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꿈의 세계의 또 다른 기능
두변은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매우 우울해 보였다.
“받아들이기 힘드냐?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처럼 괴롭겠지.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잘 이해한다. 너는 아마도 내가 겪은 일들을 모르겠지만.”
이위가 탄식하며 말했다.
조금 망설이던 이위는 두변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 보고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게 왜 수염이 있는지, 왜 환관에게 수염이 자라는지, 네겐 줄곧 의문이었을 게다. 그 이유는 내가 서른이 되어서 거세를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나는 기병(騎兵) 천호(千戶)였다. 서른 살도 안 돼서 기병 천호가 되었지. 그때 내가 얼마나 우수한 인재였는지 너도 감이 오겠지. 앞길도 창창하고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부인과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
이위는 매우 생동감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비참한 이야기였다.
이위는 평민 출신이지만 천부적인 재능 덕분에 군의 한 무학 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열아홉 살에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대녕 왕조 북방군의 정예 척후병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전투에서 적군을 베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군의 수령을 의부로 모시게 되었다. 그는 스물셋에 최정예 기병 백호(百戶)가 되었고 고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위의 앞길은 탄탄대로였고, 마흔다섯이 되기도 전에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대군을 통솔할 수도 있었다.
이어서 이위는 이문회와 서로 친분을 맺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북방군단의 기병 천호였다. 이문회 대인은 황제의 어명을 전하는 환관으로 군영에 온 적이 있다. 그때 나와 다른 장수들은 환관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에게 대놓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황제의 어명을 받은 후 장군은 내게 이문회를 배웅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길에서 갑자기 북로(北虜)의 습격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싸워 적군을 몰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금은 친분이 생겼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이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때 나는 매우 순진했기 때문에 이문회에게 ‘형님처럼 유능한 인재가 엄당에 들어가다니, 정말 아쉽습니다.’고 말했지만 이문회 대인은 그저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위는 젊은 나이임에도 순조롭게 뜻을 이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위가 서른이 되던 해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세도가의 아들이 이위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는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했다. 먼저 이위에게 직접적으로 아내를 바치고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했지만, 이위가 제안을 거절했다. 심지어 이위는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주먹을 날려 상대방의 얼굴 뼈를 함몰시켰다.
그 후, 이위는 이민족과 모반을 꾸민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온 가족이 모두 몰살당했다. 부모와 처자식까지 예외는 없었고, 이위 자신도 능지처참을 선고받았다.
“모든 사람이 내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를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 내 선생과 수령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수령은 오히려 막사에서 함정을 파놓고 나를 잡으려 했지. 그때 정말 절망했다. 마치 내 주위가 모두 어둠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 엄당이 내 누명을 벗겨주고 나를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내 복수를 도와줬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이위는 처량하게 웃었다.
“그저 이문회 대인과 말 몇 마디 섞었을 뿐이고, 단 한 차례 전투를 같이했을 뿐이라 친분이 돈독하다 하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이문회 대인은 내 소식을 듣자마자 동창 대도독 앞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을 꿇었다. 이문회는 대도독이 신임하는 의자였고, 결국 대도독도 이문회의 고집을 꺽진 못했지. 그래서 그들이 이 일에 개입해 나를 구해주고 누명을 깨끗이 씻어줬다.”
두변의 마음속에 있던 이문회에 대한 형상이 순간 입체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위에 대한 형상도 풍부해지고 더 강렬해졌다. 이런 큰 불행을 겪었지만 이위의 마음에는 여전히 정의감이 충만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두변을 구해주었을 것이다. 비록 두변의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이위는 줄곧 두변에게 동정심을 가졌고 다른 엄당 사람들처럼 이익을 좇거나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엄당에 이 같은 인재가 있기 때문에, 3대 세력 중에서 엄당이 가장 약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감옥에서 나오니 부모와 처자식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 그 모든 것을.
그래서 이문회 대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거세한 후 그동안 무시했던 엄당에 스스로 들어와 한평생 이문회 대인을 보필하기로 했다.”
이위는 이문회가 가장 신임하는 심복이지만 학원의 기마술 교관을 맡았을 뿐 다른 중요한 임무는 맡지 못했다.
“내 꿈은 대녕 왕조의 최고의 사령관이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북로를 토벌하며 이름을 떨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엄당으로 몰아세웠다. 난 후회도 없고 원망도 하지 않지만, 결국 내 꿈은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네가 처한 상황이 나와 비슷하다는 거다. 나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두변은 이위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운이 훨씬 좋았다.
이위는 글썽이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내 비참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받아들이기 좀 수월해졌느냐? 포기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학원에서 쫓겨나는 것도 매우 고통스럽지. 그래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이다.”
두변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많은 걸 설명할 수는 없었다.
“몸 관리 잘하거라. 이만 가마.”
이위가 문 앞에 다다라서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 그래. 산장께서 네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다. 너는 산장의 의자다. 영원히.”
방은 곧 조용해졌다. 약탕에 몸을 담근 상태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던 두변은 이위가 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위가 들려준 이야기는 확실히 두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두변은 이야기 속의 이문회를 의부로 모시길 원했다. 또 이런 엄당을 빛내기 위해 명예를 다투고 싶었다.
그래서 두변은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보름 후의 내기에서 백천을 이겨야 했다.
6개월 후의 졸업시험에서 1등을 해야 했다.
동창에 들어가서, 엄당을 대표하는 인재가 되고, 또 이문회의 절대적인 자부심이 되고 싶었다.
약탕이 식어가자 두변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끊어질 듯 아파서,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목욕통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옷을 입는 데만 거의 일각의 시간이 걸렸다. 이 상태대로라면 향후 열흘 동안은 걷지도 못할 테니 계속 수련하기란 불가능했다.
두변의 유일한 희망은 ‘꿈’이었다. 두변은 꿈에서 뇌의 사용 영역뿐 아니라 신체 단련 방면에서도 큰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이것만이 두변을 구해줄 수 있었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이문회가 특별히 제공해준 치료공간에 머물렀다. 대충 끼니를 때운 후,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며 빨리 꿈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방금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됐지만, 두변은 너무 피곤했던 터라 침상에 눕자마자 잠에 빠지면서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 두변은 연력을 수련하지 않았다.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약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렇지만 꿈의 세계에서의 약탕은 식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근맥이 약탕과 표태유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했다.
현실 세계에서 약탕에 몸을 담그거나 표태유를 바르면 모두 피동적으로 흡수되기에 흡수율이 매우 낮았다. 체내에 흡수된 기운들은 대부분 근육에서 헛되이 사용되고 극히 소량만이 근맥에 들어와 영양을 공급하고 몸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는 달랐다. 두변의 손상된 근맥이 능동적으로 약탕과 표태유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5푼도 안 되던 효율이 거의 10할까지 상승했다. 순식간에 회복 속도가 열 배 내지 스무 배가량 상승한 셈이었다. 두변은 1분마다 근맥의 상처가 호전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꿈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두변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점차 옅어지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져서는 이내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두변은 그렇게 여덟 시간을 내리 잤다.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온몸의 통증이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두변은 벌떡 일어나 앉은 다음 주먹을 휘둘러봤다. 여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원래 십여 일이 지난 후에야 회복할 수 있던 근맥의 손상들이 여덟 시간 만에 완전히 치유된 것이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두변은 자신의 힘이 더 강해졌음이 느껴지자, 어서 빨리 그 힘을 사용해보고 싶었다.
마침 방 안에는 50근에서 500근에 이르는 석쇄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두변은 어제 각각 25근, 합이 50근에 달하는 물통을 힘겹게 들어 올렸기 때문에 먼저 50근 석쇄를 골랐다. 깊게 숨을 들이쉰 후 양손으로 석쇄를 잡고 힘껏 들어 올렸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또 한 번 발생했다. 50근 석쇄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거우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두변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무게가 잘못 표시된 건 아닐까? 왜 50근 석쇄가 30근처럼 쉽게 들리는 거지?
두변은 어제 온몸을 휘청거리며 25근 물통 두 개를 겨우 들어 올리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쉽게 들어 올리는 데다, 심지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어서 두변은 70근 석쇄로 눈을 돌렸다. 양손에 석쇄 손잡이를 잡고 숨을 깊게 들이쉰 후 힘껏 들어 올렸다.
조금 전보다는 비교적 힘이 들긴 했지만 자세는 흔들림 없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어서 70근짜리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는데, 안정감을 잃지 않았다.
두변은 바로 80근 석쇄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상당히 많이 힘들었다. 머리 위까지 석쇄를 들어 올리긴 했으나 자세가 조금 흐트러지는 걸 보니, 여기까지가 두변의 한계인 듯 보였다.
그 어떠한 말로도 지금 두변이 느끼는 희열을 형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 꿈의 세계는 정말 끝내주는 능력이지 않은가. 단 하룻밤 만에 역량을 40근에서 80근까지 두 배나 끌어 올리다니, 그야말로 실로 엄청난 진전이었다.
두변은 꿈속에서 근맥과 골격이 약탕과 표태유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두변의 기초가 워낙 약했던 탓에 바로 두 배의 효율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니, 뜻밖의 행운이라 할 만했다.
두변이 기쁨에 심취해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 왔다.”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났다.
두변은 침상으로 돌아간 후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찬합을 든 환관이 들어왔다. 환관은 침상에 누워있는 두변을 보고는 깔보는 듯 냉소를 지었다.
이자는 작년 졸업시험에서 뒤에서 30등으로 졸업한 환관으로, 학원에서 취사 담당 환관이 되었다.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한 학원 꼴등인 두변을 보게 되니 우월감을 느낀 것이다.
자신보다 더 구제 불능인 두변은 머지않아 자신보다 더 낮은 잡역을 맡게 될 거라 여겼다. 자신은 밥을 짓고 배달해주는 일을 맡지만, 두변은 틀림없이 대소변을 비우는 일을 할 테니 두변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두변의 시중을 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위 교관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너 참 대단하다. 나한테 네 시중을 들게 하다니. 25근 물통을 들고는 앓아누웠다면서? 용케 살아는 있네?”
취사 환관이 비꼬며 말했다.
두변은 굳이 이런 소인배를 상대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이지만, 충분히 강해진 다음에 이 환관의 따귀를 30대 정도 때려줄 심산이었다. 두변의 마음속에는 작은 장부가 하나 있어서, 누구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반드시 기억해서 나중에 정산해주리라 생각했다.
쾅!
취사 담당 환관이 찬합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