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9화 (19/648)

제19장: 유모를 구하거라.

두변은 소환관이지만 그래도 미남이었다. 늙은 좌명과 비교도 안 되는 젊은 사내 때문에, 여인의 마음은 순식간에 심란해졌다.

“그만 해요. 들키기라도 하면 저는 끝이에요.”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두변에게 벗어나 다른 다실(茶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좌명이 방으로 돌아올 때쯤, 두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군자처럼 바르게 앉아 있었다.

“10분의 1알임을 잊지 말아라. 따뜻한 물에 녹여서 먹이고. 그러면 반 시진 안에 해독될 것이야.”

연단 환관 좌명은 종이로 백두단을 잘 싸서 두변에게 건네줬다.

“이제 내 집에서 사라지거라.”

‘이 노인네는 소첩이 자기만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에, 잘생기고 젊은 남자가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군.’

“알겠습니다.”

두변은 더없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물론 속으로는 조금 전의 감촉을 음미하면서.

좌명의 집을 나선 두변은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두변은 원래 백두단을 두충에게 건네주어 유모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변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두충은 없었고 바닥에 돌멩이로 쓰인 글자만 남아 있었다.

‘소주인, 아내가 걱정되어 먼저 돌아갑니다.’

두충은 두변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돌아갔다. 아마도 두변이 의원을 모시고 집으로 갈 테니, 자신이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긴 두변이 학원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두변이 두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집으로 돌아간 것도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백두단을 어떻게 집으로 보내야 하지?

더는 두변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시간도 촉박했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 유모가 목숨을 잃게 되면, 두변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학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백천이 파 놓은 함정에 걸리게 되어 두변 자신이 위험해진다. 어젯밤에 꿈속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두변은 평정심을 되찾으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집에 가지 않는다면 유모는 죽는다. 두변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두변은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도 아니며 심지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할지언정 자신의 사람이 죽는 걸 외면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이 위험하다고 유모의 죽음을 모른 척한다면, 자신은 금수만도 못한 놈이 된다.

유모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면, 학원을 나섬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위험들을 감수할 수 있을까.

두변은 일어날 모든 경우의 수와 가능성을 생각해 본 후,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 비록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반드시 유모를 구하러 가야 했다.

“학원을 나선 후에 내가 잡히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겠지. 하지만 내가 잡힌다면 백천 너랑 끝장을 봐야겠다.”

두변이 혼잣말을 했다.

두변은 나무를 하는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얼굴도 가렸다. 가슴에 유모에게 줄 백두단을 품고 외진 곳에서 몰래 학원을 빠져나와 계림성에 있는 유모의 집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계림성까지의 거리는 십여 리로, 길을 가는 동안 그는 큰길을 피해 수풀이 우거진 외진 곳만 골라 걸었다.

세 시진을 넘게 걷고 나서야 계림성 성문이 보이자, 환관 학원에서부터 이곳까지의 위험한 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데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계림성은 광서의 수부(首府: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인구는 30만이 넘고 성벽의 둘레만 해도 몇십 리나 되었다. 항주(杭州), 소주(蘇州), 양주(揚州), 광주(廣州)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남쪽에서 큰 성 중 하나였다.

성에 들어오자 두변의 눈앞에 오랜만에 보는 번화한 풍경들이 펼쳐졌다. 이 세계의 성은 두변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의복과 건축양식, 그리고 거리의 풍경에서 중국 고대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두변이 알지 못하는 동식물들이 있거나 건축양식이 조금씩 달랐다. 거리의 양쪽에는 석조 건물이 더 많이 보였고, 장식과 형태에서도 색다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 중에 검객 무사가 더 많은 걸 보니, 무도(武道) 궐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변은 성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유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원래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에 의존해 두변은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두충 부부는 두변과 자신들의 딸을 데리고 계림으로 왔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두충이 말을 돌봐주며 버는 돈으로 생계를 겨우 유지했다. 덕분에 네 식구는 작은 방 두 개에서 생활하며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예쁘게 생긴 유모의 딸 두평아는 몇 년 전에 오주부에 있는 부잣집으로 시집갔다. 두평아가 혼인 후 계속해서 집에 도움을 주면서 이들의 생활도 한결 나아졌다. 앞에 보이는 이 집도 두평아가 은자 150냥을 들여 부모에게 사준 것으로, 방이 모두 네 개였고 정원도 있는, 계림성에서 꽤나 괜찮은 집이었다.

정원을 보는 순간, 두변의 머릿속에 두평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두변보다 두 살이 많고 억척스럽긴 했지만, 두변이 처음으로 여인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 대상이었다. 어려서 두평아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한 두변이지만, 두 사람은 친했다. 만약 두변이 선천적인 고자가 아니었다면 평아는 그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계림성에 도착한 네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유모는 두변이 선천적인 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평아를 두변에게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평아도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두변은 평아의 앞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 환관 학원에 들어갔다. 집안의 경제적 부담도 줄이고 평아도 자유로워지니 좋은 선택이 아니겠는가.

그후에 오주부의 한 공자가 계림부에 왔다가 평아에게 한눈에 반해 예를 갖춰 그녀를 초대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아직 가난하던 때였고, 남에게 얹혀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매혹적인 유모를 보고는 여러 차례 그녀를 희롱하자, 평아는 결국 오주부의 공자에게 시집 가기로 결심한다.

평아를 생각하니 두변의 머릿속에는 소년 시기의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평아는 성격이 불같고 대담했으며,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일을 그에게 저지르기도 했다.

두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흔들며 기억을 떨쳐버리고는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소주인, 여랑의 피부색이 퍼렇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방법이 없을까요?”

두충이 울며 두변을 맞이했다.

평소에 진중하던 두충은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두변을 보자마자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던 두변이 큰 도움이 될 리 있겠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두충에게 마지막 희망은 두변이었다.

두변은 침상 앞으로 다가가 유모의 호흡이 많이 약해졌음을 확인했다. 피부도 좋고 아름답던 얼굴은 퍼렇게 변하고 입술도 검어지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니 눈 흰자위의 모세혈관들도 죄다 터져 있었다.

이건 분명 은모에 중독된 것이었다.

두변은 은자 100냥으로 사온 백두단을 꺼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10분의 1을 덜어낸 후 말했다.

“따뜻한 물 한잔 가져다줘.”

두충이 얼른 가서 따듯한 물을 가져왔다. 그는 모든 희망을 두변에게 걸며 그를 바라봤다.

두변은 백두단의 10분의 1을 따뜻한 물에 넣고 저어 잘 녹인 후, 유모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면 두충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두변이 약을 먹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약을 다 먹이고 난 두변은 긴장되는 눈빛으로 유모의 안색을 살폈다. 시간이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유모를 구하는 방법은 <연단학 기초 이론>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만약 유모가 은모의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면? 좌명이 준 백두단이 큰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것은 두변의 기우였다. 일각이 지나자 유모의 안색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각이 지나고는 그녀의 검은 입술과 핏줄이 모두 터졌던 눈 흰자위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호흡도 점차 강해졌다.

두충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살았어. 살았어. 여랑이 살았어.”

한 시간 후 유모는 눈을 뜨며 깨어났다. 두변을 발견한 그녀는 힘들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소야가 다 컸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눈물을 쏟아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를 두변은 전부 알 수 있었다. 유모는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긴 것에 기뻐한 게 아니라, 두변이 자신을 구해준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두변은 어렸을 때부터 허약한 겁쟁이인 데다 무능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두변이 자신을 구해주니 유모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두변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두변은 유모에게 어떻게 독에 중독되었는지 물었고, 유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닭 한 마리를 사러 가는 길에 물가를 지났는데 갑자기 다리가 저려오더군요. 그 뒤로는 이렇게 되었답니다.”

유모는 줄곧 자신이 강가에서 독사에 물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아주 치밀하게 손을 써 놓았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은모는 희귀한 독물(毒物)이며 지하 깊은 곳에 서식하기 때문에 강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두변은 유모가 불안해할까 봐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오후가 되었다. 두변은 해가 지기 전에 학원에 돌아가려고 두충 부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유모, 일단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내가 학원에 돌아가서 산장께 보고하고 며칠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간호할게.”

두변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며칠간 유모 집에서 머무르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일 테니 빨리 환관 학원에 돌아간 다음 이위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유모를 학원 안으로 데리고 와서 보호를 받게 해야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두변이 유모를 구할 수 있었지만, 상대방이 내일 다시 독으로 유모를 해칠 수도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독사에 물린 건데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저 때문에 소야가 공부를 제대로 못 하잖아요. 별일도 아닌데 이 대인에게 빚을 지는 것도 마음에 걸려요.”

“괜찮아. 그럼 먼저 가볼게.”

두변이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심히 가세요. 두충. 소야 좀 바래다 드려요.”

유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가 방금 깨어난 터라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말을 명령처럼 받드는 두충은 조금 난감해했다.

“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두변은 혼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유모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변, 며칠 후면 칠석날이니까 그때 집에 와요. 평아도 그때 오기로 했으니까.”

“알겠어.”

두변이 대답했다.

어쨌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유모 집에서 나온 두변은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두변은 조심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고, 계림성을 빠져나올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성문을 나온 두변은 수풀이 우거지고 외진 곳만 골라서 걸었다. 조금 길을 돌아서 환관 학원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문에서 5리도 채 가지 않아서 작은 숲을 지날 때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흐흐.”

귓가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검은 그림자가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두변은 이 상황에 대비해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었다.

백천,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구나. 강호를 누비다 보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지.

두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가 두변의 뒤통수를 쳤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