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장. 핏빛 남해도장
대녕 제국의 번왕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남에게 혹시나 약점이 잡힐까 봐 사리고 또 사리면서 사는 부류이다. 대표적으로는 계왕이 있는데, 특히 그의 아들 영충요는 조심스러운 수준이 아니라 겁이 많고 그야말로 주눅이 들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대개 이런 번왕은 현왕이라고 칭송받는다.
두 번째 부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는 부류였다. 직접적인 권력은 없지만 황실의 귀족이니, 자기가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길 어쩔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통 명성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다른 지구의 중국 명조 시대의 번왕들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번왕이 절반, 그리고 신분만 믿고 날뛰는 번왕이 절반이었다.
정강왕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번왕이었다. 그는 극히 좁은 자신의 영지에서 온갖 사치와 욕망을 채우면서 살았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草芥)만도 못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반역을 일으키지도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도 않는지라,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강왕의 아들인 영충욱은 그런 부친에게서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들뿐이니, 하는 짓도 정강왕과 비슷했다.
영충욱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축무쌍을 좋아했다. 하지만 영충욱이 여태 무슨 짓을 해도 축무쌍이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지라, 영충욱은 이번이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서 미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문회, 귀가 먹은 것이냐! 황실 귀족 자제 앞에서, 조정의 친왕 아들 앞에서 감히 말을 타고 있어? 반역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면, 당장 말에서 내려와서 내게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하거라.”
영충욱은 잔뜩 어깨가 치솟아서는 호통을 쳤고, 득의양양한 얼굴로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축무쌍이 자신의 활약을 지켜보길 바라고 있었다.
이문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축무애가 정말로 영충욱을 인간 방패로 내세울 줄 몰랐다.
이문회는 계왕의 아들 영충요의 나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만방자한 정강왕 일가의 횡포에는 더욱 통탄했다. 정강왕 같은 번왕은 황실의 평판을 손상시킬 뿐이었다.
엄당이 황실의 가노라는 영충욱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남공 송결의 조상이 태조 황제의 의자인지라, 송결도 엄당의 반쪽자리 주인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정강왕 일가는 황족의 피가 섞인 만큼, 엄당이 그들을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건 맞았다.
황실에 대한 이문회의 충심은 두말할 것도 없는지라, 이문회가 순순히 말에서 내려와서 말했다.
“공자, 신은 폐하의 뜻을 받들어 축무애를 체포하러 온 것이니, 공무 집행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폐하의 뜻이라고? 그럼 지의를 내게 가져와 봐라.”
영충욱은 이문회가 말에서 내려온 걸 보고는 더욱 거만한 태도로 손을 뻗었다.
“송구하오나, 신(臣)은 폐하의 지의를 공자께 보여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이문회가 말했다.
물론 황제의 지의에는 결코 축무애를 잡아들이라는 말이 없었다. 대신 지의에는 광서의 형세가 어지러우니, 이문회는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고 편의행사(便宜行事: 재량권을 위임 받아 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다.)하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사실상 누구를 잡아들이라는 말보다, ‘편의행사’가 적힌 지의가 더욱 큰 살상력과 파급력을 가진다. 황제는 이번 일로 화가 단단히 나서 이문회에게 ‘편의행사’라는 권한을 준 것이다.
“신? 엄당 환관 주제에 신이라고? 엄당은 대녕 제국 영씨 가문의 개새끼이거늘, 어찌 자신을 노비라고 칭하지 않고 신이라고 칭하는 것이냐. 노비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 내 앞에서 신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라.”
영충욱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이문회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이문회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천윤제가 그에게 신이라는 호칭을 하사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천윤제는 많은 사람 앞에서 이문회는 노비가 아니라, 고굉지신(股肱之臣: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 충신)이라고 말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영충욱이 황제조차도 노비 취급하지 못하는 이문회를 노비 취급하는 중이었다.
“여봐라. 저 공자를 옆으로 모셔두어라.”
이문회가 명령을 내린 뒤 다시 말에 올라탔다.
동창 무사 두 명이 영충욱에게 다가갔다.
정강왕 아들 영충욱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그가 검을 뽑아 들고 이문회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이문회, 엄당의 개새끼 주제에 주인을 물려고 해? 친왕의 아들인 내가 네놈을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내 기필코 네놈의 의자 두변도 사지를 절단 내고 머리를 잘라서 축무쌍 소저에게 바치겠다.”
이문회는 번왕의 자제가 아무리 오만방자해도 세 걸음 뒤로 물러나서 화를 삭이곤 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어도 번왕 자제가 황실의 일원이니, 엄당이 그를 주인 대접 해줘야 하는 게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충욱이 감히 두변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이문회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축무쌍에게 눈이 먼 영충욱은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말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이문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더니, 영충욱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보잘것없는 엄당 학생 한 명 죽이는 건, 개 한 마리보다 죽이기 쉽지. 내가 있는 한 이문회 네놈은 이곳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한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넘어섰다간, 내가 네놈을…….”
영충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문회가 갑자기 말을 탄 채로 그를 향해 돌진했다.
“아악!”
이문회의 말이 영충욱을 그대로 들이받더니 말굽으로 그를 밟고 지나갔다.
콰드득.
영충욱의 골반과 갈비뼈가 말굽에 밟혀서 으스러지고, 그의 두 다리는 바깥으로 꺾인 채로 부러졌다.
영충욱은 놀라기도 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워서 악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혼절한 영충욱이 똥오줌을 지리면서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탑루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축무애가 화들짝 놀랐다.
이문회 저놈이 감히! 무려 번왕의 자제를!
문무 집단이 나약하기로 유명한 계왕 세자 영충요를 무시하긴 하지만, 황실 귀족인 그를 털끝조차 건드릴 수는 없었다. 번왕 자제를 만나게 되면, 축무애, 순무 낙문, 심지어 진남공도 허리 숙여 예를 올려야 했다.
그런데 황실 가노인 이문회가 정강왕의 아들을 말로 들이받고 밟고 지나갔으니, 그 행동은 엄당의 반역으로도 보이기에 충분했다.
대문 앞까지 바짝 다가간 이문회가 소리쳤다.
“축무애, 너를 광서 참장 임효를 선동하여 주둔군을 사사로이 동원한 죄로 체포한다.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할 것이다.”
탑루 위의 축무애가 냉소를 지었다.
“이문회, 공적인 일로 사적인 원한을 푸는 사람은 자네지. 내가 광서 참장을 선동해서 제국의 군대를 임의로 사용했다고? 증거 있나? 나를 잡겠다는 황제의 지의는 어디 있고?”
이문회가 성지를 높이 치켜들면서 외쳤다.
“광서의 형세가 어지러우니, 이문회는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고 편의행사하라.”
축무애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성지 어디에도 축무애 세 글자가 적혀 있지 않나 본데?”
‘편의행사’ 성지는 그 누구의 이름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성지였다. 하지만 이문회는 황제의 명예를 위해 그런 망언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문회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축무애, 지금이라도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면 네 가족은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반항한다면 일족이 위험해질 것이다.”
축무애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큰소리쳤다.
“이문회,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거라. 여기 남해도장의 성벽은 단순히 벽이 아니라, 삼천 명의 무장 학생들로 이뤄져 있다. 나를 잡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로 이뤄진 이 성벽부터 깨부숴야 할 것이다.”
이문회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축무애의 체포를 막는 사람들은 정규 군대가 아니라, 도장의 학생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병사들이었다면 벌써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광서의 3대 학부 중 하나인 만큼, 학생들을 상대로 무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문회가 남해도장의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건, 국가의 특무 기관이 평범한 대학교에 쳐들어가서 학생들을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이문회가 치러야 할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이문회가 받을 정치적 타격은 여씨 가문의 관서 거점을 모조리 들어냈을 때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남해도장으로 공부하는 학생 대부분은 제국의 남쪽에 있는 권문세가 귀족 집안 자제들인지라, 그가 맞을 후폭풍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문회가 만에 하나 여기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남해도장은 짧은 시간 내로 핏빛 도장이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다시 한 번 제국을 발칵 뒤집을 것이다.
이문회가 다시 한번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남해도장의 삼천 학병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외쳤다.
“여러분! 축무애는 광서 참장을 선동하여 사적으로 제국의 군대를 동원했다. 제국의 군대를 사적으로 쓰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이니, 남해도장의 우수한 청년들이 그런 사람을 감싸주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퉤!”
누군가가 성벽 위에서 이문회를 향해 침을 뱉었다.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이문회를 향해 삿대질하며 그를 욕했다.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엄당 놈. 이곳에서 썩 꺼지지 못할까!”
이문회가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축무애가 광서 총병관을 부임하던 시기에 군사비 오십만 냥 은자를 빼돌렸다. 그가 빼돌린 군사비로 인해 수백 명의 병사와 그의 가족들이 급료를 받지 못했고, 수많은 이들이 굶주려 죽었다.
그리고 축무애는 집안의 자제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탓에, 자제들이 병사들의 아녀자를 욕보인 것을 방종하여 일곱 명의 무구한 여인들이 자결했다. 축무애가 그런 사람인데도 내 앞을 막아서겠다는 건가!”
남해도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엄당 놈. 이곳에서 썩 꺼지지 못할까!”
탑루 위의 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문회는 가슴이 아팠지만, 마지막 희망을 걸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축무애가 매년 대량의 군량을 빼돌려 여씨 토사에게 팔았고, 여씨 토사와 작당하여 제국의 소금과 철을 대량으로 적국에게 납품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자인데도 그를 보호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엄당 놈, 이곳에서 썩 꺼져라!”
마지막 희망을 건 이문회에게 돌아오는 말은 결국 똑같았다.
이문회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정녕 이런 자들이 바로 광서 최고 학부의 청년 인재들이란 말인가. 어째서 이들은 정의를 모르고, 매국 행위를 이렇게 묵과하는 건가!’
이문회가 다시 눈을 뜨고 말 위로 올라탔다. 그는 성벽 위에 서 있는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본 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남해도장이 공립은 아니지만, 너희들이 먹는 쌀과 입는 옷은 모두 제국의 세금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매년 국고에서 남해도장을 위해 쓰는 예산이 십만 냥이 넘고, 만 묘에 달하는 이곳도 조정이 내어준 땅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제국을 위해, 황제를 위해 보답하는 게 고작 이런 것인가? 어찌 이리도 오만방자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한 치의 애국심이 없단 말인가?”
만약 남해도장의 학생들이 평민 출신이었다면, 이문회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남해도장의 학생들은 귀족 집안 자제인지라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고, 일찍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는 걸 깨우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청년임에도 벌써부터 가족과 자신의 이익이 제국의 이익보다 훨씬 앞선 지 오래였다.
대녕 제국이 망조를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아는 남해도장의 학생들은 이 와중에 애국심 타령하는 이문회가 참으로 한심하고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