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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무제-25화 (25/648)

제25장: 나쁜 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땅에 누워있던 혈관음은 신세계를 경험한 덕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미 아편중독으로 인한 발작은 사라졌고 몽롱한 감각도 없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혈관음이 즉시 검을 뽑아 두변의 목을 겨눴다.

두변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건드리기는 당신이 먼저 건드려놓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사실 두변이 선천적인 고자라서 직접적으로 관계를 갖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맨살을 맞대며 충분한 신체접촉을 즐겼다.

“네놈의 약에 문제가 있구나. 다른 속셈이 있었어!”

혈관음이 말했다.

“약을 강아지한테 먹였는데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습니까? 못 믿겠으면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먹여봐요. 이건 내 약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문제인 거예요. 게다가 내가 위쪽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당신이 나한테 꼭 여기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자 100냥도 주지 않고 되레 나를 죽으려 하다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이 말에 혈관음이 분개했다.

두변이 쉬지 않고 연이어 몰아붙였다.

“생명의 은인을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미운 겁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겁니까?”

혈관음은 당장 두변의 목을 베어 눈앞에서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그만 다물게 하고 싶었으나, 두변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잠시 후 혈관음이 물었다.

“혹시 내가 다른 말들도 했나?”

“했습니다. 그것도 많이요.”

평소에 냉정하고 과묵한 혈관음이지만 방금은 미혼약을 먹은 것처럼, 또는 술에 취한 것처럼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 내용들은 그녀의 과거, 그녀가 겪은 고통, 그리고 그녀가 동경하는 것들에 대한 것으로 평소에는 그녀의 입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말들이었다.

“어떤 말들이지?”

혈관음이 노려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랑은 전혀 관계없는 당신의 일들이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 말은 전혀 믿음이 안 가는데?”

혈관음은 자신의 마음속에 묻어뒀던 수많은 부끄러운 비밀들을 두변에게 말했다는 사실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한테 이익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당신의 집안일은 당신에게나 중요하지, 내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를 죽이지 않을 거면 그 검 좀 거둬요. 내 목에 검을 대고 있으니 정말 짜증 납니다.”

혈관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두변의 목을 베었겠지만,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거칠게 검을 거두며 말했다.

“네 두 눈을 뽑아버릴 수도 있으니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말아라. 가봐.”

혈관음은 두변의 혈을 풀어주었다.

두변은 몸을 일으키고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바로 빠져나왔다.

두변으로서는 굉장히 익숙한 감정처리 방법이었다.

상대방에 집착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힘만 뺄 뿐이니 서로 깨끗하게 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지하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두변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혈관음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진남공의 의녀이자 광서성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적 우두머리로, 엄청난 몸값을 자랑한다.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답고 몸매도 끝내주니, 말 그대로 모든 남자, 심지어 환관들조차 꿈에서조차 갈망하는 그런 여인이란 말이다!

하지만 두변은 매달릴 기색 하나 없이, 그렇게 뒤 한번 돌아보지 떠났다. 그 사실에 혈관음은 경악하면서도 동시에 분노했다.

이제, 그녀는 두변이 환관일지라도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악당’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에 나를 만나는 날이 네 제삿날일 거다.”

혈관음이 분노하며 말했다.

그때 두변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빛이 아른거렸다.

‘혈관음을 구하라는 임무 완성.

양기 3점 증가.

미인과의 하룻밤을 얻음.’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두변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꿈틀대는 느낌을 받았다.

양기가 증가했기 때문일까?

제대로 남자 구실을 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긴 했지만, 그래도 첫 발걸음은 잘 내디딘 셈이었다.

혈관음의 별원을 빠져나온 두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혈관음이 두변의 혈을 눌러 다행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혈관음의 손에 죽을 뻔했다. 명분이 부족하다 보니 두변을 죽이지 않았을 뿐, 만약 두변이 그녀의 털끝이라도 건드렸다면 아마 바로 죽음이었을 것이다.

독하고 수법이 잔인하며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혈관음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자신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명분이 없어 스스로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학원으로 돌아갑시다.”

두변이 동창 무사 둘에게 말했다.

학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문회가 돌아와 있기만을 바랐다.

환관 학원 앞은 징과 북소리가 요란하고 폭죽이 울리며 각양각색 깃발이 펄럭이는 등,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문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당의 구세주이자 모두가 인정하는 차세대 엄당 수장인 당엄을 환영하기 위함이었다.

정말이지 학원의 학생들과 선생들이 총출동해서는,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현대 지구에서 톱스타를 마중하는 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박하고 유치했다.

두변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사람들 속에서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이문회 옆에 선 당엄이 보였는데, 뜻밖에도 둘은 서로의 팔을 잡고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당엄도 결국 학생일 뿐인데 의부가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닌가? 저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차기 동창 대도독 후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지?

당엄의 얼굴을 본 두변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저렇게 잘생길 필요가 있나? 게다가 크고 건장한 몸매에 기품까지 있어 보이는 게, 완전히 문무를 겸비한 대장군 같잖아. 전혀 환관스럽지가 않아!

물론 두변도 잘생겼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슈퍼스타가 대중의 시선을 받으며 빛을 발하는 동안, 자신은 그저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네다섯 가지 악랄한 계책이 떠오른 두변은 어떻게 당엄을 처리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안 돼!

당엄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세대 엄당 수장인데, 자신이 상황을 반전시킬 뭔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할 게 아닌가. 현재 인지도와 평판 모두에서 자신은 당엄에게 너무 뒤처져 있었다.

당엄을 위한 환영식은 무려 한 시진 넘게 진행되었다. 산장과 부산장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엄을 칭찬하면서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인재라고 추켜세웠고, 그 각박하던 학생들은 삽살개인 것마냥 당엄을 우러러보기까지 했다.

두변도 인파 속의 한 명이 되어 이 상황들을 관망하며 당엄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두변이 언제 주인공의 병풍 역할을 한 적이 있던가. 그는 줄곧 어디서나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시기심을 받는 쪽이었다.

시 전체에서 선발된 가장 우수한 학생, 시 단위 서예 대회 1등, 시 단위 음악대회에서 1등 수상, 대학의 수석 장학금 등등, 모두가 두변의 화려한 이력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병풍 역할로 전락했으니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저녁 무렵, 두변은 이문회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문회는 몇 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피곤으로 눈이 푹 들어가 보였다.

두변은 이문회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놀라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이문회는 이런 두변을 보고는 자신의 의자가 그래도 배려심이 있다고 생각하며 내심 뿌듯해했다.

“무슨 일이냐?”

밥을 먹던 이문회가 물었다.

엄당에서는 상하 간의 등급이 매우 엄격해서, 이문회도 두변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권하지 않았다. 이건 누군가를 아무리 좋아하고 중용한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종의 규율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산장,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안 돼.”

이문회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두변은 왜 안 되는지 물어보지 않고 제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이문회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

“첫째,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하는 인원은 다섯 명으로 이미 정해졌다. 누군가의 자격을 박탈하는 건 규율에 맞지 않아.”

엄당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고 특히 이문회는 정해진 규율은 반드시 준수했다. 만약 두변이 졸업시험에서 정말 꼴찌를 한다면 자신의 의자라 할지라도 두변에게 1년 정도 변소를 청소하도록 임무를 배정할 것이다.

그는 규율이 지켜지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둘째, 3대 학부 대회까지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다. 네 학습 능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촉박해. 미리 참석자를 정해 놓은 이유는 이번 대회를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 중 몇 명은 무학을 포기하면서까지 금기서화에 전념했다. 그 시간이 이미 몇 년이나 되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각 학부에서 다섯 명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학원에서는 10년 전부터 전문적으로 금기서화에 능한 인재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서너 살부터 유명한 선생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명문가 자제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문회도 마지막 학전 4,000묘를 지키기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하고 광동의 해원 출신인 당엄을 전학시킨 것이다.

“셋째, 금기서화는 졸업시험 과목이 아니다. 나는 네가 모든 시간과 정력을 졸업시험에 쏟아부었으면 한다. 졸업시험까지 고작 5개월 조금 더 남은 시점이니 하루도 낭비해선 안 될 것이야.”

이문회가 근엄하게 말했다.

“당엄이 우리 환관 학원을 대표해서 출전하면 정말 승산이 있는 겁니까?”

“승산은 7할 정도지만 적어도 지지는 않을 것 같구나.”

이문회가 하는 모든 말들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가 지지 않는다고 말했으면 반드시 그런 것이고, 승산이 7할 정도라 했으면 사실상 8할 정도 되는 셈이다.

두변의 의기소침해진 표정을 본 이문회가 모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앉아라.”

두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문회 앞으로 가서 앉았다. 이문회는 두변에게 차 한잔을 따라주었고 두변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차를 받아 들었다. 이는 아부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두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당엄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것이지? 혹여 네 앞길을 막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냐? 당엄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조금이라도 메꿔보고 싶은 마음일 거다.”

윗사람에게 자신의 알량한 속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두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라. 너는 결국 너다. 네가 어떤 목표를 세웠든지, 내가 힘이 닿는 데까지 너를 도와줄 거다. 괜히 당엄에게 너무 뒤처졌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번 3대 학부 대회를 통해 당엄의 명망이 높아지는 건 맞지만 엄당의 후계자 경쟁은 매우 긴 싸움이다. 10년, 20년, 어쩌면 30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오늘의 승패는 몇십 년의 경쟁에 있어 작은 한 걸음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여기서 이기든 지든 그 차이는 매우 미미해.”

이문회는 평소와 다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두변, 지금 너는 모든 정력을 무학과 연단학 공부에 쏟아부어야 한다. 5개월 남짓 남은 졸업시험 준비를 열심히 해서 동창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사람보다 크게 앞서기 시작할 수 있어. 동창은 우리의 핵심이자 인재들의 집합소니, 그때가 되면 네가 누구와 경쟁해야 하는지 알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연단학 기초 이론 공부는 잘돼 가고 있겠지?”

“사흘 정도의 시간만 더 있으면 연단학 기초 이론은 마칠 수 있습니다.”

연단 기초 이론은 총 5권으로 1, 2권은 이미 공부를 마쳤으니, 남은 3권을 공부하려면 사흘의 시간이 필요했다.

“좋다. 앞으로 며칠간은 3대 학부 대회를 준비해야 하니 이 일을 잘 마무리 짓고 나서 계왕부에 있는 대사를 같이 뵈러 가자. 그분께 무학 지도를 받으면 분명 일취월장할 거다.”

“알겠습니다. 이번 3대 학부 대회가 산장께 매우 중요한 일입니까?”

두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이런 일도 신경 쓰려는 게냐? 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도록 해라.”

이문회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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