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장. 성화 마녀의 부활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제단을 감쌌다.
제단 아래 서 있던 수십 명의 사제가 다시 광기 섞인 춤을 추면서 지옥에서 온 듯한 주문을 중얼거렸다.
이때, 제단 위 불길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나중엔 밤하늘을 닮은 시커먼 검정으로 변했다.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암흑색의 불길을 본 수십 명의 토사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화교의 대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언에서 말한 그 암흑 화염입니다. 암흑 화염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제단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대사제가 말하는 성화교의 예언은 제국의 서남부에서 이삼백 년도 넘게 전해져 온 것이었다.
‘암흑 화염이 나타나게 되면, 죽은 자가 부활하여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炎國) 천하를 이룬다.’
성화교는 서역에서 전해진 종교이고, 서역 십여 개 나라의 국교였다.
서역 땅을 통일한 성화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황실, 문관, 무관 등이 성화교를 견제하여 압박한 터라, 성화교는 순조롭게 전파되지 못했다.
하지만 서남 토사 연맹의 영지에서는 성화교가 매우 번창하게 되었고, 특히 여여해의 도움으로 성화교 사제들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사제가 말한 예언은 270년 전부터 세간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천하는 통일되지 않은 채로 각국이 서로의 영토를 빼앗았고, 성화교도 이 예언을 토대로 서남에서 권력 쟁탈에 참여했다.
하지만 당시에 대녕 제국 태조가 십여 년 만에 혼란을 잠재우고 제국을 통일시켰다. 그 뒤로 성화교는 쥐 죽은 듯이 지내야만 했고, 성화교의 예언도 시간과 함께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성화교의 예언이 갑자기 다시 전해지기 시작하더니, 제국의 서남 지역 사람이라면 모두 알 정도로 널리 퍼졌다.
물론, 예언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널리 퍼졌든, 여태 이 예언이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예언의 첫마디인 암흑 화염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되자, 누군들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암흑 화염만으로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특수 재료를 쓰거나, 특수 연단을 써서 암흑 화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예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녀의 부활이었다.
성화교는 사람이 죽은 뒤에 시신을 제단에 올려서 화장하는 게 전통이었다.
예언에 따르면, 누군가가 제단의 큰 불길 속에서 부활할 것인데, 그 사람은 화신(火神)이 고른 사자(使者)일 것이며, 성화교의 최고 권위자가 되는 동시에 모든 왕후와 재상도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화신의 사자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바로 성화교가 천하를 통일하고, 염 제국을 건립할 때라고 되어 있었다.
‘암흑 화염이 나타난 것에 그치지 않고 예언의 두 번째 조건도 실현될까?’
제단 광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고 암흑 화염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암흑 화염 속에서 붉은색의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났다.
신비로우면서 오싹한 붉은색 그림자는 굴곡진 몸매를 가진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암흑 화염을 맨발로 밟으면서 불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인이 입은 붉은색 옷이 꼭 맹렬한 불꽃처럼 시선을 강타했다.
그윽한 눈매와 어딘가 요염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이 세상 사람을 전부 다 홀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죽었던 여천천이 사람들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는데,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뱉었다.
암흑 화염 속에서 사람이 부활한다는 예언이 실현되었구나!
기적이다! 이건 기적이라고!
하늘의 뜻이다. 이건 화신의 계시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여천천의 가슴에 났던 큰 구멍을 봤었고, 핏기 하나 없이 송장이 되었던 여천천을 보았었다. 이곳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은 여천천이 죽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산 증인들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죽은 사람인 여천천이 살아서 다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여천천은 불 속에서 열반한 봉황처럼 더 아름다워졌고 신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신이 고른 사자, 성녀가 부활한 것이다!
여씨 토사 여여해는 꿈에서 막 깬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성화 마녀를 뵙습니다.”
이어서 성화교의 대사제와 사제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성화 마녀를 뵙습니다!”
성화 마녀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꼭 사람을 꿰뚫을 것처럼 마력을 지닌 눈매가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수십 명의 토사는 차마 성화 마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큰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성화 마녀를 뵙습니다.”
제단 광장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성화 마녀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성화 마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 천하를 이루어라.”
성화 마녀의 목소리는 신선의 목소리 같기도, 악마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리게 했다.
여여해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 천하를 이루소서!”
성화교 제사들도 복창했다.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 천하를 이루소서!”
수십 명의 토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들을 따라 외쳤다.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 천하를 이루소서.”
몇백 명, 몇천 명의 사람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천지를 뒤바꾸고, 염국 천하를 이루소서!”
이 순간, 대녕 제국의 서남 하늘이 뒤바뀌었다.
성화교의 새로운 절대 지도자가 나타났고, 성화 제국을 건립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성화교가 다시 한 번 천하를 쟁탈할 것이다!
그가 수십 년을 기다려왔던 것도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흩어진 모래알 같던 서남 토사 연맹이 한자리에 모여서 성화교의 화신 사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성화 마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한 시진 뒤, 제단 아래의 밀실 안.
가슴에 구멍이 난 채로 핏기 하나 없는 여천천이 관 속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여천천과 똑같이 생긴 성화 마녀가 조용히 여천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화 마녀의 옆에는 여여해가 서 있었다.
“어쩜 죽은 얼굴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요 몇 년간 아주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설치고 다니던데.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세요? 지금까지 얘가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던 것도 다 아버지의 위엄과 명성 덕이에요.”
성화 마녀가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의 원대한 업적을 위해서 희생하기로 결정되었었잖니.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을 게 정해져 있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마음껏 살다 가야지. 원래대로라면 화염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는데, 갑작스럽게 환관 나부랭이의 손에 죽을 줄은 나도 몰랐다.”
여여해가 말했다.
“전 오늘을 위해서 20년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왔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무공을 수련하고 공부했고요. 드디어 다시 해를 보게 되니까 감격스럽긴 한데, 조금 이른 감이 있네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어요.”
“아비도 알고 있다. 지네가 죽어도 굳지 않는 것처럼, 대녕 제국이 썩어 문드러지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몰락할 때는 아니지.”
“성화 마녀가 세상에 강림하는 최적의 시기는 진남공 송결이 안남 왕국에서 패배해서 죽었을 때예요. 만약 그때 제가 나타난다면, 아버지의 군대가 서남을 휩쓸 것이고, 눈 깜빡할 사이에 몇천 리의 강산을 손에 쥐게 되겠죠. 그때 바로 염 제국을 세우면 되고요.”
“뭐든 내 뜻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
그렇다. 누가 감히 여여해의 딸을 죽일 생각을 할 것이라 예상했을까.
여천천이 갑자기 죽은 탓에 예언 속의 성화 마녀가 이 세상에 강림한 시기가 너무 많이 앞당겨졌다.
여여해는 일생일대의 목표인 이 일을 수십 년 전부터 계획해왔었다.
성화교의 위대한 업적을 위해서라면, 이 일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시기보다 한두 해 앞당겨지긴 했지만, 결국 성화 마녀가 강림하는 장면을 완벽하게 꾸며낸 셈이었다.
20년 전, 여여해의 아내가 쌍둥이 딸을 순산했다. 한 명의 이름은 여천천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름은 여완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쌍둥이 딸을 얻게 되면 마냥 기뻐하겠지만, 여여해는 곧바로 성화교의 예언이 떠올랐고, 엄청난 기회를 손에 쥐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였을까.
거대한 음모를 마음에 품은 여여해는 수백 년 전해져온 성화교의 예언을 실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예언 속의 성화 마녀를 만들어내서 제국의 서남을 통일하고자 했다.
그날 밤. 여여해의 아내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출산할 때 자리에 있던 모든 시녀와 유모도 죽었다. 어쨌든 여여해에게 쌍둥이 딸이 있다는 사실은 그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했다.
그날부터 여천천은 땅 위에서 여여해의 딸로 살았고, 여완완은 지하에 숨겨진 채로 태양도 보지 못하고,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로 자랐다.
여완완은 지하에서 눈이 먼 성화교 대사와 함께 지냈고, 그녀의 무공과 학문, 기술 등은 모두 여여해가 심혈을 쏟아서 직접 가르쳤다.
여완완은 어려서부터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수련에 임했고, 그 덕에 여천천보다 무공과 학문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여천천은 언젠간 불길에 타 죽을 운명이었고, 여여해의 야심을 위한 희생양이 될 운명이었다. 어쩌면 여여해는 양심에 찔려서 어렸을 때부터 여천천을 공주 떠받들 듯이 키운 걸지도 몰랐다. 여완완의 말처럼, 여천천을 안하무인에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성격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여여해였다.
천성이 악독한 여천천이 언젠간 죽는 게 당연했지만, 설마 두변의 손에 죽을 줄은 몰랐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죽을 운명이 결정된 딸이라니.
세상에 이보다 더 가엾은 딸이 있을까.
여천천과 여완완이 쌍둥이이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었다.
우선 여완완이 여천천보다 좀더 아름다웠다.
여완완의 눈매가 여천천보다 더욱 그윽했으며, 몸매도 여천천보다 더욱 풍만했다. 그리고 여완완에게서는 강한 마력을 가진 마녀 같은 분위기가 풍겼으며, 여천천보다 훨씬 더 사람을 매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성화 마녀가 가느다란 손끝으로 여천천의 얼굴을 쓸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톱을 세워서 여천천의 얼굴에 긴 상처를 냈다. 여천천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진 않았지만, 흠잡을 데 없던 얼굴에 큰 흉터가 생겼다.
성화 마녀 여완완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몹시 불쾌했다. 이 세상에 자신처럼 생긴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어야 했다.
“아버지, 대군을 모아 북상을 할 때가 되었어요. 이제 세상을 놀라게 하셔야죠.”
여여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두변은 일단 죽이지 마세요.”
여완완의 말에 여여해가 흠칫 놀랐다.
“왜 그러느냐?”
“두변이 여천천을 죽일 때, 저와 천 리가 떨어진 거리에 있음에도 저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게 왜?”
“아버지는 믿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어젯밤에 제가 두변을 꿈속에서 보았어요. 그리고 그 꿈속에서 보였던 광경이 정말 이상했고요.”
“무슨 꿈을 꾼 것이냐?”
“아주 충격적이고,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그런 꿈이었어요. 그 꿈이 뭘 뜻하는 건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두 세계가 하나로 겹쳐지는 그런…….”
여완완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다가 천기누설이라도 한 듯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근데 꿈속에서 본 사람이 두변이라는 걸 어찌 아느냐? 네가 두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을 텐데?”
“그런 느낌이 있어요. 여천천이 죽었을 때 제가 느꼈던 그런 섬뜩한 느낌이요.”
여완완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두변이라는 자를 만나봐야겠어요. 제가 꿈속에서 본 사람이 두변이 맞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놈의 진짜 신분이 뭔지 알아내고 싶어요. 우리가 이룰 업적과는 무관한 사람이겠지만, 제가 꾼 꿈이 도대체 뭘 뜻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어쩌면 그 꿈이 엄청난 기밀을 뜻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여완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