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백천을 죽이다.
“어떻게 안 거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건가?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각오해야 할 거다.”
“발작을 일으킬 때 작열감에 괴롭지 않습니까? 마치 불덩이가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온몸이 가렵고 골수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개미가 기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죠. 그 고통이 어떻게 해도 없앨 수 없는 데다가 여러 가지 환각도 보일 겁니다.”
혈관음은 더욱 놀랐다. 두변이 말한 증상은 그 누구한테도 말해 본 적이 없는 본인만 느끼는 감각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발작을 몰래 보았다 하더라도 두변처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않을까.
몇 시간 전 혼절했을 때 꾼 꿈에서 본 혈관음의 발작은, 현대 지구의 마약 중독자들에게서 보이는 증상과 비슷했다. 그래서 이런 추론을 했고 그게 정확히 적중했을 뿐, 두변도 이것 말고는 더 아는 게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혈관음의 차가운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두변이 대답을 안 하면 단칼에 죽여버릴 기세였다.
두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목에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는 데다 눈도 충혈되었습니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곳은 치아입니다. 치아는 깨끗하지만, 잇몸에서 까닭 없이 출혈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중독됐다는 증거입니다.”
두변의 말은 당연히 다 헛소리였다. 이러한 증상들은 혈관음이 중독되어 발작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저 혈관음의 신체에 나타난 증상들로 말을 지어냈을 뿐.
하지만 혈관음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기에, 확신에 찬 두변의 말과 그의 정확한 판단을 마음속으로는 이미 믿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내가 치료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난 믿지 않는다. 나도 연단학을 조금 알거든. 수많은 연단 대사들을 찾아가 봤지만 그들은 이런 증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나이도 어린놈이 연단학에 대해 조예가 얼마나 깊을 수 있지? 그런 네가 나를 치료한다고?”
두변이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병의 원인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연단사들은 당연히 당신을 치료할 수 없겠죠. 당신은 매우 희귀한 신흥 독물에 중독된 겁니다. 그 독물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환각에 빠뜨립니다. 당신은 결국 폐인이 되겠죠. 아마 나와 몇 명만이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믿든 말든 당신 자유지만 내가 당신을 구해줄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너한테 치료를 부탁하려면, 너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인 백천을 죽여야 하고?”
“내가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입막음을 위해 당신이 죽이겠죠.”
“정말 치료할 수 있는 거지?”
“가능합니다.”
“알겠다. 거래 성립이다.”
이 둘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천은 혼비백산해서는 미친 듯이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휙!
혈관음이 옥처럼 고운 손으로 갈고리를 던졌다.
“윽!”
백천이 비명을 질렀다. 가느다란 갈고리 두 개가 그의 견갑골을 파고들었다. 혈관음이 갈고리를 잡아당기자 백천의 몸이 공중에 뜨면서 딸려왔고 이내 바닥에 떨어졌다.
혈관음처럼 무공이 높은 사람에게서 도망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혈관음이 두변에게 칼을 건네며 말했다.
“네가 직접 처리하도록 해라. 나는 엄당의 개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 걸 보는 걸로 족해.”
“이건 내가 엄당을 대신해 처벌하는 겁니다.”
혈관음의 비수를 건네받은 두변은 웅크리고 앉아 백천을 쳐다봤다.
이미 백천의 견갑골에는 갈고리가 걸려있었기에 고통 때문에 그의 얼굴과 온몸에는 경련이 일었다. 백천은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두변이 아니더라도 혈관음이 자신을 죽일 테니까.
“두변, 네놈도 좋게 죽지는 못할 거다. 지옥에서 너를 기다리마. 저 미친 여자가 곧 너도 죽일 거다.”
백천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이렇게 복잡한 문제에 네가 나설 자리는 없어. 너는 몇 번이고 나를 해치려고 했었지만 나는 너를 조금도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난 네가 불쌍하기만 해. 넌 가엾은 부류니까. 이제 안심하고 가라. 다음 생에서는 엄당에 들어오지 말고.”
“네놈도 결코 좋게 죽지는 못할 거다!”
백천이 울부짖었다. 그러다 다시 통곡하며 소리 질렀다.
“살고 싶어. 나 좀 살려줘. 후회하고 있으니까.”
정말 불쌍한 인생이로군!
“곧 끝날 거다!”
푹!
두변은 백천의 심장을 비수로 정확히 찔렀다.
백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한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지만 1분도 되지 않아 백천은 숨을 거뒀다.
골칫거리를 드디어 해결했다.
두변은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듯 가볍게 몸을 일으켰고, 비수를 혈관음에게 돌려주었다.
“수건 있습니까? 손을 닦아야겠습니다. 피가 온몸에 튀었거든요.”
두변은 닭을 잡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영화 속 악역 보스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얼굴에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고 너무나 태연하지 않은가!
혈관음이 건네준 비단 수건을 받아든 두변은 무심하게 양손과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멋진 건 3초뿐!
“으, 우웩”
두변은 헛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두변은 구석으로 달려가 아무 통이나 붙잡고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처음으로 죽여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혈관음의 냉혹한 얼굴에서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두변의 어수룩한 모습에 경계심이나 적대감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지금까지 두변의 교활한 언행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겨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경계심이 없어지고 이전까지의 모습이 오히려 다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변은 통을 붙잡고 족히 십여 분 동안이나 구토했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낸 후 더러워진 얼굴을 닦고 찻물로 입을 헹구었다. 그리고 찻물로 비단 수건을 적신 다음 얼굴을 깨끗이 닦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평온을 되찾은 두변은 태연하게 혈관음의 앞으로 돌아왔다. 방금 괴롭게 구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계속 얘기해봅시다.”
두변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혈관음이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구토는 다 했고? 늘 이렇게 허세 부리는 건가?”
“사람을 처음 죽여봤고 얼굴에 피를 뒤집어썼습니다. 결벽증이 있는지라 비위가 상해 토를 한 것뿐입니다. 토를 한 것은 결벽증 때문이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닙니다.”
두변은 아직도 허세를 버리지 않으면서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우리 얘기를 해봅시다.”
사람을 처음 죽여봤다 한들 이렇게까지 토를 하는 게 정상인가?
아니다. 두변은 연기를 한 것이다.
백천을 죽일 때 두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피를 뒤집어써서 조금 속이 메스껍긴 했지만 토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혈관음이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도록 만들기 위해 연기를 했을 뿐. 그는 자신이 위험한 인물이 아닌 그저 똑똑한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다.
두변은 교활하기도 했지만, 연기력도 꽤나 그럴듯했다. 온갖 사람들을 상대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게 어딜 갔으려나. 혈관음은 사람이 모질고 냉혹하긴 했지만, 이 방면에서는 두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는 내가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니라 어떤 독에 중독되었다고 말했다. 그 원인과 치료방법에 대해 자세히 말해봐라.”
두변이 먼저 조건을 내걸었다.
“밀매 소금의 3분의 1을 원합니다.”
두변은 혈관음을 구하라는 임무의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혈관음의 표정이 변했다.
“욕심이 끝이 없군. 헛된 기대는 그만 접어라. 네 목숨이 아직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나는 돈이 없습니다. 어차피 공짜로 얻게 된 재물들이니 3분의 1이 지나친 요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엄당도 이 밀매 소금을 주시하고 있으니, 잘못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헛소리. 이미 내 재물이 된 이상 한 푼도 줄 수 없다.”
“나는 꼭 3분의 1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면 너는 죽게 되겠지.”
“나를 죽인다면 당신을 치료해줄 사람도 없어집니다.”
폭발 직전인 혈관음은 정말 두변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고작 환관인 네놈이 무엇 때문에 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유모가 지난번에 나를 구하기 위해 많은 빚을 져서 계림부에 뇌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최씨 가문의 관사와 환관 학원의 관원들도 매수했고요. 그자들이야 내가 모르길 바랐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쩝니까. 만약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유모는 집을 몰수당하고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게 될 겁니다.”
혈관음은 두변이 보기와는 다르게 효심이 깊다는 생각에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혈관음은 곧장 내실로 들어가더니 손에 보따리를 들고나왔다. 그녀는 들고나온 보따리를 내던지듯 건네고는 말했다.
“황금 250냥이다. 은자로 치면 2천 냥도 더 되지.”
두변은 보따리를 풀고는 금 원보(元寶)를 하나씩 꺼내며 진짜가 맞는지 이로 깨물어보기도 했다. 이 순간 혈관음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두변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더 희미해졌다.
“이제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어떻게 중독된 거지? 구체적으로 무슨 독이고?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거냐? 나도 연단학을 공부했고 내가 찾아간 연단 대사들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잊으면 안 될 거다.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네놈을 잘게 다져 개한테 먹이로 던져줄 테니까.”
혈관음이 거칠게 말했다.
이제 두변이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을 시간이었다.
두변은 금 원보를 다시 보따리 속에 집어넣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혈 방주, 혹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친 곳이 발작하게 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픕니까?“
혈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떻게 안 거지?”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입니다.”
사실 두변은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추론한 것뿐이었다.
두변이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약을 추천해주면서 통증이 심해지면 먹으라고 추천해주었을 겁니다. 약을 먹고 실제로 통증도 사라졌겠죠. 풍한이나 생리통 같은 것들에도 즉시 효과를 보였고 말입니다.”
“맞아. 그런 것들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혈관음은 두변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계속해서 두변은 이 신기한 약의 외관과 냄새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점차 그 약이 아편으로 만들어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특수한 방법으로 순도를 더욱 높여 혈관음의 중독 증세가 더욱 격렬하게 나타나게 한 것으로 보였다.
“이 독물은 양귀비 또는 아편이라고 불립니다.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환각이 나타나게 되죠. 뼛속에서 수많은 개미들이 몸을 물어뜯는 느낌이 들 텐데, 이 모든 게 당신이 복용했던 그 신기한 약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약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신경을 마비시켜 고통을 못 느끼게 할 뿐이므로 그 고통은 결코 사라진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런 신기한 약의 가장 무서운 점은 중독이 된다는 겁니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끊을 수가 없습니다. 복용을 중단하면 엄청난 고통이 밀려옵니다. 눈물이 나고 온몸이 뜨거우며 개미들이 뼈를 타고 다니는 등의 각종 환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의지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혈관음은 두변의 추측이 전부 들어맞은 것에 매우 놀랐고, 도대체 이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혈관음은 불신과 경멸의 눈빛을 거두고 진지하게 두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독물로는 어떠한 치료 효과도 없습니다. 다 사기입니다. 이것으로는 당신의 풍한도 치료 못 하고, 당신의 생리통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방금 전에 생리통을 언급할 때 혈관음이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에, 두변은 다시 한번 혈관음을 놀린 셈이었다.
혈관음이 바로 비수를 두변의 아랫배에 가져다 대며 차갑게 말했다.
“네놈이 한 번 더 나를 희롱한다면 생리통이 뭔지 제대로 느끼게 해주지.”
두변은 바로 입을 다물고 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은 그 약을 끊은 지 좀 지났을 겁니다.”
두변의 예상대로 약을 끊은 지 보름이 좀 넘었기에 혈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이 약을 사용해서 당신을 통제하려고 하는 겁니다. 당신이 완전히 중독된다면 그들이 당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까요. 진남공부를 배반하는 것 말고도 더 끔찍한 일들을 시킬 겁니다.”
혈관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고 살기가 드러났다.
“어떻게 치료할 수 있지?”
혈관음이 물었다. 그녀는 이 일과 관련된 음모에 대해서는 두변과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