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대국
흰옷의 노인이 첫 번째 상대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이때 두변은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의 첫 번째 상대가 남장한 여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여인은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 큰 눈이 꽤 당당하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너무 예뻤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굴까?
물론 이러한 잡념은 두변의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졌고, 두변은 모든 정신을 대국에 집중해 둘의 기보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 남장 여인은 조금 전에는 두변을 손쉽게 이겼지만, 흰옷 노인에게는 엄청난 수준 차이를 드러내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반 시진 조금 남짓한 시간 만에 흰옷의 노인은 완승을 거둬냈다.
“내일 내가 둔 대로 두기만 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절대 하나라도 잘못 두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라.”
흰옷의 노인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상대는 바로 이강 서원의 영우였다. 영우의 바둑 실력은 본인의 금 실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두변 정도는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꿈속 노인은 바둑 실력도 실로 대단했다. 영우를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압박했으며 45분 만에 대승을 거두었고 영우는 바둑알을 내려놓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마지막 상대는 이번 3대 학부에서 바둑 실력이 가장 좋기로 소문난 장혁기로,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단 1패도 없는 진정한 천재였다.
장혁기와 노인의 대결은 그야말로 최고 고수의 대결이라고 할 만했다. 둘은 숨 막히는 명 대국을 펼쳤지만, 흰옷의 노인이 더 강했던 탓에 한 시진 반 동안 이어진 대국에서 장혁기는 바둑알을 내려놓고 패배를 인정했다.
“이제 됐다. 이게 내일 네가 둬야 할 대국이니 완벽하게 외우도록 해라. 이제 내가 직접 네가 내일 만날 상대방이 되어 방금 두었던 순서 그대로 둘 테니 한번 맞춰보자.”
“네, 알겠습니다.”
두변은 자기 역을, 흰옷의 노인은 내일 두변이 상대할 상대역을 맡아서 내일 진행하게 될 바둑 경기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1판, 2판, 3판…….
그렇게 몇십 판을 두고 나서야 두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수를 정확히 외웠다.
“선생님, 만약 내일 저들이 다른 방식으로 두면 어떡합니까? 만에 하나라도요.”
“바둑의 한 수 한 수는 그 사람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걱정 말거라.”
“알겠습니다!”
다음날 3대 학부 대회의 두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모두 일곱 명의 선수들이 바둑 경기에 참가하는데, 먼저 추첨을 통해 부전승을 골랐다. 부전승을 선택한 사람은 경기 없이 곧바로 두 번째 경기에 임하게 되지만, 두변에게는 부전승의 운이 따르지 않았고 장혁기가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두변이 뽑은 상대는 어제 꿈속에서의 인물과 똑같았다.
두변은 자신과 맞붙게 될 상대를 흘깃 쳐다보았다. 역시나 상대는 남장한 여인으로, 가슴을 꽉 동여매었어도 조금 부풀어 보였고 키는 두변과 비슷했다.
크고 예쁜 눈과 곧은 코,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이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에 당당한 기색을 갖춘 덕인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남장 여인은 두변에게 이상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웠다.
“어제는 어쩌다 얻은 악보로 운 좋게 이겼겠지만, 연주만 보면 너는 영우보다 한참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실력으로는 소별리 사형도 이기지 못했어. 너처럼 비천한 환관이 최병정 언니를 건드리다니, 여기가 남해 도장이 아니었으면 내 일찍이 너를 죽였을 것이다.”
“넌 최씨 가문과 어떤 관계지?”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바둑에서는 요행이 없고 오로지 실력만 있다. 네놈을 꺾는 데 최부, 영우 사형, 장혁기 사형까지 나설 필요가 없지. 반 시진 안에 이 경기를 끝내마. 내가 만약 네놈을 이기지 못한다면……. ”
“내가 네 얼굴에 ‘추녀’라고 쓰는 건 어때? 만약 내가 지면 내 얼굴에 더 크게 ‘추남’이라고 쓰는 걸로 하고. 근데 왜 최병정의 복수를 네가 해서 최씨 가문에 잘 보이려는 거지?”
두변은 이미 이 여인이 남해 도장 산장 축무애의 자녀 축옥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해 도장의 제일가는 미녀로 추앙받아서인지, 그녀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말투로 추측해 보건대, 축씨 가문과 최씨 가문, 이 두 문무 가문이 사돈을 맺기로 계획 중이지 않겠는가. 최부는 광서성 제일가는 인재였고 이 축옥쌍도 그를 짝사랑 중이었기에 최부의 적은 곧 그녀의 적인 셈 아니겠는가.
축옥쌍이 냉소를 지었다.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나는 천하의 명사들에게 십여 년간 바둑을 배워왔다. 만약 반 시진 안에 네놈을 이기지 못하면 앞으로 바둑돌을 쥐기도 부끄럽겠지.”
잠시 후 둘의 바둑 경기가 시작됐다.
이문회, 당엄, 축무애, 구양담, 그리고 최부를 포함한 현장의 수많은 관중이 두변과 축옥쌍의 대국을 지켜봤다.
어제 장양명과의 대국을 지켜본 이문회로서는 두변의 바둑 실력이 너무 형편없음을 확인했기에 아무런 희망도 걸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축무애에게 달려와 조용히 보고했다.
“두변은 경성 두씨 가문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악기, 특히 금을 연주하는 걸 즐겼고 동물들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바둑 실력은 형편없다고 합니다.”
축무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양담에게 말했다.
“안심하시게. 아무 일도 없을 걸세.”
하지만…….
두변과 축옥쌍의 대국이 막상 시작되자, 축무애와 구양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두변은 거의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바둑돌을 내려놓으며 불과 일각 만에 우세를 점했다.
대국 초반에 축옥쌍은 상당히 우월감에 넘쳐 있었고 바둑알을 쥔 자세부터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당황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 각의 시간이 지나면서 축옥쌍은 꾸역꾸역 따라가는 듯했으나 반 시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축옥쌍의 대패였다!
두변이 웃으며 말했다.
“축 낭자, 방금 한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축옥쌍은 두변을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에 추녀라는 글씨는 쓰는 건 헛된 꿈인 걸까?
하지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축옥쌍이 차가운 얼굴로 다시 돌아와 두변 앞에 섰다. 뜻밖에도 그녀는 스스로 제 얼굴에 추녀라고 글씨를 쓰고 돌아왔다.
“패배는 인정하지만 내 얼굴은 너 같은 환관 놈이 손댈 수 있는 게 아냐.”
축옥쌍은 그렇게 거만하게 자리를 떠났다.
모든 관중은 축옥쌍이 패배한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해 도장의 남자 학생들은 적대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지를 찢어버리겠다는 듯 두변을 바라봤다.
‘감히 망나니 같은 저놈이 우리 여신에게 망신을 줘?’
두변도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오랜만에 보는 강직한 여인이로군.
이런 여인은 일단 같이 잠자리를 갖고 나면 떼어내기가 매우 힘드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지. 그래도 저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최부에게 한방 크게 먹이는 것도 재밌어 보이는데?
물론 두변은 재빨리 이런 잡념을 떨쳐 버렸다.
이렇게 강직한 여인과 관계를 갖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구양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바둑 실력이 평범한 옥쌍을 왜 내보낸 겐가?”
축무애의 안색도 굳었다.
“다 내 탓이네. 옥쌍이가 자기 실력에 자부심도 있었고 또 최병정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허락했네. 평소에 옥쌍에게 많이 져주고들 하니까 자기 바둑 실력이 높다고 착각을 한 모양일세. 그래서 기세 좋게 나간 거고.
하지만 장혁기라는 국수(國手: 바둑 장기 따위에 있어서 실력이 한 나라의 일류가 되는 사람)가 있는 한, 옥쌍의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네.”
구양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이 축옥쌍을 이긴 건 의외였지만 그녀의 바둑 실력이 부족한 점도 있었고 최종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곧이어 다른 두 대국도 결과가 나왔다.
영우와 또 다른 인물이 모두 승리를 얻어냈다.
이어서 두 번째 추첨을 진행했고 두변의 상대는 영우로 정해졌다.
이강 서원의 부산장이 말했다.
“이제 끝입니다. 저 두변이라는 자는 영우와 맞붙게 되었으니 장혁기와 바둑을 둘 기회도 없겠군요.”
축무애와 구양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우는 명문가의 자제로 비록 바둑 실력이 금 연주 실력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다. 방금 두변과 축옥쌍의 대국에서 두변이 무난하게 이기기는 했지만, 워낙 실력이 차이가 나서 두변이 영우의 적수도 되지 못한다고 여겼다.
현재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두변이 얼마나 처참하게 패배하는가였다!
영우는 자리에 앉은 후 별다른 말 없이 바로 대국을 시작했다. 영우는 어제 두변이 연주 경연에서 이긴 것도 운 좋게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명곡을 주운 덕분이지 연주 실력 자체는 자신에게 한참 못 미쳤다는 걸 알기에 속으로 두변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두변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초 단위로 매우 빠르게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영우도 두변에게 밀리기 싫어 같이 초 단위 바둑을 두었으나, 점점 형세가 불리해지니 버티지 못하고 장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변은 계속해서 초 단위로 바둑을 두었고, 기다리기 지친다는 모습을 일부러 내비치다가 심지어는 바닥에 누워 쉬기도 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두변의 모습은 영우는 이미 안중에도 없고 세 살배기 아이와 바둑을 두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두변은 이미 기보를 달달 외운 상태였고 상대도 어제 꿈속에서와 똑같이 두니 도저히 질 수가 없는 경기였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반이 지났다.
영우는 점점 얼굴이 붉어지더니 식은땀도 더 많이 흘렸고 점점 버티기 힘들어하더니 관자놀이의 핏줄까지 선명히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으며, 버러지라고 불리는 이 환관 놈에게 또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함을 알아차렸다.
“내가 졌다.”
영우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바둑알을 내려놓으며 패배를 인정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모든 사람은 이 장면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두변이 결승전에 진출한다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환관 놈이 불패기왕(不敗棋王) 장혁기와 대국을 벌인다고?
현장에 있던 수장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어제 두변이 금 경연에서 영우를 이긴 건 운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오늘 바둑 시합에서까지 이겼으니 이건 진정 실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환관 학원에서 대회에 두변 혼자 출전시킨 게 이색적인 기권이나 항복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뿐, 그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만약 두변이 오늘 시합에서 이기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기 때문에 구양담과 축무애의 안색은 점점 굳어졌다.
“걱정 마시지요. 두변이든 누구든 그 누구도 장혁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옆에 있던 부산장이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안심했다.
실제로도 장혁기가 마지막으로 패배한 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고 그는 그후로 바둑 불패 신화를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광서성뿐 아니라 남방 전체를 보더라도 장혁기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대국이어도 잘 풀어나갈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장혁기는 후천적인 노력이라기보다 타고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서예와 회화는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해야 한다지만, 바둑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부분이 많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기왕(棋王), 기성(棋聖)들이 모두 20, 30대인 것을 보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수많은 젊은 기왕과 기성들은 나이가 들어 바둑 두는 것이 힘에 부칠 때가 돼서야 패배의 맛을 알곤 하는데, 장혁기도 바로 이런 불패의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