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장. 살기
제자리에서 움찔거리는 학생들은 있었지만 앞으로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또 내 앞을 막을 거라면 좀 빨리 나와줬으면 좋겠다. 아직 내가 피를 흘리고 있는 터라 어서 가서 지혈해야 하니.”
살인 경고처럼 들리는 이문회의 말에 이젠 아무도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없으면, 먼저 간다.”
이문회가 짧게 말을 남긴 뒤, 일천여 명의 동창 무사를 이끌고 축무애를 체포하여 위풍당당하게 남해도장을 떠났다.
이문회와 동창 무사들이 멀리 간 걸 확인한 뒤에야 한 학생이 소리죽여 외쳤다.
“제국과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엄당 놈들을 숙청해야 한다!”
뒤이어 수십, 수백 명의 학생이 이 말을 따라 외쳤다.
“제국과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엄당 놈들을 숙청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렇게 수십 번을 외친 뒤에야 몸이 따듯해지면서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외치던 그들은 정의와 용맹을 되찾은 것마냥 뿌듯해했다.
광서 환관 학원.
궁술 시험장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친 거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궁술을 할 수 있어? 유목 민족이 아닌 이상 저 정도로 기마 궁술을 잘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역대 최고 점수가 12점인데, 또 만점을 받아?
두변은 규정된 시간의 반의반도 제대로 쓰지 않았고, 힘도 들이지 않고 시험을 끝마쳤다. 마치 목표물을 제 코앞에 가져다 고정시켜 놓고 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형국이었다.
천재, 요물, 또 무슨 단어로 그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때, 한 수험생이 넋이 나간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두변 대사, 진짜 대단하시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당엄은 피를 토할 지경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두변이 언제부터 대사 소리를 들었다고! 대사라는 호칭은 나 당엄의 전용 호칭 아니냐!
현대 지구였다면 이런 대사를 했을 것이다.
팬이면 팬답게 정조라는 게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두변 대사’라는 말을 들은 주위의 다른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야. 진짜 대단하다.”
몇백 명의 학생들이 두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선망과 흠모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가 잘나도 너무 잘나면, 사람들은 오히려 질투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이 지구나, 저 지구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예를 들면, 옆집 남자의 연봉이 삼천만 원인데 당신의 연봉이 일억 원이라면 옆집 남자가 충분히 당신을 시기 질투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옆집 남자는 당신 같이 못생긴 사람이 무슨 일억씩이나 버냐며 아니꼽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 연봉이 10억이라면, 이웃 사람의 시기 질투는 온데간데없어질 것이고, 당신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거나, 심지어 당신을 자랑으로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옆집 남자는 당신이 이룬 것을 제 평생에 걸쳐서도 못 이룰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두변도 학생들에게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아예 급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시기 질투도 느끼지 않고, 오직 선망을 가질 뿐이다.
당엄은 조용히 주먹을 힘껏 쥐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자기 차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드시 두변과 같은 만점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꼬박 한 시진이 지난 뒤 드디어 당엄의 차례가 되었고,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졸업 시험이 당엄과 두엄의 운명의 결전이 된 이후부터 모든 학생이 그들의 승패에 초집중했다.
당엄이 말을 타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마리 야생닭이 푸드덕거리고, 기마 궁술 시험이 시작되었다.
당엄이 정신력을 집중하고 목표물을 고정한 뒤 화살을 쏘았다. 당엄의 정신력이 워낙 남다른지라, 두변은 불가능했던 목표물 고정이 그는 가능했다.
슉, 슉, 슉, 슉.
당엄은 두변처럼 빠르게 연달아 모든 화살을 쏘아냈다.
당엄은 자신의 천리마를 타고 30초 만에 화살을 다 쏜 뒤에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었다.
하지만 당엄이 간과한 게 있다면, 그에게는 영종오 대종사라는 스승이 없었고 당연히 시간 완행술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비록 당엄의 정신력이 두변보다 강해서 활쏘기의 정확도와 숙련도가 훨씬 뛰어난 건 맞지만, 만점을 받지는 못했다.
닭 두 마리가 급소를 맞지 않아서 숨이 붙어있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을 맞고서도 피만 흘리면서 더욱 푸드덕대는 야생닭 때문에 시험장 바닥이 피와 깃털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엄 기마 궁술 시험 끝. 열다섯 마리 모두 명중했지만, 열세 마리만 즉사하였으므로 총 14점 득점!”
시험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이 또 한 번 헉 소리를 냈다.
14점이라는 점수는 역대 최고 점수를 2점이나 앞선 점수이고, 절대로 쉽게 따낼 수 없는 점수인 건 맞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엄이 두변에게 졌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기마 궁술에서 두변은 만점 15점을 기록했고, 당엄은 14점을 기록했다.
당엄을 향하던 선망의 눈동자들이 모두 두변을 바라보게 되었다.
현대 지구의 말로 표현하자면, 당엄은 눈앞에서 팬들이 실시간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걸 직관하고 있는 셈이었다.
환관 학원의 학생들은 두변이 어떻게 저렇게 잘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보기엔 잘났으니까 선망하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시험 점수를 알게 된 당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늘 여유가 묻어나던 당엄의 표정에 처음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현재 당엄의 총점은 311.5점, 두변의 총점은 300점이었다.
궁술 시험 이후로 당엄과 두변의 점수차가 11.5점이 되었다.
두변이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도 무척이나 힘겹게 당엄과의 점수 차를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를 떠난 당엄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환관 학원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봉우리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산장 왕굉이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엄이 충분히 뛰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두변이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뛰어난 것이라 위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졸업 시험의 세 번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오전엔 기마, 오후에는 잡학 시험이 치러지고, 두 과목 모두 50점 만점이었다.
두변이 당엄을 이기고 싶다면, 어떻게든 11.5점의 점수차를 없애고 그를 앞서야만 했다.
특히 오늘 시험에서 두변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 시험은 기마 시험이었다. 정신 기마술을 할 줄 알고 여천천과의 경마 시합에서도 이긴 경험이 있으니, 기마 시험에서 또 한 번 당엄을 뛰어넘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환관 학원의 기마 시험 경주장은 약 5킬로미터 거리로, 여천천과 시합을 했던 단혼 구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평이했다. 굳이 비교한다면, 이곳은 저 노장군의 낭군 부대 훈련 경주장과 비슷하다 할 만했다.
경주장 구간은 순서대로 계곡, 산언덕, 강, 장애물 구간으로 총 네 개로 구성되어있었다.
전체 구간을 일각 내에 완주해야 하고, 시간을 제일 짧게 쓴 사람이 만점 50점을 가져가게 된다.
그 뒤로 2등, 3등은 아무리 훌륭한 모습으로 완주를 했다고 해도 속도가 1등보다 느렸다는 이유로 각각 45점, 40점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4등 이후로도 모두 완주 시간 순위에 따라 차등으로 점수를 받게 된다.
기마 시험에서는 만점자가 오직 한 명뿐이니, 두변이 꼭 1등으로 완주해야 하고, 그래야만 당엄을 5점 이상 쫓아갈 수 있게 된다.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5점이니, 두변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기마 시험에서 두변이 1등만 하게 되면, 두변과 당엄의 점수차는 6.5점까지 좁혀진다.
두변은 어떻게든 기마 시험에서 1등을 해야만 했다.
이백여 명의 수험생이 말을 탄 채로 기마 시험의 출발점에서 시작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두변의 천리마와 여천천에게서 내기로 얻어 낸 한혈보마는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야생마를 타야 했다. 물론 야생마도 그를 따라 십여 일을 쉬지 않고 달린 터라 상태가 최적의 상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졸업 시험에서 한 번에 당엄을 5점이나 따라잡을 수 있는 게 기마 시험뿐인지라, 두변은 야생마가 아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두변은 자신에게 천재 영종오 대종사라는 사부가 있고, 사부의 비적 덕분에 여천천도 이겼으니 다른 사람도 거뜬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정신 기마술은 거의 무적에 가까우니까!
당엄의 기마술도 무척 뛰어나지만, 정신 기마술 앞에서는 그도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겠는가.
“시작!”
시험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백여 명의 수험생이 각양각색의 준마를 타고 맹렬히 돌진했다.
당엄처럼 수년을 함께 한 말을 탄 수험생도 있고, 두변처럼 우연한 기회로 만난 말을 타는 수험생도 있지만, 대다수는 환관 학원에서 제공하는 준마를 탄 터라 서로 교감할 시간이 없었다.
기마 시험은 처음부터 두변과 당엄의 각축전이었다.
두 사람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먼지 두 줄기가 한 번에 올라왔다.
출발선부터 첫 번째 관문까지는 평지 1킬로미터였다. 당엄은 두변에게 뒤처지긴커녕 그보다 좀 더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몇천 리 길을 쉼 없이 달렸던 야생마는 피로가 덜 풀려서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야생마는 태생이 무척 거만한지라, 자기를 제친 말이 있는 데다 그 말이 전혀 뭔가를 하고 싶지 않은 수컷이라는 사실에 분개하며 뒷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봐, 친구. 워워, 화내지 말고 진정해. 이따 어려운 관문에 도착하면 그때 저 자식을 짓밟아 주면 돼. 그때 저놈에게 제대로 된 사람 되는 법을 우리가 가르쳐주자고. 아니지, 제대로 된 말이지, 말.”
두변이 정신 파동으로 야생마왕과 교감했다.
이제 두변은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아도 언제든 말과 정신 파동으로 교감할 수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단둘이서 몇 날 며칠을 함께 하며 고생했던 터라 이미 정신적 공감대가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변이 예상했던 것처럼, 당엄은 첫 번째 관문인 1킬로미터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말의 속도를 늦췄다. 평지가 아닌 이상, 기수가 말의 속도를 늦추는 건 말이 다칠까봐 하는 가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두변은 야생마의 속도를 늦추긴커녕 말에 박차를 가했다.
속도를 더욱 높인 야생마는 계곡과 구덩이가 가득한 곳에서도 마치 평지에서 달리는 것처럼 모든 함정을 완벽하게 피했다.
피융!
두변과 야생마가 당엄의 곁을 가뿐히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말을 타고 달리던 당엄의 귓가에는 강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뿐이었다.
당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제야 왜 여천천이 두변에게 졌는지 깨달았다.
둘만의 싸움이 금세 두변 혼자만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곧 두변은 당엄을 흔적도 없이 떨쳐 버리고 사라졌다.
역시 필승의 싸움이었다.
두변은 시작하자마자 당엄을 이겼고, 당엄은 속수무책으로 하염없이 뒤처져만 갔다.
야생마는 한 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뒤, 곧바로 두 번째 관문인 해발 200미터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야생마는 눈앞에 나무가 있든 바위가 있든 전혀 개의치 않고 속도를 올려서 질주했다. 게다가 경사를 봐가면서 길을 고르는 것도 아니고, 여천천과의 시합 때처럼 가장 가파르면서 가장 짧은 거리를 내달렸다.
기마 시험 최단 기록은 현대 시간으로 23분이었다.
산비탈을 거침없이 오르는 야생마를 보아하니, 두변은 자신이 그 기록을 깨고도 남을 거라고 예상했다. 지금 두변은 역대 최단 기록을 몇 배로 줄일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불과 30여 초만에 산 정상에 오른 야생마는 곧바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두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두변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짝 낮추고 무언가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