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40화 (140/648)

140장. 파국이다!

정능이 그를 비웃었다.

“문회 아우, 그냥 하던 대로 하지 그래? 충효를 다하는 모습을 끝까지 보이면서, 아들과 함께 나란히 죽는 건 어떻겠나? 그게 우리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야. 그래야 죽는다 하더라도, 자네의 명성은 길이길이 남을 테니까.”

이문회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자네가 두변을 자네의 역린이라고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지 않나. 그러니 다들 자네의 역린을 건드리고 뽑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게지. 자네가 두변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자네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야.”

이문회가 눈을 뜨자, 눈동자가 이미 온통 붉어 있었다. 그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능, 아무리 내가 싫다고 해도, 어떻게 폐하를 이용하고 심지어 폐하의 뜻까지 그렇게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나? 너는 엄당의 일원이다. 아무리 문관 집단과 무관 집단에 견줄 만한 세력이 됐다고 한들, 어찌 폐하를 농락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은 엄당의 근간을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다. 엄당의 유일한 근간이 폐하라는 것을 모르나?”

정능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이고, 우리가 어찌 감히 그러겠는가.”

이어서 그가 정색하고 말했다.

“엄당이 왜 ‘당’이겠나. 당이라는 건, 독립적인 의지와 강한 힘이 있는 집단이란 뜻이지.”

이문회가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제야 알겠군. 이제야 알겠어. 네놈들은 문관 집단, 무장 집단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황권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로군. 세 세력이 힘을 모아 황권을 우습게 만들고, 폐하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작이겠지.”

정능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황제 폐하를 향한 우리의 충심은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성지를 따르기 위해서 이렇게 눈물을 머금고 같은 파벌인 네놈을 죽이려는 거 아니냐. 우리야말로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간신을 제거하는 충신이지.”

이문회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이문회가 입을 열었다.

“성지를 거역한 역적의 죄목을 내게 씌우겠다고 하였는가. 내 친히 그 청을 들어주지. 정능, 난 네놈의 가족 132명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몰살할 것이다.”

이문회가 섬뜩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면서 외쳤다.

“내가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주마. 죽여라!”

이문회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처절하고 결의에 차서 포효했다.

그때, 곳곳에 숨겨져 있던 지하로 향하는 비밀통로의 입구가 한꺼번에 열렸다.

수천 명의 동창 무사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쿵, 쿵, 쿵, 쿵.

저택의 안팎에서 나타난 수천 명의 동창 무사가 정능과 수백 명의 무사를 몇 겹으로 포위했다.

정능의 낯빛이 사색이 되면서 소리쳤다.

“이문회, 내게는 황제의 성지가 있다. 지금 반역을 일으키려는 게냐!”

이문회가 담담하게 말했다.

“원래는 순순히 압송당해주려고 했지. 하지만 네놈이 내가 성지를 거역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서, 그 청을 들어줬을 뿐이다.”

이문회의 속은 이들 때문에 속이 상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렸다.

이문회가 옆에 있던 수하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이곳에 남은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산동으로 가서 정능의 일족을 멸하고, 조상 무덤을 모조리 파내어 시신을 불태워버려라.

죽이고, 죽여라! 죽여라!”

이문회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면을 쓴 ‘동창 무사’ 천여 명이 활을 들어 화살비를 쏟아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사정없이 어마감 무사들을 관통했다.

어마감 부제독 정능이 데리고 온 사백여 명의 무사가 필사적으로 발악하면서 저항했다. 하지만 자신들보다 머릿수가 몇 배가 되는 ‘동창 무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능이 눈가가 찢어질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 질렀다.

“이문회가 반역을 일으켰다. 역적놈을 죽여라!”

그는 수십 명의 어마감 고수를 이끌고 이문회를 향해 돌격했다.

정능은 머릿속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목표만 생각했다.

‘이문회를 죽여야 한다. 저놈을 죽여야만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어. 우두머리를 죽이면 저놈들도 물러간다.’

“두변을 보호해라!”

이문회가 명령했다.

이삼, 이사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나타나, 두변을 앞뒤로 보호했다.

이문회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수십 명의 고수를 쳐다보면서 섬뜩하게 웃더니, 마치 봉인이라도 풀 듯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부욱 찢어버렸다.

물론 할포단의(割袍斷義: 소맷자락을 자름으로써 절교한다는 뜻)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소맷자락이 길어서 사람을 죽이는 데 걸리적거리기 때문이었다.

“이도진은 좀 버겁다 쳐도, 나 이문회가 고작 어마감의 고수 하나 죽이지 못할까.”

이문회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긴커녕, 맹수처럼 홀로 수십 명의 무사를 향해 돌진했다.

순간, 정능이 흠칫 놀랐다.

이문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명 어마감 고수의 앞으로 다가왔고, 몸 안의 모든 현기를 검에 주입한 후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푸슉! 서걱! 콰직!

무사들은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했다.

이문회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사람의 몸이 댕강 잘렸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베거나, 아예 허리를 반으로 자르거나, 왕설을 죽였을 때처럼 사람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렸다.

최근 몇 년간, 그는 엄당 고위층으로서 직접 나서서 무공을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단 한 순간도 녹슬지 않았다.

푸슉, 쩌억.

홀로 수십 명을 상대하는 모습이, 흡사 양 떼에 들어간 호랑이와도 같았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개나 닭을 죽이듯이 손쉽게 무사들을 찢어버렸다.

이문회는 짧디짧은 1분 만에 정능이 데려온 어마감 고수 30여 명을 모조리 죽였다.

이문회는 검 끝에 뚝뚝 흘리는 피를 털어내지 않고, 자신이 만든 피바다 위에 멈춰 섰다.

정능이 자신의 넓은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천천히 한 발을 뒤로 떼었다. 장검을 들어 겨누니, 고수의 자세가 돋보였다.

“이문회, 내가 환관 학원에서 네놈보다 한 기수 더 위였지. 졸업 시험에서 네가 1등을 했다지만, 나도 1등을 했다. 그리고 내 점수가 네놈보다 1점 더 높았고.”

이문회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선 뒤, 가볍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정능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네놈에게 말해주는 걸 깜빡한 게 있다. 그해 졸업 시험 때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어마감의 권력이 동창만 못하지만, 덕분에 무공에 전념할 시간이 많더군. 너희는 특무 기관이지만, 우리는 병사들을 거느리는 게 일이거든. 네놈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지.”

이문회가 말없이 정능을 바라보았다.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얼굴이 야위었고, 눈 밑이 시커멨다.

오히려 턱을 치켜든 정능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이문회를 거만하게 노려보았다.

“이문회, 네놈이 황제의 벗이고 이연정의 의자이니, 내가 네놈보다 권력이 약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무공으로 논하자면, 나는 네놈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어마감의 수십 명 고수를 단숨에 죽였으니, 네 몸에 남은 현기가 얼마 없겠지.

제국 2품 무도 고수인 이 몸이 친히 네놈의 무공 실력을 확인해주마.”

정능이 천천히 숨을 내뱉자, 그의 숨이 뜻밖에도 검처럼 응집되었다.

“이문회가 성지를 거역했다.

나 정능은 폐하를 위해 간신을 척결하고자 한다.

이문회, 그래도 네놈이 마지막엔 참수형으로 죽는 게 아니라 무예를 겨루다가 내 검에 죽는 것이니,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능이 큰소리로 기합을 외치면서 번개처럼 이문회를 향해 날아갔다.

푸욱.

정능의 날카로운 검이 순식간에 이문회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자리에 멈춰선 정능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무릎 아래가 뼈까지 통째로 잘려서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능의 몸이 쓰러질 때까지도 그의 잘린 두 다리는 여전히 바닥에 꼿꼿이 붙어 있었다.

“으아악!”

정능이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이문회가 또 한 번 가볍게 검을 털어내면서 말했다.

“무공은 목숨을 걸고 겨뤄야만 느는 것이지, 마당에서 허수아비를 상대로 연습한다고 늘지 않아.”

정능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가 이끌고 온 수백 명 무사도 투기를 완전히 상실했다. 게다가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동창 무사’들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자리에 남아 있던 이백여 명의 어마감 무사가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무기를 버렸다.

“투항하겠습니다.”

이미 성지까지 거역한 이문회에게 반항했다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 그들이었다.

“저희는 어마감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는 검남각(劍南閣) 소속입니다.”

“저, 저희는 염주부 소속입니다.”

이문회는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이백여 명의 무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뒤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슉, 슉, 슉, 슉.

이문회의 뒤에 서 있던 동창 무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엄청난 양의 화살들이 무릎을 꿇은 무사들을 향하고…….

짧은 찰나가 지나고,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던 이백여 명의 무사가 깔끔하게 화살에 맞아 모두 죽었다.

어마감 부제독 정능이 다리가 잘린 채로 바닥을 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문회, 감히 성지를 거역하다니. 네놈은 지금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다! 네놈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구할 수는 없다. 넌 죽은 목숨이야. 넌 죽었다고!”

이문회가 피가 묻은 채 바닥을 뒹구는 성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성지를 두 손으로 받친 뒤, 공손한 태도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성지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신, 이문회. 명 받들겠습니다.”

이문회가 바닥에서 피 묻은 쇠사슬을 집어 들어 제 손목에 감았다.

이 광경을 본 정능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나 이문회는 평생을 폐하께 충성을 다해왔다.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성지를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거역한 건 사례감에서 내린 허튼 명령이고, 내가 죽인 건 폐하를 배반한 간신 역적 놈들이다.

경성에서 나를 압송할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나는 폐하의 성지에 따라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어서 경성으로 갈 것이다.

경성에 도착한 뒤, 폐하께서 나를 어떻게 처분하셔도 좋다. 폐하께서 나를 죽이시겠다고 해도, 나는 두말할 것 없이 폐하의 처분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문회가 말했다.

두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위의 모든 동창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면서 상심에 빠진 얼굴로 외쳤다.

“주인!”

종정, 무천추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희가 주인을 경성까지 호송해드리고, 궁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폐하께 억울함을 호소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는 걸 믿고 싶지 않습니다.”

“주인을 경성까지 호송해드리겠습니다. 주인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죽여버리겠습니다!”

동창 무사들의 가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성을 외치면서 검으로 자신들의 갑옷을 두드렸다.

바로 그때, 저택 밖에서 익숙한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광서 순무 낙문이었다.

“정말 감동적이로군. 눈물이 날 지경이야. 이문회, 자네의 행동이 참으로 놀라워.”

낙문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탄식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자네가 살아서 광서 밖으로 나갈 기회를 주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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