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장. 사륭 토사부
사륭 토사부라는 호칭은 제국의 입장만 고려한 것이지, 절대로 사륭 토사부가 인정해서 그렇게 불리는 건 아니었다. 사륭석은 늘 자신을 사륭 대왕이라 자처했다.
두변의 시야에 사륭 토사부의 대문이 들어왔다.
머리 아홉 달린 뱀이 조각되어있는 거대한 돌문은 높이가 족히 십여 미터는 되어 보였고, 어찌나 정밀하게 조각되었는지 머리 아홉 달린 뱀은 멀리서 보아도 소름 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두변이 사륭 토사부의 대문 앞에 멈춰 서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이 그를 포위했다. 동시에 숲속의 수풀에서 수백 마리 독사가 나와서 두변을 에워쌌다.
두변을 포위한 사람들은 원시 부족처럼 거의 벗고 있었고, 몸에는 온갖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양은 하나이지만, 표현된 방식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몸에 큼직하게 새긴 문양은 구두사(九頭蛇)였다. 구두사는 사륭 토사부의 절대 표식이자,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었다.
척, 척, 척, 척.
수백 명이 두변을 향해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쓰는 화살은 일반적인 화살이 아니라, 짐승의 뼈를 깎고 갈아서 만든 화살이었다. 화살촉 하나 제대로 된 것을 쓰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사륭 토사부지만, 그들이 만든 화살에는 모두 시퍼런 독이 묻어 있었다.
두변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말했다.
“사륭 대왕을 뵈러 왔습니다. 금자도 가지고 왔고요.”
두변이 조심스럽게 한 손을 내리고 허리춤에 걸려 있던 주머니를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떨궈진 주머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금원보 열댓 개가 쏟아져 나왔다.
역시 어딜 가나 황금만큼 말이 잘 통하는 물건은 없나 보다.
잠시 뒤, 두변을 둘러쌌던 무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변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있는 사륭 대왕 동부(洞府: 동굴)로 향했다.
‘이곳이 바로 사륭 대왕 동부라고? 진짜 엄청나게 크잖아!’
두변의 시야에 들어온 사륭 대왕 동부의 모습은 이러했다.
사방에 각종 짐승의 뼈와 인간의 해골 등이 가득했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수많은 독사가 몸을 미끄러트리며 뼈와 해골 사이를 유유히 오가고 있었다.
두변은 사륭 토사부가 굉장히 원시적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동부 안에는 멀쩡한 가구 대신, 커다란 나무나 돌덩이를 깎아서 만든 의자나 석판 등이 다였다.
이는 사륭 토사부가 대왕이 쓸 제대로 된 가구 하나조차 사지 못할 만큼 궁핍하다는 건 아니고, 사륭 토사부가 자연적인 것을 숭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변은 수많은 독사들 사이에 갇혀서 사륭석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족히 반 시진이 지난 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이 동부 안으로 들어왔고, 고개를 든 두변은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 지금 내가 귀신을 본 건가?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아니, 아무리 살아있다고 해도 여기서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여긴 사륭 대왕의 동부인데?
화려하게 치장을 한 여인이 두변 앞에 멈춰서서는, 그를 쳐다보면서 냉소했다.
“두변, 내가 살아있었을 줄은 몰랐겠지. 그리고 이곳에서 나를 마주칠 거라는 건 상상조차도 못 했을 테고.”
두변은 정말이지, 이곳에서 이 여인을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병정,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넌 이미 감옥에서 자결했잖아?
“그래. 의아하겠지. 난 이미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는데 말이야.”
두변의 표정을 흥미롭게 보던 최병정이 말했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병정이 이어서 말했다.
“잊었나 본데, 거긴 문관 집단의 감옥이야. 수감자 하나 자결하는 연극은 식은 죽 먹기라고. 지금의 대녕 제국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두변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최병정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두변, 꼭 기억해. 네가 직접 죽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죽었다고 믿어선 안 돼.”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최병정 소저, 정말 맞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지금 사륭 토사부에서는 어떤 신분으로 계시는 겁니까?”
최병정이 대답했다.
“네놈 덕분에 내가 이제 대녕 제국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거든. 부친께서 나를 사륭 대왕에게 선물하셨고, 난 이제 그의 비(妃) 중 하나가 된 거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인 최병정이 사륭석의 비가 됐다고 하니, 두변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애매하기만 했다.
최병정이 처량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난 대녕 제국 명문 가문의 미인이니, 당연히 이곳 여인들과는 다르겠지. 그래서 내가 사륭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비가 되었고, 사륭 대왕이 나를 한시도 놔두지 않을 정도로 아껴주거든.”
하지만 이 말을 할 때 최병정은 행복해하기는커녕, 살기 어린 상태로 이를 악물고 있는 표정이었다.
“두변, 난 네놈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갈면서 밤낮을 보냈다.
네가 살고자 해도 살 수 없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겪길 바라거든. 열흘 전, 이륜이라는 엄당 잡종이 여길 왔더군. 그놈이 사륭 대왕을 찾아와서 오십만 은자를 줄 테니, 병사들을 이끌고 여씨 토사부의 영역을 침범하라고 하더군.”
‘이제야 말이 되네. 의부께서 제일 중요한 임무를 의부의 사형인 이륜에게 주었는데, 이곳에 최병정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최병정이 말했다.
“이륜이라는 자의 무공이 굉장하더군. 사륭 대왕이 족히 열댓 명의 고수를 잃으셨으니 말이다. 넌 지금 궁금하겠지. 오십만 냥 은자라는 거액을 보고도 사륭 대왕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말이야.
그 돈이라면 얼마나 많은 소금과 철과 식량을 사들일 수 있겠어? 오십만 냥 은자라면, 사륭 대왕이 벌써 병사들을 이끌고 여씨 토사부를 깨부수러 갔을 텐데, 왜 그러지 않으셨을까?”
두변은 뭔 말인지 이해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병정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중간에서 너희 계획을 틀어지게 했거든. 내가 사륭 대왕께 엄당에서 오십만 냥 은자를 꺼낼 일이라면, 문관 집단에선 육십만 냥 은자를 낸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륭 대왕께서 움직이지 않으셨던 거지.”
이어서 최병정이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씨 가문의 적자이자 광서성 향시 해원 최부가 이를 부득 갈면서 두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최씨 가문이 박살나게 된 이유 중 절반은 두변 때문이니까.
최부가 험상궂은 얼굴로 두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두변, 나는 네가 뭘 하려고 여길 온 건지 안다. 사륭 대왕이 여씨 토사부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면,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킬 수 없게 되고, 그럼 이문회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길 온 거겠지.
하지만 그만 백일몽에서 깨어나라고 조언해주고 싶군. 사륭 대왕은 이미 우리 문관 집단과 거래가 끝났다. 육십만 냥 은자를 받는 대가로 여씨 토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거래 말이다.
그러니 여여해는 예정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네 의부 이문회는 죽은 목숨이다. 이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이문회를 구할 수 없어. 그게 너여도, 황제여도 말이야.”
최병정이 또 손뼉을 한 번 쳤다.
사륭 무사 두 명이 누군가를 양쪽으로 잡고 질질 끌면서 동부 안으로 들어왔다.
끌려온 사람은 환관복을 입고 있었고,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두변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사륭 대왕과 협상하러 왔던 이문회의 사형, 이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두변이 무표정한 얼굴로 최병정과 최부를 쳐다보았다.
이때,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동부 내에 있던 모든 사람과 독사가 몸을 바짝 바닥으로 낮추었고, 최부와 최병정도 서둘러 몸을 엎드렸다.
거구의 사내가 동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두변은 살면서 이렇게나 큰 키를 가진 사내를 본 적 없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의 키가 족히 2.2미터는 돼 보였다.
사내는 그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한 번 묶어서 허리춤까지 늘어뜨렸다.
사내는 상반신은 노출한 채 뱀가죽 바지만 입고 있는데, 강철처럼 탄탄한 가슴 근육에는 진짜처럼 생긴 구두사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하고 근육질 몸매를 가진 그는 의외로 몹시 준수한 용모였지만, 두 눈만은 독사의 눈빛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이 사내가 바로 사륭석이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차갑고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최병정은 뱀처럼 사륭석의 탄탄한 팔을 감싸 안으면서 그에게 달라붙었다.
“대왕, 저자가 바로 제가 말했던 두변이라는 놈입니다. 신첩이 저놈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정조를 잃을 뻔했다니까요? 당장 저놈을 죽여주세요. 능지처참하고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시라고요.”
사륭 대왕이 두변에게 다가가 조금 어색한 대녕 제국 말로 물었다.
“낯선 자, 이곳엔 무슨 일이지?”
두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륭 대왕, 여씨 토사부를 공격해 달라고 청하러 왔습니다.”
사륭 대왕이 말했다.
“엄당에서 오십만 냥 은자로 나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다른 쪽에서 육십만 냥 은자를 줄 테니 여씨 토사를 공격하지 말라는 제안을 했다. 난 이미 다른 쪽과 거래를 했고, 나 사륭석은 오직 한 곳과 거래를 한다. 그리고 한쪽과 거래하기로 했으니, 다른 한쪽은 죽인다.”
사륭석이 갑자기 허리춤에 있던 곡도를 꺼내서 두변의 목을 겨눴다.
“열 글자가 넘지 않는 선에서 나를 설득해라. 만약 날 설득할 수 있다면, 난 다른 쪽을 죽일 것이다. 설령 그게 내 애첩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날 설득할 수 없다면, 네놈을 죽일 것이다. 꼭 명심해라. 열 글자가 넘지 않아야 한다.”
어색한 사륭석의 말투에는 단호함과 결의가 가득했고, 독사같이 차가운 눈빛은 두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륭석은 한 번 뱉은 말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을 사내 중의 사내였다.
이건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할 만한 자의 패기였다.
그의 말을 들은 최병정이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고작 말 한마디로 어떻게 사륭석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사륭석 같은 패왕은 한 번 결정을 하면 절대로 타의에 의해 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열 글자 이내로 그의 마음을 돌리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두변이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한 글자씩 뱉었다.
“구두사 신의 지의(旨意)입니다.”
정확히 열 글자였다.
구두사 신은 사륭 토사의 절대 신앙이자, 유일신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몸에 구두사 문신이 새겨져 있고, 사륭 토사는 구두사만을 섬기기 때문에 성화교가 사륭 토사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대왕,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대왕, 더 살려둘 가치도 없어요. 얼른 이놈을 죽여서 신첩을 위해 분풀이를 해주셔요.”
최병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사륭석 대왕이 두변을 잠시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씨 토사부를 공격하는 게 구두사 신의 지의라는 게 확실하냐.”
두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사 신의 지의임이 확실합니다.”
사륭석 대왕이 말했다.
“날 따라오거라.”
사륭석이 동부의 뒷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 뒤로 두변은 물론 최병정과 최부도 따라갔다. 그런데 최병정과 최부의 얼굴에는 사악하고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동부의 뒷산에 도착한 사람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동굴 앞에 멈춰섰다.
질식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심연 동굴 입구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의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