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91화 (91/648)

제91장: 패배를 인정한 군주

옥진 군주는 모든 편견을 뒤로한 채 처음으로 두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두변은 남자치고 너무 곱상하게 생긴 탓에 옥진 군주가 좋아하는 얼굴상은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얼굴형은 용맹하고 호기로우며 당찬 남자였으나, 왠지 모르게 두변에게서 가볍지만은 않은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두변의 눈빛은 진중하면서도 날카롭기까지 했다.

한참 뒤에 옥진 군주는 말에서 내려와 두변에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미안하다. 내가 결례를 범했군. 그동안 너에게 편견을 가져왔던 것에 사과하겠다.”

옥진 군주는 뒤이어 영종오에게 허리를 숙였다.

“대종사께서는 여기 남아 두변 동학을 계속 지도해주시지요. 대종사 말씀대로 전쟁터에서 직접 활약하시는 것보다 제국을 위해 걸출한 인재를 양성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옥진 군주는 옳고 그름이 확실한 성격이라 항상 도리에 맞는 일을 지향했고 또 본인도 그렇게 행동했다.

그녀가 창천검을 꺼내 두변에게 건네주었다.

“이 검은 폐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무도 검술에 적합하며 비금(秘金)으로 제련된 절품 보검이다. 예리한 데다 단단하며 내기 운용에 적합하지. 전쟁터로 나가는 내게는 이런 검이 필요 없으니 너에게 주마.”

두변은 양손으로 보검을 받아 들은 후 검을 반 정도 빼보았다.

순간, 검날이 우는 소리를 내더니 위압감을 내뿜으며 검신이 잔잔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날은 물처럼 투명하고 그 위에 핏자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살기가 충만한 것이, 과연 진귀한 보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군주께서 주신 보검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잠시 후 두변은 옥진 군주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옥진 군주께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봅니다.”

옥진 군주가 말했다.

“어떻게 한 거지? 어제 너의 궁술 실력은 그렇게 형편없었는데 어떻게 단 하루 만에 이렇게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낸 거지? 지금껏 이런 일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뿐이다.”

두변이 대답했다.

“정신력 각성을 통해 정신력을 목표에 고정한 뒤 정신 집중 궁술을 했을 뿐입니다.”

옥진 군주의 아름다운 눈은 더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정신력 각성을 했고 정신 집중 궁술 또한 할 줄 알았다. 정신력을 목표에 고정할 줄 안다면 백발백중의 명사수 반열에 오르기 충분했다.

하지만 정신력 각성은 궁술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옥진 군주의 선천적인 정신력은 70으로 이미 이 세계의 99.99%를 뛰어넘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도 정신력 각성까지는 5년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이를 끝냈다고?

정말 기가 막히는군.

옥진 군주가 물었다.

“대종사께서 언제부터 네게 정신력 각성술을 가르쳐 준 거지?”

옆에 있던 영종오가 대신 대답했다.

“아직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여섯 시진 전에 두변에게 비적을 보여주었을 뿐이지.”

옥진 군주는 또 한 번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시 후 마음을 안정시킨 군주가 두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두변이 대답했다.

“대종사께서 주신 <정신력 각성술>이란 책은 매우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매우 기묘한 상태로 빠지곤 합니다. 그 책에서 묘사하는 힘의 세계라는 것이 원래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제 명상의 세계에서는 제 앞에서 입체적으로 표현됩니다. 그 힘을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으니 빠른 학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옥진 군주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변을 향해 공수했다.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가시는 길 무탈하길 바라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가자”

옥진 군주는 수십 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연화사를 빠져나갔다.

대종사 영종오는 마음을 완전히 가다듬고 나서야 다시 두변을 보러 왔다.

“국학과 고정 과녁 궁술의 목패에 모두 표시가 생겼다. 한 달 만에 총 열한 개 과목 중에 여섯 과목을 끝냈으니, 이제는 다섯 과목만 남았다. 그리고 환관 학원 졸업 시험까지는 아직 백일‘이나’ 남았지. 응?”

대종사는 자신의 입에서 ‘백일밖에’가 아니라 ‘백일이나’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 당혹스러웠다.

영종오가 물었다.

“낮에 옥진 군주에게 말하던 명상의 세계에 관한 내용이 전부 사실인 것이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명상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열 배는 느리게 흐르고 뇌의 사용량도 열 배 이상 증가합니다.”

두변은 가능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꿈의 세계에 대해 적당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영종오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명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지만, 그것이 실존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구나.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대종사가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

“두변, 보아하니 너는 정말 하늘에서 엄당을 구하기 위해 내려보낸 천재 같구나. 이문회가 옳았다. 너를 그토록 아낀 이유가 있었던 거지.

학습 진도가 계획보다 빠른 건 사실이나 그래도 이어서 기마술을 익히도록 해야겠다.”

대녕 왕조는 몇백 년에 걸쳐 북방 민족들과 전쟁을 치러 왔기에 기마병을 특히 중시했고, 기마술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무과 시험이든 무원 도장이든 환관 학원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과목이 바로 기마술이었다.

북방과의 전쟁에 대비해 대대적으로 기마병을 육성했고 그 결과 모두가 기마술을 익힌 상태로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에서는 기마술이 50점을 차지하고, 마상 궁술도 15점을 차지한다.

전체 기마술 시험은 다시 세 항목으로 나뉘는데, 속도 20점, 장애물 넘기 15점, 엄폐 궁술 15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기마술이야말로 가장 불공정한 시험 과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각자 군마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학원에서 제공하는 군마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우수하고 집안 배경이 좋은 학생들은 몇 년 전부터 훌륭한 군마를 마련해서는 매일같이 먹이고 씻기는 과정을 거치며 말을 훈련시켰다.

몇 년 동안 말과 교감을 해온 학생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태로 시험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학생들은 군마를 키울 능력이 없어 학원에서 골라주는 군마를 타야 했고 이 때문에 시험 때 말에서 떨어지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당엄의 경우 그는 어디를 가든 자신의 뛰어난 준마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두변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온몸에 잡모가 하나도 없고 눈은 보석처럼 빛났으며, 다른 군마보다 반쯤 더 크고 다리도 몇 치나 길었다.

현대 지구에서라면 이런 명마의 값어치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당엄이 졸업 시험에 이런 명마를 타고 나타나서 다른 학생들을 압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당엄과 염세 같은 사람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출발선이 남들과 달랐다. 아무렇게나 시험을 본다 해도 고득점을 받을 게 당연했고, 특히 당엄에게는 만점도 어렵지 않았다.

물론 우리의 두변에게도 아주 든든한 후원자가 있지 않은가!

두변이야 졸업 시험에서 뛰어난 말 한 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지만, 이문회는 이미 이에 대비해 두었다.

3대 학부 대회가 끝나자 이문회는 사람을 북변으로 보내 자그마치 만 오천 냥 은표를 내고 말 한 필을 사들였다.

그 가치가 만금이나 되어 당엄의 말에 전혀 뒤지지 않는 천리마가 지금 이 시각 가장 빠른 속도로 광서를 향해 실려 오고 있었다.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천리마는 며칠 이내로 도착할 것이다.

“두변, 천리마는?

말이 없으면 어떻게 기마술을 배우겠다는 것이냐?”

영종오의 물음에 두변이 대답했다.

“지금쯤 바다를 건너오고 있을 테니 곧 도착할 겁니다.”

두변은 제 천리마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으면서 당엄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현대 세계에서 최고급 스포츠카와 비견할 만한 천리마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바다 위의 해선 한 척.

동창 밀정 몇 명이 자리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지만 두 귀는 시시각각으로 곤두서 있었다.

그들 옆에는 말 한 필이 누워 있었는데 한번 쭉 훑어보고 점수를 매기자면, 조금 몸집이 크다는 것 말고는 다른 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들은 이문회가 두변의 말을 사기 위해 몽고로 보낸 동창 밀정들로, 총 1만 삼천 냥의 은자를 들여 몽고 왕정에서 밀거래로 천리마를 사들였다.

우습게도 이 천리마는 바로 몽고 왕정에서 황금 천 이백 냥을 들여 머나먼 서역에서 사들여 왔지만, 부패한 관료들이 천리마를 동창 밀정들에게 몰래 넘겨버렸다.

천리마를 사들인 후 동창 밀정들은 제일 먼저 변장해서는 육로로 천진항까지 이동했고, 다시 일반 해선을 타고 남하하여 염주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엄당의 군선이 아니라 일반 해선을 고집한 이유는 시박사(市舶司: 세관과 비슷한 업무를 하던 관아)와 엄당 수군이 이문회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이문회가 만 냥이 넘는 은자를 투자해 두변에게 말을 사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낼 만한 일이 아니기에, 적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신분을 숨기며 길을 이동하기에는 일반 상선을 타는 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동창 밀정 네 명은 오는 길 내내 혹여 두변의 천리마에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모든 행동에 신중히 처리하며 움직였다.

이제 이 해선은 곧 광서 해역으로 진입할 것이고 내일이면 해안에 정박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다.

이 해선의 주인은 오주부의 대해상(大海商) 오정도였다.

선박 위의 물건들은 대부분이 소금, 비단, 인삼 등으로 대부분 밀매로 들여오는 것들이었지만 여기저기 뇌물을 준 덕에 해상들은 손쉽게 물건을 밀매로 들여올 수 있었다.

갑판에서 한 젊은 남자가 먼 곳을 응시하며 육지를 찾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그토록 오래 표류한 끝에 드디어 집에 도착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 사내는 대해상 오정도의 아들인 오염명으로 바닷바람을 많이 맞아서 피부가 다소 검어졌을 뿐, 여전히 귀티 나는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대해상 오정도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해가 어두워졌는데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오정도는 제법 부유한 티가 났고 몸집도 컸지만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복장도 소박해 사람의 주의를 끄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옥이 집 몇 채의 값어치를 지닌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버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오염명의 말에 오정도가 웃으며 물었다.

“아내가 그리운 것이냐?”

“그런 연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염명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 아내 두평아의 대담한 성격과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잠시 멍해졌다.

이 남자가 바로 두변이 뜻밖에 얻게 된 매형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슉! 슉! 슉!

갑자기 어두운 바다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왔다. 동시에 군선 몇 척이 바람을 가르며 매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사납게 고함을 질러왔다.

“배를 세워라.”

“밀수선인지 조사해야 하니 배를 세워라.”

“모두 갑판 위에 집결해라. 명령에 불응할 경우 즉시 처결하겠다.”

휙!

군선의 투석기에서 발사한 불덩어리가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해선 옆에 떨어졌다.

이건 공격이 아니라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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