에야 끝났다.
두변은 이문회의 진무사 관저로 가서 이문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잠들었던 두변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두변은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광서 경내.
이문회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처음엔 완전히 놀랐던 이옥당은 이내 억장이 무너져 내려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네 아들을 내게 떠넘기지 말아라. 네 아들이면 너 스스로 지켜라.”
이옥당이 이내 고개를 획 돌렸다.
이문회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제 더 할 말이 없었다.
이옥당은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고 참아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도 그 똑똑하지 못한 머리를 쥐어짜서 온갖 방법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문회를 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문회가 한 일 중 아무거나 하나만 집어와도 사형감이었다. 이젠 황제조차도 이문회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 이문회가 죽지 않는다면, 문무 집단은 황제의 퇴위가 아니라 황실 전체를 위협할 것이다.
이문회가 어찌 그런 불충불효를 저지를 수 있을까.
이문회는 지난번 사태 때문에 황제가 다시 각혈하게 된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팠다.
주군이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다면, 신하가 주군의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라는 말이 있다.
이문회는 정말로 주욕신사를 스스로 보여줄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일로 문무 집단에게 황제를 공격할 빈틈을 줄 리 있을까.
이문회는 모든 일을 벌이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했다. 곧 허물어질 제국의 서남을 되살리기 위해서, 조금만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죽음만이 이 상황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죽음으로 이연정에게 속죄하고 간청한 것이다.
동창의 주인이자 의부인 이연정의 뜻을 거슬렀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의자 두변의 천재성을 인정해주고, 그에게 장차 엄당을 이끌 후계자 자격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옥당이 격분했다.
“으아악! 제국을 좀먹는 벌레 새끼들은 잘만 살아있는데, 왜 제국을 위한 충신들만 이런 죽음을 맞이해야 한단 말이야. 이게 무슨 도리냐?”
이옥당이 손바닥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치면서 소리쳤다.
“이런 대녕 제국은 차라리 망하면 그만이다. 뭐하러 구한다고 목숨까지 내던져?”
이문회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이 없었다.
짝!
이옥당이 자신의 따귀를 때렸다.
그가 욕한 대녕 제국은 천윤제의 제국이었다.
천윤제가 혼군이라 묻는다면, 그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현명하고 인자한 성군이요, 명군이었다.
어느 왕조라도 언젠가 멸망할 수는 있겠지만, 대녕 제국은 적어도 지금, 이런 방식으로 멸망할 수 없었다.
대녕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면, 달단족이나 건로, 여씨의 성화 제국이 절대로 중원지역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때가 되면, 중원 지역의 문명이 통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문무 집단이 천하를 손에 거머쥐게 되고 황족 영씨 가문을 내쫓는다 한들,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인가?
그들이 마주하게 될 건, 호족들이 판을 치고, 이익 관계고 뭐고 할 것 없이 자기라도 살겠다고 사분오열하는 결말일 것이다.
대녕 제국이 곪을 대로 곪은 건 맞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인자한 천윤제가 제위하고 있고, 그가 있는 한 중원지역이 위태롭긴 해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
문무 집단의 거물들이 황제가 피를 토할 지경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황제의 무게를 감당한 적이 없어서였다.
이문회는 제 입술을 깨물면서 많은 말을 삼켰다.
폐하, 신 이문회는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천하에 폐하가 계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