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다시 내기
“그 책벌레 말씀하시는 건가요? 역시 엄청나더군요. 합격도 모자라 수석으로 합격할 정도였으니까요.
진평의 시문과 시사는 다른 응시생들을 압도하면서 학정과 모든 시험 감독관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최연이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러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 진사와 거인들이 시문과 시사를 미리 준비했지만 진평의 발끝에도 못 미쳤죠.”
콜록콜록!
충격에 빠진 영종오는 숨이 턱턱 막히면서 연신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옥진 군주는 얼른 영종오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대종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했다.
영종오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이 두변에게 진평을 대신해 원시에 참가해 수석을 노려보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합격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변이 오히려 엄청난 수준 차이를 보이며 수석을 차지했다고?
‘두변이 정말 엄청난 요괴로구나. 그런데 왜 계림으로 떠나기 전에는 평범한 수준의 시문을 지었던 것일까? 또 장난친 게지.’
영종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비록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 진짜 천재가 강림했구나.”
옥진 군주가 말했다.
“글과 시가를 잘 짓는다 한들 어디 쓸데가 있나요? 그걸로는 제국을 부흥시킬 수도, 달로(韃虜)를 몰아낼 수도 없어요. 오직 무도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요. 그리고 진평이 천재인 게 두변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시나요?”
영종오는 두변이 진평을 대신해 원시를 치렀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옥진 군주는 무엇보다 정의를 중요시했기에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두변의 무도 재능에 대해 다시 논해보도록 하자구나.
두변은 국학 수업을 마쳤고 이제 고정 과녁을 맞히는 궁술을 익힐 차례다.”
환관 학원의 궁술 시험에는 고정 과녁 궁술과 기마 궁술이 있었다.
옥진 군주는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궁술 천재인 그녀는 외출할 때는 항상 등에 보궁(寶弓)을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옥진 군주는 검도에서는 영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궁술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종오가 말했다.
“두변은 궁술을 배워본 적이 없는 상태인데 네가 생각하기에 이런 두변이 고정 과녁 궁술에서 90점 이상을 받으려면 얼마나 수련해야 할 것 같으냐?”
“보통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면 3년이 걸리겠지만 두변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홉 달 만에 해냈지만요.”
그녀의 말투가 꽤나 오만했다. 아홉 달이란 성적이 엄청난 기록임은 분명했다.
“두변은 나흘이면 충분하다.”
영종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흘만 있으면 처음부터 궁술을 배우는 두변이 백오십 보 거리에서 고정 과녁 궁술에서 90점을 받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백오십 보 거리면 90미터에 해당하며, 90점이면 거의 백발백중의 실력을 갖춰야 받을 수 있는 점수였다. 실수로 두 번 9점을 쏘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여덟 발은 모두 10점을 맞춰야 했다.
거의 올림픽 정상급의 수준이었다.
옥진 군주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종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궁술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궁술은 재능과 감각, 그리고 엄청난 연습이 뒷받침되어야 실력향상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인데 나흘이라뇨. 신선이 내려온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옥진 군주는 영설 공주를 포함해서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옥진조차도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두변이 고작 나흘이면 가능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간이었다.
‘본래 기존의 천재를 압살해야 진정한 천재라고 불리는 법이지!’
영종오가 말했다.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하자구나.”
이 대종사가 내기에 심각하게 중독된 건가?
두변에게 연거푸 지고 나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애제자와 내기를 하려 해?
영종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약 두변이 고정 과녁 궁술을 끝내고 90점을 받는다면 두변이 진정한 천재라는 게 증명되는 셈이니 나는 남아서 최선을 다해 두변을 계속 가르치도록 하겠다.
만약 두변이 실패한다면 나는 가르치는 걸 포기하고 너를 따라 염주부로 가서 대군에 합류해 안남 왕국을 도우러 가마.”
“알겠습니다.”
옥진 군주는 이번 내기가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흔쾌히 내기에 응했다.
영종오는 두변에게 좋은 검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자신의 무도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검술인데, 두변에게 줄 좋은 검 하나가 필요했다.
영종오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값어치가 만금쯤 되는 보검이 한 자루 있지 않으냐?”
옥진 군주가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당시에 폐하의 무기고에서 이 창천검(蒼天劍)이 제일가는 명검이었는데, 그때 영설이 아닌 제게 이 검을 하사하셔서 더 기뻤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얼마 후 진남공 송결이 자신의 용음검을 영설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는 진남공과 황제 간의 깊은 우의를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
영종오가 말했다.
“네가 어차피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면 일반적인 대검을 쓸 테니 창천검은 별 쓸모가 없지 않으냐. 그 창천검을 내기에 거는 건 어떻겠느냐? 두변이 이기면 내가 두변을 계속 가르치고 너는 창천 보검을 두변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지.”
대종사는 이미 제자들을 골탕 먹이는 데 재미를 붙인 게 틀림없었다.
옥진 군주는 대종사가 두변을 편애한다는 생각에 언짢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차고 넘쳤다. 궁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나흘 만에 고정 과녁 궁술에서 90점을 받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고, 신선과 천재가 도전한다 해도 반년 이상이 걸리는 일이었다.
“알겠어요. 두변이 이긴다면 제 창천검을 두변에게 주도록 하죠.”
“구두계약은 파기되기 쉬우니 증거를 남겨야겠지.”
옥진 군주는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인물이었다. 영종오가 내기의 내용을 명문화하자는 것은 그저 옥진 군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함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좋아요. 구두계약은 파기되기 쉬우니 글로 남기자고요.”
옥진 군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두변은 필사적으로 길을 달려 아침이 밝아왔을 때 오주부 연화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영종오는 토납을 하고 있었고 옥진 군주는 검술을 연마 중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두변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햇빛을 받으며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옥진 군주의 매혹적인 몸의 곡선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하늘이 내려준 인연인 건가?’
옥진 군주의 검술은 그녀 자신처럼 힘이 넘치면서도 매서워서 주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
이 여인의 미모는 불꽃처럼 아름답고도 위험해서, 일단 가까이 다가가면 온몸이 불타 산산조각이 나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의 그곳은 중력을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불룩 솟아올라서 도저히 마음을 절제하기 힘들게 했다.
이러한 여인과 잠자리를 가질 수만 있다면, 아니 한 번 만질 수만 있다 해도 남자들은 죽음도 불사할 것이다. 심지어는 남자들에게 손을 뻗어보라고 해도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마차에서 내린 진평은 옥진 군주를 보고는 온몸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메추라기처럼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두변은 아직 호흡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일단 영종오 앞으로 다가가 과거 원시에서 다행히 원하는 바를 이루었음을 알리려던 참이었다.
영종오는 별다른 말도 없이 두변의 손에 활 한 자루와 화살 한 통을 쥐여주었다.
활은 일 석 무게의 강궁으로, 현대 지구로 따지면 130파운드 정도의 무게였다.
대종사가 90미터 앞에 있는 과녁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조준하고 열 발을 쏘아보거라.”
두변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방금 마차에서 내린 사람에게 이게 뭐야? 아직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는데?’
“이제 궁술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와 옥진 군주가 내기를 했다. 나흘 안에 네가 고정 과녁에서 90점을 받는다면 내가 너를 계속 가르칠 것이고, 너는 옥진 군주가 주는 보검 한 자루를 얻게 된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너와 나의 만남은 거기까지다. 너는 계림으로 돌아가고 나는 옥진 군주를 따라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옥진 군주는 두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사흘하고 반나절 남았어요.”
두변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자신의 궁술을 사흘 내에 초보 수준에서 올림픽 금메달 수준까지 끌어올리라는 뜻이었다.
두변의 머릿속에 딱 두 글자만 떠올랐다.
‘망할!’
이때 옥진 군주는 진평을 바라보며 따뜻한 눈길과 어투로 말했다.
“원시에서 네가 지은 시문과 시사를 읽어봤단다. 정말 대단하더구나.”
그녀는 두변에겐 한없이 차가웠지만, 진평에게는 매우 부드러웠다.
진평은 갑자기 온몸이 굳더니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더 기특한 것은 네 시문과 시사에서 호기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이지. 정말 보기 드문 명문이라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봤는지 모른단다. 필사까지 해서 시간 날 때마다 꺼내 읽어보기까지 하니, 진평 네가 뛰어난 귀재임이 틀림없구나.
권모술수에만 능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부류랑은 다르다고 볼 수 있겠지.”
진평은 더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이며 사실을 고했다.
“군주 전하, 이번 원시에서 쓴 시문과 시사는 두변 대사가 저를 대신해 시험에 참가해 쓴 것들입니다.”
짝!
아름답고 갸름한 옥진 군주의 뺨을 누군가가 가볍게 올려친 듯했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옥진 군주는 말문이 막히더니 이내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과거시험은 국가를 위해 인재를 뽑는 중대사인데 어찌 이를 모욕할 수 있는 거냐? 최연의 부정행위는 파렴치한 행동이지만 너희들의 대리 시험은 정당하다는 뜻이냐?’
진평이 허리 숙여 아뢰었다.
“이번 과거시험엔 제가 반드시 참가해야 했으나, 독에 중독된 탓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변 선생이 저희 집안 사정을 딱하게 여기시고는 특별 제작한 가면을 쓰고 저 대신 시험에 참가해 주셨으니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옥진 군주는 진평을 한참 쳐다보았으나 끝내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어쨌든 과거시험 부정 사건 때문에 지난번 원시는 무효가 되었고, 진평이 수석을 차지한 것도 무효가 되었다. 게다가 이미 진평의 얼굴은 혈반으로 뒤덮여 있어서 다시는 과거시험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평을 질책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평이 시험에서 쓴 시문과 시사가 두변이 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비록 무도를 아끼고 문풍(文風)과는 거리가 먼 옥진 군주이지만 <임강선, 곤곤장강동서수>는 그녀에게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두변의 글재주는 과연 경악할 정도로 아름답다 할 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변이 탐탁지 않았다.
두변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둘의 궁합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일까.
옥진 군주는 두변이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걸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계림부에서 발생한 부정 사건을 둘러싼 싸움이 이를 증명하지 않은가. 비록 옥진 군주가 나서서 두변을 도와주긴 했지만 두변의 행동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옥진 군주는 웅장하고 큰 뜻을 품은 호걸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혼인을 해야 한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적 풍모를 지닌 사람과 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다.
두변은 이런 영웅호걸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두변은 옥진 군주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정의로우며 호기롭고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눈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은 무도로 굴복시켜야지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부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