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04화 (104/648)

제104장: 비겁한 여천천

저홍면이 손녀를 안아 올리면서 두변에 물었다.

“관음, 그리고 두변, 두 사람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무슨 일이 있어?”

혈관음이 대답했다.

“두변에게는 천리마 한 필이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그 말이 제 손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여천천이 고작 천 냥 은자로 그 말을 강제로 사 갔고요. 그 천리마가 두변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말이랍니다. 엄당 졸업 시험에 기마술 과목이 있는데, 두변이 꼭 그 말을 써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 노장군께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노장군, 저희와 함께 그 천리마를 돌려받으러 가주실 수 있을까요?”

혈관음이 정중하게 사정을 얘기하면서 물었다.

“그래. 가자꾸나. 시간이 없으니 어서 출발하자.”

저홍면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 노장군은 정말로 호쾌해서 한마디 말도 묻지 않고 곧바로 흔쾌히 이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저홍면은 정말로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두변과 혈관음을 데리고 여천천이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리하여 저홍면, 두변, 그리고 혈관음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자라온, 제멋대로의 끝판왕인 토사 공주 여천천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염주부 별원, 여씨 저택 안.

어린 나이임에도 절세미녀의 떡잎이 보이는 토사 공주 여천천은 나른하게 침상에 누워있었다. 여천천의 발육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그녀는 가슴을 어디다 얹혀놓지 않으면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여자 가장(家將: 무장 종복)이 아뢰었다.

“주인, 엄당의 두변이 주인을 뵙기를 청합니다.”

“두변? 안 본다 그래.”

아름다운 여천천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젠 길을 지나가는 똥개도 나를 보겠다고 해? 엄당이 아무리 대단해졌다고 해도, 우리 여씨 가문 앞에서는 쥐뿔도 아니지.”

여씨 가문의 가장이 다시 아뢰었다.

“혈관음도 같이 왔다는데요?”

“혈관음? 그래도 안 봐. 아, 그년이 내 오라버니의 첩이 되겠다고 하면 한 번 생각은 해 보지.”

여천천이 대답했다.

“그리고 안륭 토사의 저홍면 장군께서도 동행하셨습니다.”

가장이 덧붙였다.

여천천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면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긴 하나, 저홍면의 위세는 너무도 대단했다. 여천천의 부친보다 직급도 반급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 저홍면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여. 내가 대청으로 나가서 그들을 볼 테니까.”

여천천이 명령했다.

염주부 별원에 위치한 여씨 저택은 족히 백 묘는 넘는 장원으로, 장원 안에는 없는 게 없었고 모든 건축물과 구조물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오정도의 장원에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화려했다.

세 사람은 족히 일각을 기다린 뒤에야 토사 공주 여천천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여천천은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인사하는 사람처럼 저홍면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저 대인을 뵙습니다.”

그리고 혈관음을 흘깃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너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혈관음이 말했다.

“천리마는 두변의 것이다. 그 말을 다시 돌려받고 싶어서 왔다.”

여천천의 예쁘장한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꿈 깨. 그 말은 내 돈으로 산 말인데, 무엇 때문에 너한테 다시 돌려줘야 하지? 내가 만약 거리에서 음식을 사서 먹었다고 쳐, 그런데 누가 와서 나한테 그 음식을 돌려달래. 그럼 내가 배 속에 있는 음식을 토해내서 주기라도 해야 한단 소리야?”

정말 막무가내가 아닐 수 없었다.

혈관음이 말했다.

“그건 당신이 빼앗아 간 것이지, 산 게 아니지. 일만 냥이 넘는 천리마를 고작 천 냥 은자로 강제로 사 갔잖아. 그건 명백히 빼앗아 간 거지, 사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게 뭐 어쨌다고? 어쨌든 우리 여씨 가문에 들어온 물건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한혈보마(汗血寶馬) 운니(雲泥)가 있잖아. 그런데 뭐하러 두변의 천리마를 가지겠다는 거지?”

“나라는 사람은 말이지, 좋아 보이는 건 다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귀한 말 두 필이 있는 게 뭐 어때서? 한혈보마를 타면서 천리마를 옆에 끌고 갈 수도 있잖아.”

여천천은 억지스러운 말을 너무도 당연한 표정으로 내뱉고 있었다.

저홍면은 대녕 왕조가 아무리 기울어간다고 해도 토사 공주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게 너무도 놀라웠다.

저홍면 노장군은 몸이 떨릴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여천천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여천천, 네 것이 아닌 물건이니, 어서 돌려주거라.”

여천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홍면 백작, 제가 백작께 예의를 보이는 것은 백작이 어르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를 내세우면서 뻔뻔하게 구시면 곤란하죠. 어서 돌려주라니요? 제가 왜요? 안륭 토사부가 언제부터 이곳 문산 토사부까지 관여할 수 있게 된 건가요?”

저홍면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돌려주지 않겠다?”

여천천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안 돌려주면 뭘 어쩌시게요? 설마, 제가 정말로 백작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저홍면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너희 여씨 가문이 안륭 토사부의 극비 군사 기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첩자를 보냈느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만 해도 족히 서른아홉 명은 넘는다. 하지만 같은 나라를 섬기는 신하의 입장으로 여씨 가문의 만행을 알고도 모른척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나온다면, 당장 그 서른아홉 명의 첩자를 솎아내서 처형시키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다.”

여천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물론 여천천은 여씨 가문의 첩자 서른아홉 명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첩자들이 죽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부친에게 혼쭐이 날까 두려웠다.

하지만 여천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천천에게 순순히 천리마를 내놓으라는 요구는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죽일 테면 죽이세요. 하지만 우리 사람 서른아홉 명을 죽인다면, 우리는 백작 사람 삼백구십 명을 죽일 겁니다.”

저홍면의 얼굴이 싹 변해서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여 가문의 꼬마야, 이 늙은이가 제대로 된 훈계를 한 번 해줘야겠구나.”

저홍면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옷을 벗고 보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천천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지금 뭘 하시려는 건가요?”

“네 아비 여여해 후작을 대신해서 너를 훈계할 셈이다.”

저홍면 노장군은 정말로 성미가 불같아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마음을 먹은 즉시 소매를 걷어붙였고, 쓸데없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곧장 여천천을 향해 걸어갔다.

여천천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당신이 감히!”

저홍면은 두말하지 않고 한 손으로 여천천의 손목을 낚아챈 뒤, 다른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여씨 가문의 가장들은 대청문 앞에 모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홍면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것도 있었지만, 그녀는 여여해와 무공을 겨룰 정도로 무공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만약 가장들이 이때 저홍면을 막아보겠다고 달려들었다가는 죽기를 자처하는 것과 같았다.

바로 이때,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면서 강렬한 살기가 대청을 뒤덮었다. 이어서 평온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홍면 노장군, 아이들 사이의 일은, 아이들이 해결하게 놔두시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검마(劍魔) 이도진이었다.

저홍면이 여천천의 손목을 놔주면서 말했다.

“이 종사(宗師), 자네는 이렇게 제자가 설치고 다니는 걸 눈감아 주고 살았나?”

검마 이도진이 대답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모르셨나 봅니다. 저 이도진은, 도리보다 내 사람이 우선인 사람입니다.”

저홍면 노장군은 대로하면서 보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검으로 말할 수밖에. 자네는 검술 종사이니 당연히 검술 능력이 뛰어나겠지. 내가 비록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며 쌓아온 내공에 불과하지만, 나도 한 번쯤은 자네와 겨룰 수 있지 않겠는가?”

일순간 대청 안은 일촉즉발의 긴장감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두변은 당연히 저홍면 노장군과 이도진이 싸우게 놔둘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노장군이 이 일로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크나큰 업보가 될 것 아닌가.

“여 소저, 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습니까?”

두변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리며 물었다.

여천천은 보석 같은 눈동자를 살짝 굴리면서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거운 가슴을 탁자 위에 살짝 걸쳐두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괴면서 별거 없다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두변? 들어본 적 있지. 엄당의 환관인데, 칠현금, 바둑, 서예와 그림을 좀 할 줄 알고, 시를 짓는 데 재능이 좀 있다고는 들었지. 그런데 그 외의 모든 것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라고 들었어. 학원의 만년 꼴찌라던데, 쪽팔리지도 않나.”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네.’

두변이 말했다.

“여천천 소저의 기마술이 아주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 등에 업혀서 자랐고, 열다섯 때부터 서남 토사 연맹 기마술 대전에 참여했는데,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고요.”

여천천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천리마가 얼마나 진귀한 말인데, 천리마를 타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은 있어야지. 네 기마술 실력이 천리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내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너는 말을 탈 줄도 몰라서 허구한 날 마차만 타고 다닌다던데. 그런데 무슨 천리마를 몰겠다고 난리야? 그냥 그 천리마를 산 사람이 나라는 걸 영광이라고 생각해.”

‘이야,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네. 내가 맨날 마차만 타고 다닌 것도 알아?’

두변이 말했다.

“아, 그리고 여천천 소저에게 운니라는 이름을 가진 말이 한 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니와 함께 자라서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생각한다고요. 게다가 운니는 귀하다고 소문난 한혈보마인지라, 여 후작께서 운니가 아직 망아지일 때 오만 냥 거금을 들여서 구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저의 생일 선물로 머나먼 서역에서 사 오신 것이지요. 맞습니까?”

여천천이 가진 운니라는 한혈보마는 서남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운니는 여천천이 어딜 가나 그녀와 함께했고, 이 때문에 운니는 거의 여천천의 상징과도 같았다.

심지어 세간에는 우스갯소리로 운니가 여천천의 운명의 반쪽이 아니냐는 말도 떠돌았다. 그 운명의 반쪽이 암컷 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한혈보마 운니를 타고 서남 토사 연맹의 각종 기마 대회를 누비며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운니는 여천천의 자랑이자 명예였고, 여천천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운니는 생김새와 총명함의 정도가 두변의 천리마를 훨씬 능가했다.

두변이 말했다.

“여천천 소저의 기마술은 놀라운 수준이지만, 제 기마술 실력은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 무모한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악명높기로 소문난 천룡 마장(馬場)의 가장 어려운 구간인 단혼(斷魂) 구간에서 저와 시합을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이긴다면, 천리마와 소저의 한혈보마도 제가 가지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여천천이 격노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여천천은 본능적으로 두변을 죽이려고 보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내 한혈보마를 가질 생각을 해? 이것이 분명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지!’

몇 년 이래 여천천의 한혈보마를 탐내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 모두 땅속의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렸다.

여천천은 그 정도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철없는 어린애였다.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여전히 내 것!

나는 네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내가 가진 것을 한 눈이라도 몰래 쳐다봤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철부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여천천에게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운니를 달라고 한다?

두변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천천 소저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기마술 실력은 눈 뜨고 봐주지도 못할 정도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하긴, 두변의 기마술이 형편없지. 보통 형편없는 게 아니라, 정말 끔찍한 수준이더군. 흔한 졸병보다도 못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놈을, 이 기마 천재가 두려워할 필요 있나?’

여천천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나른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조금 전처럼 가슴을 탁자 위에 걸쳐둔 뒤, 새하얀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랑 기마 경주를 하고 싶다고? 안 될 건 없다만, 네가 이 내기에서 걸 수 있는 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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