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의부를 위해 상황을 반전시키자.
깊은 밤, 두변은 이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 선생님,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두변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위가 찾아온 이유가 혹시 산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물었다.
늘 그렇듯 촛불에 의지해 옷에 수를 놓고 있던 유모는 이위를 보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 대인 오셨습니까? 어서 앉으시지요. 제가 차를 좀 내어 오겠습니다.”
“부인, 그럴 필요 없습니다. 두변에게 할 말이 있어 온 겁니다.”
유모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우리 소야가 무슨 사고를 친 건가요?”
“아닙니다. 좋은 일로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유모는 안심했다.
“두변, 밖에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조용한 곳을 찾아 방을 나섰다. 조금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더니 이위가 곧 입을 열었다.
“두변, 내일 산장과 함께 남해 도장에 가서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거라.”
그 소식에 두변은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토록 원하던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으나, 이문회가 직접 대회 참가를 거절했던 적이 있었기에 뜻밖의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선생님,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이위가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엄이 중도에 빠지기로 했다.”
두변은 마찬가지로 기쁨과 놀람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군요. 미리 언질을 준 것도 아니고 출발 전날인 오늘 밤에서야 통보하다니요.”
당엄이 활약할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두변은 당연히 기뻤지만, 이번 대회의 결과가 이문회의 앞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건 누군가의 계략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위가 말했다.
“당엄의 배후에 있던 사람이 산장을 협박했지만, 산장은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지키셨지. 그래서 이 사달이 난 거다.”
이위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지만 두변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장이 당엄 쪽에서 제시한 조건을 거부하신 거로구나.
두변은 엄당의 고위층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당엄을 엄당의 차세대 수장으로 보고 있고 광서 환관 학원의 가장 유능한 학생들조차 당엄과 적이 되기를 꺼리고 그를 우상처럼 대하지만, 엄당 내부의 고위층 일부는 문인 집단 출신인 당엄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문회가 있는 계파는 엄당 내부 가장 세력이 큰 양대 계파 중 하나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기에 당엄의 후계자 계승을 좋게 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당엄의 배후에 있던 사람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노리고 이문회에게 당엄의 자리를 보장해달라고 타협을 강요했을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면, 그들은 이문회에게 당엄을 의자로 삼아 이문회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두변은 천성적으로 음모론자인 탓에, 거의 단번에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두변이 물었다.
“선생님, 상대방이 산장께 당엄을 의자로 들이라고 요구했습니까?”
이위가 놀라서 대답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과연 명문가의 자제답군. 그래, 상대방은 네 말처럼 그 조건을 요구해왔다.”
“산장께서 거절하셨고요?”
“거절하셨다.”
이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갑자기 두변의 두 눈이 뜨거워졌다.
두변은 아마 자신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을 이문회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문회는 두변이 ‘꿈의 세계’라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오직 두변이 보기 드문 천재라는 것만 알고 있다. 게다가 아직 두변이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두변 때문에 당엄을 거절함으로써 이문회는 마지막 희망의 지푸라기를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아무리 속이 좁은 두변이라도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장께는 또 다른 의자인 이명기가 있지 않습니까? 계왕부에서 부총관을 맡는 만큼 유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두변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이문회가 당엄을 거절한 것이 혹시 자신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의자인 이문기를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위는 두변과 스무고개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원스레 대답했다.
“산장께서는 유능한 이명기를 매우 아끼시지만, 그는 엄당의 수장이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두변이 놀라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장께 물어보거나 나중에 이명기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이문회가 이명기가 아니라 정말 두변을 위해 당엄을 포기한 것인가? 물론 이문회 자신의 존엄과 지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두변도 선택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변의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두변은 스스로도 이문회가 그의 미래를 전부 걸고 자신에게 이렇게 큰 기대를 거는 게 합리적인 선택인가에 대해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얼른 가서 유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너라. 내일 아침에 남해 도장으로 출발해야 하니 지금 나와 같이 학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두변은 유모와 작별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학원으로 돌아갔다.
학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변은 이위가 하는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대회에서 이겨 졸업시험에서 50점을 더 받거나 학전 1,500묘를 되찾아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산장의 앞길을 잘 닦아 놓고 당엄과 관계된 이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두변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만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회에서 반드시 이겨 산장을 꼭 도와드려야 해.’
“대회에서 반드시 이겨 산장을 꼭 도와드려야 해.”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말이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이위는 몸을 돌려 두변을 쳐다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위가 두변에게 말했다.
“두변, 너무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산장께서는 네가 경험을 쌓고 세상을 경험하길 원하시는 거지 준비할 시간도 없는 네게 부담을 줄 생각은 전혀 없으시다.”
이위가 안타까워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산장께서는 이미 이번 대회를 완전히 포기하셨고 경성에 보낼 인죄서(認罪書: 죄를 인정하는 문서)까지 이미 다 써 놓으셨단다.”
이문회는 이뿐만 아니라 동창 만호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글도 이미 다 써놓은 상태였다. 3대 학부 대회의 결과가 정해지기만 하면 경성에 바로 글을 보내 자신이 동창 만호의 직에 연연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 함이었다.
“이제 그만 쉬거라.”
이위는 두변을 숙소로 들여보낸 후 이문회를 찾아가 보고했다.
이위가 웃으며 말했다.
“두변이 계속 입으로 ‘대회에서 반드시 이겨 산장을 꼭 도와드려야 해.’라고 중얼거리며 학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문회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기특한 아이로군. 내가 괜히 아끼는 게 아니지.”
이문회는 두변이 한 말을 진심으로 믿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마음을 예쁘게 볼 뿐이었다.
침상에 누운 두변은 대회에서 이겨 이문회의 앞길을 지켜야겠다는 다짐 때문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나!
지난번 한번 언급했듯이 두변의 금기서화 수준은 여자를 꼬시거나 SNS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정도였지, 전문가 앞에서는 잔재주에 불과했다.
금기서화에서 먼저 금 연주를 보자면 이 세계에는 금의 종류로 고쟁과 칠현금 이 두 악기만 존재했다.
두변은 고쟁은 조금 연주할 줄 알지만, 손에 익은 곡이 한두 개밖에 없어서 시합에 나간다면 취미반 회원들조차 이길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여기 이강 서원의 명문가 자제들을 이긴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바둑의 경우, 인터넷 바둑에서 승률이 8할이 넘었으니 두변의 수준도 나쁘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고수들을 상대로 얻은 승리가 아니라 햇병아리들을 잡는 쾌감을 즐겼기 때문에 이강 서원의 천재들은 차치하고라도 환관 학원의 학생들조차 이기기 힘들어 보였다.
서예의 경우 두변은 예쁜 글씨체 덕에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 야심 차게 서예 경연에 참가했으나 전문가가 아니었던 두변은 위로상을 받았고 그 이후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회화의 경우 여자를 꾀기 위해서 인물초상 소묘를 제법 그렸으며 서양화도 기본기는 배웠다. 하지만 단지 취미 활동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회화를 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이번 3대 학부 대회에는 고수들이 운집해있을 테니, 냉정하게 두변을 평가하자면 그는 금 연주, 바둑, 서예, 회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꼴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문회의 말을 빌리자면 두변은 그저 ‘깍두기’ 역할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당장 꿈속에서 금기서화를 연습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고, 주변에 가르쳐줄 선생님도 없으니 꿈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여기 머릿수나 채우러 온 게 아니라 산장의 미래를 위해 온 거다.”
두변은 속으로 계속 중얼거리며 침상에 누운 뒤 꿈의 세계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일각이 지난 후 두변은 성공적으로 꿈의 세계에 들어왔다.
이번 꿈의 세계는 색달랐다. 눈앞에 초가집이 하나 나타났고 그 안에는 두변이 알지 못하는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있었는데 신선 느낌도 나는 것이 남다른 풍격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곡을 배우고 싶으냐?”
노인이 물었다.
“관중을 압도할 수 있는 곡을 배우고 싶습니다. 누구든 듣자마자 제가 1등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곡 말입니다.”
두변이 답했다.
“그럼 관중이 누군지 알아야지. 통속적인 사람들과 격조가 있는 사람들의 기호는 완전 다르니까.”
“제 관중들은 격조가 있는 사람들로 금기서화에 정통하며 모두가 대사급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그럼 <광릉산(廣陵散)>으로 해야지.”
두변은 크게 기뻐했다. 혜강(嵇康)의 <광릉산>은 고대 중국에서 허세를 부리기에 딱 좋은 명곡 중 하나로, 신비로우면서도 운치가 있어 듣는 이들이 곡에 깊이 빠져들어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곡이었다.
두변도 이 곡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긴 했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두변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곡은 전승 과정에서 일찍이 실전(失傳)되지 않았던가? 하긴 명나라 시대의 <신기비보(神奇秘譜)>에서 다시 발견되면서 그때 다시 악보로 정리되었다고 듣기는 했었다.
일단 이 곡이 연주되기 시작하면 그 아름다운 선율에 현장에 있는 수많은 대학자들과 전문가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압도해야만 했다.
꿈속 세계.
“내가 먼저 연주를 할 테니 잘 듣고, 느끼고, 배우도록 해라.”
흰옷의 노인이 먼저 손을 꼼꼼히 씻고 비단으로 깨끗이 닦은 후 눈을 감고 감정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노인은 심오한 세계로 빠져든 듯 연주를 시작했다.
<광릉산>이 노인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흰옷을 입은 노인의 표정을 보면 몰입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심취했다는 걸을 알 수 있었다.
두변도 눈을 감고 긴 세월이 증명해온 이 ‘있어 보이는’ 곡을 감상했다.
연주는 5분 동안 지속되었다.
흰옷의 노인은 이미 빠져버린 곡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떠하냐? 느낀 것은 좀 있고? 억지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이 곡이 워낙 심오하니 한 번에 많은 것을 다 느끼진 못했을 거다.”
두변은 난처했다. 곡은 단조로웠고 절정에 이르는 부분도 없었기에 그다지 좋게 들리지도 않아 <철혈단심(鐵血丹心)>(<사조영웅전>의 드라마 주제곡)만도 못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긴 세월이 증명해온 이 ‘있어 보이는’ 곡은 지식인들의 입맛에 꼭 맞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 곡을 신앙의 수준으로까지 찬양하니 말이다.
두변은 매우 심취한 척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듣는 귀가 있으니 가르칠 맛이 나는구나. <광릉산>을 가르쳐줄 테니 어서 와보거라.”
두변은 한 번,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뽐내기 끝판왕인 대단한 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곡을 열 번, 백 번, 천 번을 넘게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