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장: 대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대인, 용서해주십시오. 미천한 제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대인께 했던 실수들은 제 며느리의 얼굴을 봐서라도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집안과 제 비천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두변은 별 뜻 없이 쳐다만 봤을 뿐인데 오 부인의 눈에는 살인귀처럼 보였나 보다. 오 부인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허창전 같은 인물도 마음대로 죽이는데, 오씨 가문 같은 곳은 저자의 말 한마디에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오히려 오 부인은 방금 오씨 가문의 가족들을 모두 살려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두평아를 팔아넘기기는커녕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두평아를 지키려 했고, 두변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두변이 앞으로 다가가 오 부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부인 말씀이 과하십니다. 부인이 평아 누이의 웃어른이시니 자연히 제 웃어른이기도 합니다.”
토를 다 하고 세수까지 하고 돌아온 두평아가 물었다.
“두변, 오씨 가문의 부자를 구해줄 수 있어?”
오 부인은 이 말을 듣자 두 눈을 반짝이면서, 다시 두변에게 절을 했다.
“대인께서 저희 집안의 부군과 아들을 구해주시면, 두말하지 않고 은자는 원하시는 만큼 전부 드리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평아 누이, 먼저 오 부인을 모시고 객잔에서 쉬고 있어.”
오 부인의 희생을 본 두변은 이미 그의 남편과 아들을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천리마를 찾으러 가는 길에 같이 처리하면 되는 일이라 따로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두평아가 말했다.
“오주성에도 오씨 가문의 집이 있어서 굳이 객잔으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우리는 거기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게. 혹시 은자가 필요하면 정양가에 있는 오씨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고.”
오 부인은 두변에게 계속해서 감사 인사를 하고는 곧 평아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이노야 오정융도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제가 부탁드릴 것도 있으니 이노야는 바쁘지 않으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아, 예, 예.” 두변의 말에 이노야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부인과 두평아가 자리를 떠나자 두변의 차가운 시선이 이노야 오정융을 향했다.
오정융은 방금 두평아를 금수만도 못한 허창전에게 보내려고 했고, 오염명이 그녀를 내치면 그만이라고 말한 자였다. 그러니 붙잡아 둘 수밖에.
두변의 눈빛을 읽은 오정융은 지레 겁먹고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질부를 봐서라도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종정이 물었다.
“이자도 죽일 것이냐?”
“됐습니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어디 광산에 보내 죽을 때까지 일이나 시킬 생각입니다.”
‘나를 탄광에 보내겠다고? 평생을 햇빛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하잖아! 그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옆에 있던 동창 무사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즉시 오정융을 잡아끌었다.
놀란 오정융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대인! 용서해 주십시오. 저한테 은자가, 은자가 있습니다! 은자가…….”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한 오정융은 맞아서 기절해 버렸고 죽은 개처럼 힘없이 끌려 나갔다. 아마 그가 다시 깨어가면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족쇄를 차고 광산에서 한평생 채굴하게 될 것이다.
죽일 사람들도 다 죽였고 처벌할 사람도 다 처벌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나야 했다.
두변은 자초지종을 종정에게 설명했는데 종정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리마를 가져오는 형제들도 운이 없었군. 괜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어.
그런데 광서 시박사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대해상의 선박을 압류하다니, 손임 공공이 언제부터 이렇게 거칠어진 거지? 매년 시박사에서 해상들에게 받는 상납금만 해도 상상을 초월할 텐데 말이다.”
두변이 답했다.
“저도 의아합니다. 숙부께서 저와 함께 시박사에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천리마도 되찾아오고 오씨 가문의 부자도 꺼내야 하니까요. 오씨 가문이 파산하지만 않는다면 선박을 어떻게 처리하든 숙부께서 알아서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다. 나한테 맡겨두거라.”
“이번 일이 처리하기 복잡합니까? 은자를 여기저기 찔러 줘야 할까요?”
“흠, 시박사의 손임 공공은 네 의부를 쥐가 고양이를 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니 천리마를 돌려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상으로 은자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손임 공공으로부터 은자 이천 냥을 받아내지 못하면 내가 숙부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나 대단합니까?”
종정이 답했다.
“너는 이문회 대인이 남방에서 얼마나 뛰어난 명성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 같구나. 엄당 내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긴 하지. 이문회 대인이 미간을 한번 찌푸리면 진무사 왕인은 잠자리에도 쉽게 못 드니, 손임 같은 무골호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단다.”
두변도 이미 이러한 관계를 파악한 바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자를 죽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왕인은 이문회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반평생 모은 재산을 경성에 써가며 광서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종정이 두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눈 주위가 거뭇한 걸 보니 종일 잠도 한숨 못 잔 모양이구나. 어서 가서 눈 좀 붙이거라. 내가 대신 염주부에 가서 은자와 천리마를 가지고 모레쯤 돌아오도록 하마.”
오주부의 동창 천호는 생각보다 더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어서 두변 대신 일을 처리해주려고 했다.
종정이 아랫사람에게 명했다.
“여봐라. 두 공자를 가장 좋은 저택으로 모시거라. 두 공자는 이 대인의 의자이니 성심성의껏 돌봐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오주 동창의 임 백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오주 동창 천호인 종정은 두변의 천리마를 되찾고 오씨 가문의 부자를 구하기 위해 염주부로 향했다.
두변은 오주부에서 가장 좋은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오주 동창 임 백호는 좋다는 것은 죄다 두변 앞에 쌓아올리지 못해 한스러워할 정도였다.
“공자, 혹시 배고프시다면 가장 고급스러운 술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공자, 밤에 자면 춥지 않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올 테니 함께 주무시지요. 양가 부인이 좋으신가요, 아니면 화괴가 좋으신가요. 풋풋한 게 좋으신가요, 아니면 농염한 게 좋으신가요?”
7월 삼복에 춥진 않냐고 물어보니 두변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마지막 제의에는 두변도 정말 솔깃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문회의 의자이고 광서 동창의 소주인이니만큼 조금은 체면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여인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행동을 하자니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두변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임 백호가 세세하게 돌봐줘서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임 백호가 마치 용수철처럼 계속 허리를 굽히며 말을 이었다.
“이 대인께서는 건강하십니까? 반년 전에 이 대인을 뵌 후로 지금까지 한순간도 대인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저를 어찌나 가엾게 여기셨는지 광서로 위대한 인물을 보내주셨지 않습니까. 이문회 대인이 오신 이후로 저희는 모두 기댈 곳이 생겼으니 일을 하는 데 훨씬 힘이 납니다. 듣자 하니 이 대인께서는 곧 진무사로 진급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두변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임 백호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 참 잘됐습니다. 하늘에서도 다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왕인 그 늙은 놈은 자리만 차지하고 하는 일도 없으니 진작에 내려왔어야 합니다.”
“임 백호의 이 충심을 의부께 꼭 전하겠습니다.”
임 백호가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하며 말했다.
“소주인의 은혜에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젠장, 나이 마흔 넘은 사람이 스물도 안 된 내게 소주인이라는 호칭까지 쓰며 무릎을 꿇다니. 역시 환관의 아첨하는 기술은 천하제일이군.”
“과분한 말씀입니다. 이제 임 백호도 쉬세요.”
“소주인, 편히 쉬십시오. 저는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임 백호는 몸을 일으키며 공손히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이 임 백호는 정말로 의자를 가져와 바깥 정원에 앉아서 밤을 지새울 준비를 마쳤다. 안에서 기척이라도 들리면 바로 튀어 나갈 생각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두변은 물론 이런 행동을 경멸하지 않았다. 임 백호는 이미 마흔 살이 넘었음에도 그동안 뒷배를 봐줄 사람이 없어 진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 백호는 종정과의 관계도 좋긴 했으나 종정도 한낱 천호에 불과했기에 이번에 두변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궁리를 다하려는 것이다. 두변이 자신을 기억하고 나중에 이문회에게 조금이라도 언급해주기만 한다면 그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변은 매우 피곤했으나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영종오의 <수어록 기마편>을 꺼내 빠른 속도로 한 장씩 넘겨 보았다. 대충 내용만 훑어보고는 꿈의 세계에서 책 내용을 학습할 계획이었다.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모레 아침이면 두변은 천리마를 얻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써 볼 수 있을 것이다.
밖에 있던 임 백호는 두변이 전날 한숨도 못 잔 상태임에도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등불을 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는 절로 숙연해졌다. 그는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구부린 상태로 정원에 서서 안에서 부름이 있기를 기다렸다.
두변은 밖의 이런 상황을 몰랐으나 만약 알았다면 마음이 매우 아팠을 것이다.
임계연 백호도 스무 살까지는 나름 두각을 드러냈었다. 호북 환관 학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으며 호북 동창에서 총기를 맡았다. 기세가 한창 올랐던 그는 엄당의 부흥을 이끄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지겠다고 생각하면서, 마흔이 되기 전에 동창의 진무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호북에서 북명검파에 밉보인 덕에 동창의 비호를 받고도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그는 호북에서 멀리 떨어진 광서로 오게 되었는데 도중에 북명검파의 습격을 받아 전중혈(膻中穴)을 눌렸고 그때부터 무공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어 이십여 년간 진급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도 오주부 천호인 종정이 그를 가엾게 여겨 백호로 진급시킨 후 접대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이때부터 임계연은 무공 고수에서 사람들을 접대하는 아첨쟁이로 바뀌어 어떻게든 진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그나마 천호 관직으로 은퇴해야만 의자를 거두어 노년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만 차서 백호로 은퇴하면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의 그를 두고 엄당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변은 <수어록 기마편>을 한번 훑어본 후 침상에 올라 잠을 청했다.
전날 한숨도 못 잤더니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꿈을 꾸지 않고 열두 시간을 내리 잤으며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두변이 눈을 떴을 때 앞에는 아첨하며 웃는 임 백호가 있었다.
“소주인, 일어나셨습니까?
최고급 칫솔과 소금, 그리고 수건과 따뜻한 물, 미지근한 물, 시원한 물을 모두 준비해 놨습니다. 직접 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어여쁜 여인을 들여보낼까요?”
“혼자 씻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두변은 임 백호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세수와 양치를 마쳤다.
“식사와 간식도 준비해 놓았습니다만 부족한 점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소주인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지요.”
식탁에는 일곱 가지 반찬이 놓여 있었는데 육식과 채식, 따뜻한 음식과 차가운 음식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색과 향, 맛이 모두 뛰어난 음식들은 딱 봐도 실력 있는 요리사가 만든 것으로,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음식들이지만, 최소한 수십 냥 이상은 투자해야 만들 수 있는 고급 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