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0화.
석 달 뒤.
“…….”
“…….”
장장 반년 만에 돌아온 집 대문 앞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섣불리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봐야 했다.
해시트는 무슨 말을 해야 이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까 앞이 깜깜해서 그랬고, 이레이는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느라 그랬다.
그러니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바야흐로 유령의 집이 되어 버린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느냐고. 심지어 집 주변엔 관공서에서 설치했으리라 추측되는 출입 금지 팻말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위험 지역]
그러게.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긴 하더라.
서로 승부하듯 말을 아껴 댄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해시트였다.
“이봐. 너……, 저런 것도 퇴치할 수 있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끝이 대문 안쪽을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꿈틀대는 붉은 독초들에게 잠식당한 하얀 이층집을 향한 바였다.
이레이는 씩 웃었다.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집을 버리자. 사람들 기억은 바로 지울게.”
“…….”
“끝. 지웠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었다. 해시트는 거두절미 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버리긴 뭘 버려! 저 안에 내 연구 자료 다 들어 있거든? 당장 들어가서 꺼내 와!”
“윽, 저 지경이면 이미 연구 자료고 책이고 전부 녹았을걸. 혹시 종이 죽 같은 것도 괜찮다면…….”
흔들리는 동공으로 보아 핑계가 아니라 진담이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문가의 소견을 듣자마자 해시트의 얼굴에도 우르릉 쾅 천둥이 쳤다.
“말도 안 돼……. 지난 삼 년간의 내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됐단 소리냐……?”
만약 본인이 물거품이 됐대도 그토록 가련한 표정을 짓지는 못했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있을쏘냐, 이레이는 이미 몇 번이나 깨우친 적 있는 삶의 진리를 되뇌며 차분하게 그녀를 달랬다.
“연구 결과 다 나왔다면서. 공식을 다시 정립하는 거라면 나도 도와줄게.”
“이런 미친놈! 네놈은 내 두뇌 용량이 무슨 도서관 한 채만 한 줄 알아?!”
급기야 그녀는 이레이의 멱살을 쥔 채 짤짤 흔들어 대기에 이르렀다. 한데 아무리 용써 봤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게 더 열받아서, 다시 홱 밀쳐 버리곤 그나마 승산 있는 입씨름으로 복귀했다.
“솔직히 말해라. 너 일부러 그랬지.”
“아닌데. 우연히 쇠사슬이 풀렸나 보지.”
“일부러 제대로 안 감은 거 아니고?”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저 꼴 나면 병원 문 안 열어도 되니까!”
“오, 그런 기쁜 소식이…….”
“역시 너였군.”
“절대로 아냐.”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 집 주인분들 되십니까?”
낯선 이의 목소리는 매우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치솟는 불길함에 해시트는 황급히 망토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레이가 그녀를 제 뒤로 숨기고는 짜증 가득한 눈으로 낯선 이를 상대했다.
“뭐야.”
“저는 지나가던 모험가입니다만.”
“우린 지나가던 행인이다.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새빨간 거짓말쯤이야 하나도 거리낄 것 없다는 투였다. 그야 좀 전에 동네 사람들 기억도 다 지워 버렸겠다, 마침 저택은 독초에 잠식당해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그 안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가능성도 전무했다.
자신을 모험가라고 밝힌 갈색 머리 청년은 이레이의 기세에 눌린 듯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집에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건 맞죠?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이레이와 해시트는 그를 무시하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이쪽으로 가자.”
“응.”
“잠깐만요!”
모험가는 끈질겼다. 이만큼 무시당했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후다닥 그들의 뒤로 따라붙어 속도를 맞췄다.
“다름이 아니라 이 집에 살던 저명한 학자가 마물을 불러왔다는 신고가 접수되어서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잠시만 이야기를……!”
“……마물?”
우뚝. 그 말에 이레이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상하군. 그런 단어가 언제 인간들 사이에 퍼졌지……?”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와 달리 해시트는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는 중이었다. 마물 같은 소리! 팔짝 뛰게 억울한 것과는 별개로 그들이 살던 집을 보면 아무렴 그 표현이 딱이로구나 싶어졌지만.
암만 그래도 마물에게 잡아먹힌 피해자가 아닌 마물을 불러낸 범인으로 몰릴 것까지 있느냔 말이다. 그녀의 탄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험가는 발랄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여기요. 이것 좀 보십시오. 학자가 실종되기 직전에 집 담장에 끼워 두었다는 쪽지입니다. 동료 학자들에게 남긴 것이라는데, 내용이 너무 수상하지 않습니까? 참고로 학자의 외양은 보고 있으면 숨 쉬는 걸 잊어버릴 만큼 아름답다고 합니다. 어쩌면 평범한 인간이 아닐 수도 있죠.”
“……나는 잠시 압도적인 존재들이 도사리는 곳으로 탐방을 다녀오겠소. 진리에 좀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쪽지에 적힌 글귀를 소리 내어 읽은 이레이가 맥없이 실소했다.
“이것 참 오해받기 딱 좋군. 안 그래? 자기야.”
턱, 해시트의 어깨에 팔을 감아 온다. 해시트는 들리지 않게 이를 갈았다.
“작작 해라.”
그래 봐야 이레이의 손은 떨어져 나갈 줄 몰랐음이다. 재잘거리는 모험가도 멈출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듣기론 학자와 함께 살던 남자 의사도 한 명 있었다는군요. 둘은 얼핏 보기엔 연인 같으면서도 쉽게 부부처럼 보이지는 않았대요. 뭐랄까…… 거스를 수 없는 신분 차이가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요?”
“역시 인간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니까.”
“네?”
“아니야. 계속해 봐.”
이레이가 못내 흥미로운 기색으로 손짓했다. 아마 해시트가 연신 헛웃음을 치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험가만이 신이 나 있었다.
“어쨌든! 의사 쪽은 인상이 아주 험악한 데다가 성격은 그에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더러웠다는데요, 그런데도 덩치가 제 절반만 한 학자에게 매 잡혀 살았다나 봐요. 게다가 의술 실력은 마치 신이 내린 듯하여 무덤 자리 파 둔 병자까지 번번이 살려 내곤 했다더군요.”
그런데 듣자 듣자 하니까……, 이야기 중간부터 해시트와 이레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계속 듣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군.”
“일단 들어 보지.”
“그래, 일단. 그래서?”
이레이가 모험가를 향해 턱짓했다. 갑자기 모험가가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췄다.
“그게 여기서부턴 비밀인데요.”
잠깐, 비밀이면 하지 마! 이레이와 해시트가 거의 동시에 외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고…… 으음, 좋게 풀이해 봐야 전설이긴 한데요…….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저 어릴 때 무릎에 앉혀 놓고 해 주셨던 옛날 얘기예요. 제 생각엔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그 전설과 관련이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놈들은 하지 말라면 더 하더라. 그들은 한숨 쉬며 서로의 어깨와 머리에 체중을 실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려나.
“선생님들께서는 혹시 못 들어 보셨나요?”
“뭘.”
“못 들어 봤는데.”
모르긴 몰라도 못 들어봤을 게 분명하다만, 억지 호기심을 쥐어짜 내본들 없던 흥미가 생길 리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험가는 시큰둥한 두 사람의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저 방긋 볼을 부풀리며,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미소로 화답했을 뿐이다.
“옛 제국의 마지막 황제와 그녀의 드래곤 연인에 대해서 말예요.”
“…….”
“…….”
이레이와 해시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깜빡. 눈꺼풀이 제자리를 왕복했다. 새삼스레 바라본 모험가의 얼굴에 누군가가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도 윤기 나는 갈색이고, 말투도 상당히……. 그들은 또 거의 동시에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쥰 이 새끼가.”
“쥰 이 녀석이.”
“어? 저희 증조할머니 성함을 두 분이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해 줄 말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과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더 중요한 문제였다.
두 사람은 잠시 모험가를 바라보다가 퍼뜩 서로의 눈빛을 살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결국 생각하는 바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도 필요 없었다.
성큼, 해시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걷어 내며.
“너 이름이 뭐냐.”
모험가는 갑자기 마주한 ‘숨 쉬는 걸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도망치거나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아, 제 이름은 메이니에입니다.”
“특이한 이름이군.”
“가명이에요. 대륙 어디에서나 쓸 수 있도록 여행길에 오르면서 새로 지었어요. 본명은 발음하기가 어렵거든요. 라카스카다타라쥬이라고 해요.”
“뭐 그딴 이름이…….”
“저희 집 사람들이 대부분 외자 이름이라서 저만 특별히. 하하.”
“가명은 네가 직접 지었나?”
“아뇨. 신전에서 만난 사제님께서 지어 주셨어요. 무척 성스럽게 생기신 분이었죠.”
뭐 그딴 게 궁금해서 깔아 둔 서두가 아니었다. 단지 이 상황이 전부 신기했을 뿐. 해시트는 헛웃음 치며 질문을 연달았다.
“나이는?”
“열일곱이요.”
“여행은 처음이냐?”
“네.”
“첫 여행부터 겁도 없이 고향을 떠나왔구나.”
“세계를 돌아다니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그래…….”
그렇군. 해시트가 이레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인간 세상에 그들의 접점이 남아 있는 모양이라면서. 이레이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동료가 필요하겠네.”
단지, 겸사겸사 잘됐다는 말투로.
어차피 집은 독초에게 점거당했고 알테 공국엔 아직 사 둔 땅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거나 새집을 지으려면 몇 달은 족히 필요할 텐데, 시간이 멈춰 버린 인간이나 시간을 헤아릴 필요 없는 드래곤에게 있어 몇 달이든 몇 년이든 혹은 몇십 년이든 체감상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짧은 망설임을 뒤로한 채 해시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다. 메이니에.”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어색한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해시트. 그리고 여기 이 남자 이름은 이레이라고 하는데, 아,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게 너무 오래전이라 금방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니에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기 때문에 중간에 멈출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가 믿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다.
“우리는 네 할머니와 인연이 조금…….”
그래서 ‘메이니에’라는 이름이 고대어로 ‘쩨쩨한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로부터 아주, 아주,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다. 저 위에 계신 어떤 쩨쩨한 분께서 그들을 얄밉게 여기시는지 어여삐 여기시는지 알 수가 없어, 여전히 하릴없이 궁금해하던 어느 날에.
― fin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