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96화 (96/648)

제96장: 개 한 마리 죽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

“죽여라!”

허창전이 매섭게 외치자 무사와 궁수 수십 명이 검을 뽑고 활시위를 당기려고 했다.

콜록! 콜록!

그때 밑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허창전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종정 형, 기침 소리와 발소리만 들어도 바로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자, 자, 이리와 같이 술 한잔하시지요.”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광서 동창의 천호 종정이었다.

줄곧 종정과 허창전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늘 같이 술자리를 즐겼다.

능운각의 문이 열리고 은색 장포를 집은 중년의 환관이 들어왔다. 누른빛이 도는 네모난 얼굴의 용맹해 보이기도 나약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꽤나 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가 바로 이문회의 심복인 오주 동창의 천호 종정이었다.

“종 숙부이십니까?”

두변이 묻자 종정이 대답했다.

“그래. 네가 두변 조카냐?”

“그렇습니다.”

두변이 답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허창전의 안색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이 아이가 종정 형의 조카였군요. 하마터면 같은 편끼리 오해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경거망동하며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대니 나중에 종정 형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오늘은 제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죽음은 면하더라도 적당한 처벌을 가해야 제 체면이 살 것 같습니다.”

종정이 물었다.

“그럼 허 형은 어떻게 처벌하고자 합니까?”

“따귀를 30대는 때려야겠습니다.

그다음에 손가락 세 개를 자른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도 종정 형의 체면을 살려 드려야 하니까요.”

“좋습니다. 역시 허 형은 관대하군요.

두변 조카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두변이 대답했다.

“종 숙부, 제가 방금 이삼에게 순검을 죽여도 되냐고 물었는데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지금 숙부가 오셨으니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제가 오주부의 토호인 순검 허창전을 죽여도 되겠습니까?”

허창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눈빛에 살기가 가득해졌다.

“이놈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내가 종정 형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다고 제 탓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정이 두변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저자를 반드시 죽여야겠습니다.”

두변이 답했다.

종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죽여라. 죽여도 된다. 다만 뒷수습하기가 좀 번거로울 뿐이다. 저자는 손임의 의자이자 진무사 왕인의 의조카이니 이 대인의 명령이 없으면 함부로 손대기 껄끄러운 인물이다.”

두변이 말했다.

“계림에서 왕인이 저를 죽이려 했을 때, 의부께서 왕인에게 ‘나이도 있으시니,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하고 말씀하시며 그를 저지했습니다. 그러자 왕인은 스스로 화를 삭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종 숙부도 며칠 전에 일어났던 과거시험 부정행위 사건을 아실 겁니다. 왕인은 그때도 제 앞에서 자신의 의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겠다. 그럼 네 뜻대로 해라.”

“종 숙부, 제 무공이 부족하기에 저자를 붙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죽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자꾸나.”

둘의 대화에 허창전이 발끈해서 종정을 바라봤다.

“당신이 동창 천호이기 때문에 체면을 살려준 거지, 내가 당신을 두려워했던 게 아니다. 오주의 토호인 나는 지부와 계왕부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란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가만있진 않을 것이야. 두 놈 다 죽여주마.”

허창전은 오랜 시간을 악질 토호로 살아온 탓에 완전 안하무인이었다.

종정이 손을 휘둘렀다.

“처리해라.”

그러자 그가 데리고 온 동창 고수들과 이삼이 재빨리 검을 빼 들었다.

촤라락!

불과 1분만에 허창전 수하의 무사 수십 명이 깨끗이 죽어 버렸다.

이를 본 소후야 유몽우가 분노했다.

“감히 내 표묘루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내가 누군지도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구나. 여봐라. 저놈들을 처단해라.”

종정은 그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리석군. 괜히 자네 부친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게. 우리 동창이 방금 그분의 목숨을 살려주었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건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일 걸세.”

과연 표묘루에 있는 무사들은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후야야 멍청하다 하더라도, 동창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지금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이삼과 이사가 앞으로 나가서 허창전을 잡아끌었다. 순검 대인인 허창전은 1년 내내 무공을 연마해 실력이 나름 괜찮고 힘도 셌지만, 이삼과 이사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려 2분 동안 버텼지만, 결국 두 사람에게 제압 당하고 말았다. 허창전이 거세게 저항하며 소리쳤다.

“종정, 내 의부가 바로 손임이다. 나는 진무사 왕인 공공의 의조카이며 북명검파의 제자란 말이다. 부디 스스로 화를 자초하지 말거라. 계왕부와 지부 대인도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데 감히 네놈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종정이 허창전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렇지. 계왕부는 지켜보는 이들이 많아 그 누구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지고무상한 왕의 작위만 갖고 있을 뿐이지.”

하긴, 계왕 세자 영충요는 사람뿐 아니라 개미조차도 밟아 죽이진 않을까 걱정하며 사는 자였다.

종정이 말을 이었다.

“지부 대인은 문관이어서 여러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네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이지. 하지만 우리 동창에게는 너 하나쯤 죽이는 건 개 한 마리 도살하는 것과 다름없다. 네가 스스로를 9품 관원 순검이라고 하지만, 사실 조정에서는 불법 악질 토호들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네놈을 쓰고 있는 것뿐이다. 결국 네놈은 흑방의 수령에 지나지 않는다.”

허창전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나는 손임 공공의 의자이며 왕인 공공의 의조카란 말이다!”

종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이 너를 의자로, 의조카로 삼은 건 너를 통해 지방 세력과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꼬박꼬박 은자도 들어오고 효도도 받으니 얼마나 좋았겠나? 하지만 그들은 너를 정말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너는 그저 개새끼나 같을 뿐이지. 아무리 광서 엄당의 형세에 잘 모른다고 해도, 아직도 왕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느냐. 왕인의 의조카가 아니라 그의 친아들이 와도 우리는 다 죽일 수 있단 말이다.”

종정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이고, 얼빠진 놈들 가르치기가 정말 어렵구나. 특히 이 세상 물정 모르고 설치는 놈은 더 그렇고 말이다. 내가 너랑 술 몇 번 같이 마셨다고 형제라고 생각하느냐? 술자리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느냔 말이다. 술자리에서 호형호제하는 것이랑 진짜 형제가 되는 건 천지 차이다. 됐다. 두변, 네가 마무리 짓거라.”

“알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평아 누이는 돌아서봐.”

“아니야. 나도 지켜봐야겠어.”

두평아가 말했다.

“내가 저놈을 잔인하게 죽이더라도 나를 때리거나 꼬집어선 안 돼.”

두변은 말을 마치고 허창전 앞으로 다가가서는 영설 공주가 준 황금설을 꺼내 들었으나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삼, 네 비수 좀 건네줘.”

이삼이 자신의 비수를 두변에게 건네주었다.

두변은 허창전의 덜덜 떨리는 얼굴을 보며, 비수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섭나?”

허창전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왕인 공공의 의조카라고! 넌 날 죽이지 못해.”

두변이 말했다.

“내가 요즘 다른 사람들 거세하는 데 취미를 붙였거든. 꽤 오래 연마했으니 실력도 괜찮은데 한번 경험해 보고 싶지 않나?”

두변이 손에 든 비수를 휘둘렀다.

오주 순검 허창전의 아랫도리가 순간, 바로 생생하게 잘려나갔다.

“으악!” 허창전은 정신이 나간 듯 처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허창전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듯 별다른 저항 없이 눈물 콧물만 흘리며 서럽게 울부짖었다.

“날 좀 봐줘, 날 좀 봐줘. 내가 잘못했어. 집안의 재산을 전부 내놓겠네. 은자로 꽤 값어치가 나갈 테니 이쯤하고 제발 나를 놓아줘.”

“네가 죽으면 가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절대 못 지키지. 네가 죽으면 무슨 죄명을 붙여서라도 가산을 몰수해 버릴 테니 말이야.”

허창전이 절망하며 통곡했다.

“내 의부가 손임 공공이고, 의백부가 진무사 왕인 공공이라고. 그들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이지. 제발 나를 놓아주게. 제발…….”

“넌 말이야.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아주 무식해. 광서 엄당의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허세를 부리다니. 어떻게 그런 머리로 지금까지 버텨왔나?”

푹! 푹! 두변이 비수로 허창전의 팔과 다리를 빠르게 십여 차례 찔러 그의 근맥을 전부 잘라 버렸다.

“좋은 도법(刀法)이로군. 민첩 시험에서 만점을 받겠어.”

종정이 손뼉을 쳤다.

“오래 연마했는데, 드디어 솜씨를 손 보일 기회가 찾아왔군요.”

두변이 말했다. 그 사이에도 허창전은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두변이 말했다.

“이자를 4층에서 던져버려라. 밑을 잘 살펴보고.”

“알겠습니다!”

이삼과 이사가 혼비백산한 허창전을 들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변 공공! 두변 공공! 살려주게, 살려주…….” 허창전의 서러운 울부짖음이 길게 꼬리를 남기면서 4층 밖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셋!

콰광!

바닥에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울부짖음도 멈추었고 드디어 주위기 마침내 고요해졌다.

무고한 이들을 죽이며 극악무도한 죄만 일삼아온 순검이자 오주부의 토호였던 자가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산 채로 떨어져 죽었다.

두변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종 숙부,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요란합니다.”

종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조카님이 이렇게 대단해져 좋긴 한데 일을 상당히 경솔하게 처리하는구나. 우리 동창은 권력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타당한 이유와 증거가 필요하다.”

두변이 말했다.

“허창전의 죄악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죽어도 벌써 여러 번 죽었어야 할 놈입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이쯤 하자꾸나. 우선 허창전의 죄명을 정해야 한다. 역모처럼 아주 무거운 죄목으로 말이지. 그래야 우리가 현장에서 그를 격살한 정당한 명분이 생길 것이다.”

“역모 말입니까? 안남국 반왕과 내통했다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은 생각이구나.”

종정은 진술서에 적과 내통이라는 죄목을 써 내려가다가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한데.”

두변이 말했다.

“몇 년 전에 토사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구나.”

종정이 죄목을 추가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하면 좋을 것 같구나.”

두변이 대답했다.

“왜구와 결탁해 대녕 왕조의 연해 부근의 주부를 습격했다는 건 어떻습니까?”

종정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구가 습격한 곳은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의 연해인데 우리 광서와는 몇천 리나 떨어져 있지 않으냐? 이자가 어떻게 왜구와 내통할 수 있는 거냐?”

“바다를 건너가 내통한 겁니다. 허창전은 강소성과 절강성 연해와 광서 연해 주부의 방어 정보를 왜구에게 팔아서 그들이 약탈하도록 유인한 겁니다.”

“그래. 그러면 말이 되는구나.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죄목 세 개가 하나같이 중대한 반역죄이니 우리가 현장에서 그를 살해한 명분이 될 수 있지. 이제 허창전의 손도장을 찍고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허창전은 밖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에 시체도 밖에 있었다.

종정이 꾸짖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죽였어야 했는데 귀찮게 됐구나. 괜히 사람들더러 시체를 업어 오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

여봐라. 가서 허창전의 시체를 들쳐메고 오너라.”

종정이 명령을 내렸다.

“밖에는 허창전이 반역을 저질러 체포했는데 그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알리거라.”

“알겠습니다.”

동창의 무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창전의 시체가 다시 업혀 올라왔고, 피 묻은 그의 손으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죄증도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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