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장: 당신에게 어울리는 짝이 못 됩니다.
손립 환관은 마치 변검을 하듯이 표정을 싹 바꿨다. 영원히 오정도를 엄동설한과도 같은 태도로 대할 것 같던 손립은 그를 향해 따스한 봄볕과도 같은 미소를 보이더니, 오정도의 두 손을 맞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구, 오씨, 집안에 진정한 신선을 모시고 있었으면서 밖에 나가서 애꿎은 사람한테 머리를 조아리려고 그랬군. 누구든 자네가 두변 선생과 이런 사이인 줄 알면, 광서 바닥에서 자네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지. 아예 바다 위에 대자로 뻗고 누워도 된다고.”
오정도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지만,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소인은 앞으로도 손 공공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같은 편이니까 그렇게 겉치레할 것 없네.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내 집에 들러서 차나 한잔 함세. 술을 마셔도 좋고 말이야. 두변 아우에게 형님 노릇도 제대로 못 한다고 밉보이기 싫거든. 두변 아우의 친척은 곧 내 친척 아니겠나. 내 친척이 염주부까지 왔는데, 내가 제대로 된 접대를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체면이 구겨지겠나?”
손립의 말에 두변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손립 공공이 정말로 눈치가 빠르고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이군. 조금 전에 오정도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서 때맞춰 달려온 게 분명하지. 제때 달려와서 오정도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내 체면을 한껏 세워주는 걸 봐선, 손립이 정말 보통 눈치를 가진 자가 아니야.’
이어서 손립이 말했다.
“두변 아우, 할 일이 있다고 하니 나는 먼저 가보겠네.”
그리고 오정도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오씨, 가세. 내가 친히 자네를 데리고 상선을 되찾으러 가지. 그렇지 않으면 시박사의 졸개들이 자네들의 상선에서 몰래 주머니를 채울 수도 있지 않겠나. 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자네의 물건을 건드리지 못할 걸세.”
손립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고, 오정도는 그의 뒤를 따르며 함께 염주항으로 향했다. 오정도를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두변에게 빚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오염명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자리에 남아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두변을 향해 예를 올렸다.
“고맙네, 두변.”
“별거 아닙니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되도록 일찍 집으로 돌아가세요. 노부인과 누이가 무척 걱정하고 있습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오염명은 또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내가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알려주게.”
“알겠습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다 끝났어? 가자. 저홍면 노장군을 만나 뵈러.”
두변과 오염명 부자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던 혈관음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두변은 마차가 아닌 말 두 필이 준비된 걸 보고 물었다.
“마차 타면 안 됩니까?”
혈관음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면서 물었다.
“왜? 무슨 뜻이야 그게. 마차에서 뭘 하려고.”
‘못 말리는군. 내가 마차 타자니까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두변이 서둘러 설명했다.
“아니, 내가 말을 잘 못 타서 빨리 달리질 못합니다.”
혈관음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말을 잘 못 탄다니?”
“진짜예요.”
“말도 탈 줄 모르는데 천리마를 받겠다고 해? 천리마만 있으면 졸업시험에서 이길 수 있어? 천리마가 아니라, 용마(龍馬)를 준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지.”
두변이 정색하고 말했다.
“나는 천재라서 뭐든 빨리 배웁니다. 고명한 기마술은 정신력으로 배우는 거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혈관음도 진지하게 말했다.
“두변, 난 지금 진지하다. 만약 천리마가 네 미래에 엄청 큰 영향을 주는 거라면, 여천천에게 보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리마를 뺏어 올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 천리마를 돌려받으려는 이유가 고작 그 천리마가 일만 냥짜리라서라면, 난 너와 함께 가지 않을 테다.”
“저도 진짜 진지합니다. 제 궁술 실력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환관 학원에서 만년 꼴찌라는 건 잘 알지. 궁술 실력도 꼴찌고.”
‘나한테 진짜 관심 있는 건가? 내 환관 학원 성적까지 다 알아보다니. 이보세요. 저는 환관이라 당신에게 어울리는 짝이 못 됩니다.’
두변이 혈관음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 제가 바로 그 만년 꼴찌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궁술 실력은 과녁도 제대로 못 맞힐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죠. 그런데 난 하루 이틀 만에 내 궁술 실력을 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정신 집중 궁술까지 할 줄 압니다.”
“말도 안 돼.”
혈관음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도 정신 집중 궁술이 얼마나 힘든 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활 하나만 빌려줄 수 있습니까?”
혈관음의 수하가 재빨리 두변에게 활과 화살을 건넸다.
“어딜 쏠까요?”
두변이 물었다.
두변은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이 말을 할 때 본능적으로 혈관음의 도톰한 입술을 쳐다보았다.
혈관음이 말했다.
“저기 저 나무 보이지? 여기서 180보 정도 떨어져 나무인데, 자세히 보면 나무에 약 2촌 정도 되는 둥근 자국이 있다.”
“네, 보입니다.” 두변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활시위를 당기고 둥근 자국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그리고 그는 정신력 각성을 통해 목표물을 확인하고 정신 집중 궁술을 시전했다.
슉, 슉, 슉, 슉, 슉.
10초 만에 화살 다섯 발을 쏘았고.
푹, 푹, 푹, 푹. 푹.
화살 다섯 발은 직경 2촌밖에 되지 않는 둥근 원 안에 빽빽하게 꽂혔다.
깜짝 놀란 혈관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화살을 쏘다니. 진짜 정신 집중 궁술이잖아?’
“정말 며칠 만에 궁술 실력이 이렇게 늘었다고?”
혈관음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두변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안 그러면 이문회 대인께서 왜 제게 심혈을 기울이시겠습니까.”
혈관음이 그제야 믿긴다는 듯이 말했다.
“너를 믿어보겠다. 어떠한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내가 꼭 너를 위해 천리마를 되찾아 주겠다.”
두변은 마차를 타고, 혈관음은 말을 타고 저홍면 노장군의 군영으로 향했다.
길에 막 올랐을 때, 혈관음은 남모를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변이 선물한 장미 정유를 귀밑에 살짝 발랐던 터라, 두변이 그 향을 맡고 알아챌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두변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혈관음은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실망했다.
사실 두변은 그녀가 장미 정유를 발랐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챘었다. 일부러 모른척했을 뿐.
저홍면 노장군의 낭군 군영은 교외에 있었다. 행군을 하다가 잠시 쉬어가야 할 때면, 저홍면 장군은 늘 백성들이 놀라지 않도록 마을이나 성 안이 아닌 교외에서 야영했다. 두변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저홍면의 낭군 부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낭군 부대의 모습은 몹시 가슴이 아팠다.
물론 낭군 병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용맹해 보였다. 키가 크지는 않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르고 단단한 체형이어서, 슬쩍 보기만 해도 그들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낭군 병사들의 갑옷과 병사복은 너무도 꾀죄죄하고 너덜너덜했고, 손에 쥐고 있는 무기도 대부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거나 이가 나갔다.
‘이 부대가 말로만 듣던, 제국을 위해 무수히 많은 공로를 세우고, 이 땅에서 가장 용맹하고 무적인 낭군 부대라니. 그런데 어쩜 이리도 초라해 보일까.’
두변과 혈관음을 본 낭군 수위가 목청을 높여서 호통쳤다.
“이곳은 군사 요충지이니, 더는 다가오지 마시오.”
혈관음이 말에서 내려서 말했다.
“장군께 말씀을 전해주시오. 진남공의 의녀, 그리고 이문회의 의자가 노장군을 뵈러 왔다고.”
두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된 수위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지면서 태도가 공손해졌다.
같은 편이고 전우라는 의미였다.
이문회는 낭군의 전우가 맞았다. 그는 낭군의 이익을 위해서 수차례 발 벗고 나서서 낭군을 도왔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가서 장군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수위가 말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수위가 말했다.
“안쪽으로 가시지요. 장군께서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안하게 됐네. 내가 직접 나가서 두 사람을 맞이해야 했는데, 이제 막 식사를 마쳐서 말이지. 낭군에는 식사를 마치지 않았을 땐 자리를 떠나면 안 되는 군율이 있거든.”
저홍면 노장군이 말했다.
두변은 처음으로 그 유명한 여장군, 충심이 하늘을 찌르는 토사 저홍면을 마주하고 있었다.
저홍면은 두변이 생각했던 것보다 젊었고, 피부에 광택이 있고 잔주름이 없는 데다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런데 또 그녀는 두변이 생각했던 것보다 늙어 보이기도 했다. 너무 많은 고생을 한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벌써 절반 가까이 하얗게 셌고, 두 손은 사내의 손보다 더 거칠었다.
저홍면은 키가 몹시 컸는데, 족히 18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녀의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맑고 예기가 넘쳐흘렀다.
두변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후배 두변, 저 노장군을 뵙습니다.”
“네가 바로 문회가 거둬들인 아이로구나.”
저홍면이 두변을 한 손으로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이때, 일곱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저홍면을 향해 뛰어왔다. 앳되고 귀여워 보이는 아이는 비단이 아닌 면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있었고, 맑고 투명한 두 눈동자는 생기가 가득했다.
“할머니, 저 사람은 누구예요?”
여자아이가 두변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홍면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수수, 나이로 따지면 네가 두변을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지만, 항렬로 따지자면 숙부이니, 앞으로는 이 사람을 두 숙부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가 고개를 치켜들고 해맑게 웃으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두변을 불렀다.
“두 숙부!”
두변은 이 해맑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 한편이 아려오면서 동시에 본능적으로 강렬한 보호 본능을 느꼈다.
이 아이가 바로 안륭 토사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안륭 저씨 집안의 사내들은 이미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지금 남은 저씨 가문의 핏줄이라곤 저홍면과 저영수, 이 둘뿐이었다. 조손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만에 하나 저홍면도 전장에서 전사하는 날이 온다면, 채 일곱 살도 안 된 저영수가 다음 세대 안륭 토사가 되는 것이다.
두변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두평아에게 주려고 샀던 계화당을 꺼내서 저영수에게 건넸다. 두평아에게 주려고 샀던 것을 선물을 살 겨를이 없어 이 어린아이에게 그대로 주려니 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할머니, 저거 받아도 돼요?”
저영수가 눈을 반짝이면서 저홍면에게 물었다.
“두 숙부는 이 조부의 아들이다. 그러니 두 숙부가 주는 선물이라면 당연히 받아도 되지.”
저홍면이 대답했다.
저영수가 활짝 웃으면서 두변의 손에서 계화당 상자를 받아왔고, 당장 그 자리에서 계화당 하나를 꺼내서 작은 입 안에 넣었다. 계화당을 입에 넣은 저영수의 표정은 황홀 그 자체였다.
계화당이 그리 진귀한 간식이 아니지만, 저영수가 이리도 좋아하는 것을 본 두변은 안륭 토사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똑같은 토사 공주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두변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얻을 수 있는 다른 토사 공주 여천천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정말 맛있어요. 두 숙부, 감사합니다.”
저영수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두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어린 저영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