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02화 (101/104)

에필로그 8화.

다리를 절뚝이면서 여기까지 잘도 나왔는가. 여자에겐 표정이 없었지만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어김없이 슬쩍 고개를 까딱여 왔다. 해시트는 소리 내어 인사했다.

“덕분에 잘 쉬다 가오.”

“…….”

역시 대답은 없고, 머리카락만 바람결에 흩날렸다.

여자의 하얀 금발은 해변의 모래사장과 닮아 있었다. 등 뒤에서 철썩거리는 느린 파도 같기도 했다. 저 바닷속을 부유하던 수많은 역린들은 고작 한 조각의 조약돌이 되어 섬으로 돌아왔다. 그 파도에 떠밀려.

“해스, 이제 가자.”

그리고 감정을 가진 이들은 그만 떠나야 할 때였다.

해시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이레이의 손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 위에 제 손을 얹어 멈췄다.

“잠깐만, 이레이.”

충동적이었다.

이레이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서. 그에 기분이 좋다 싫다, 둘 중에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좋은 쪽이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해시트는 그의 손이 차가웠을 때도 좋았다. 망설임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여자는 감정을 잃어버린 자신의 상태에 퍽 만족하며 살아왔다.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아니, 어쩌면 그편이…….

그러나 기나긴 망설임 끝에 해시트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카렌.”

더럭 내뱉은 뒤엔 겸연쩍게 웃으며 천천히 부연했다.

“내 생각엔 그게 당신의 이름인 것 같소. 카렌.”

“…….”

그러자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역시나 아무 말이 없었다. 해시트는 굳이 기다리지 않고 이레이와 함께 배에 올랐다.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 안의 많은 것들이 낯설어졌다.

아마 그들의 배가 기적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하게 바다를 가른 이유는 뒤늦게 울려 퍼진 여자의 인사를 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맞아. 그게 내 이름이었다.”

거봐.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해시트는 말없이 이레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아스라한 여자의, 아니, 카렌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또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

“부모님 연애담을 직접 들은 소감이 어때?”

“내가 고인 된 아버지께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응? 왜 갑자기?”

“끽해야 일기장이라고만 생각했지 연애편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니까. 그런데 출판까지 해 버린 데다가 심지어 아들인 내가 그걸 닳도록 잃었다니, 진짜 토할 것 같다. 욱.”

“여기서 토하기만 해. 바다에 던져 버리겠다.”

“오, 팔꿈치까지는 들 수 있으려나? 어디 던져 봐.”

이레이의 입술이 피식 호선을 그려 냈다. 명백한 도발에 해시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쏘아봤다.

“해 보라면 못 할 줄 알고.”

“그러니까 해 보…… 야. 너 뭐 해.”

“던져 보라며.”

휙! 해시트의 주먹이 배 바깥을 향해 포물선을 그려 냈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반지는 훨씬 더 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그 흔한 풍덩, 효과음도 없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너 미쳤어?”

이레이는 당장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입수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착각도 자유라는 말이 딱이다. 해시트는 더럭 그의 등을 끌어안아 버렸다.

“버려도 돼.”

그의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해시트의 팔에 손을 얹어 왔다. 질문을 떼기까지는 훨씬 더 오래 걸렸다.

“괜찮겠나?”

“응. 추억이 아니라 미련이었다.”

그간 흘러가는 시간이 덧없어 미련하게 붙들고 있었다.

애써 습관으로 미뤘다. 그런데 이 뻔뻔한 드래곤이 미루고 미룬 끝에 결국 먼저 ‘사과’라는 걸 해 왔으니, 여기서 더 미뤘다간 그녀가 얼마나 더 못된 사람이 될지는 안 봐도 선했다. 아니야. 사실은 그것도 다 핑계고……. 해시트는 그냥 그의 등에 이마를 문질렀다.

“괜찮아. 처음부터 괜찮았다.”

“……미안해.”

“괜찮다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살아 있는 동안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 보마.”

결국 오늘 그녀가 바다에 내던진 것은 엄밀히 말해 추억도 미련도 아니요, 그저 해시트와 인간 세상을 이어 주는 마지막 접점이었던 셈이다.

좋다. 지금까지의 생을 이 바다에 던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찾아온 새 삶엔 대의니 희생이니 생각하지 말고……. 음, 아무리 그래도, 새 삶은 너를 위해서 살겠다는 둥 그따위 소름 끼치는 고백일랑 낯간지럽고, 혓바닥 따갑고, 상상만 해도 귀 시려서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지만.

“…….”

다행히 이레이도 말없이 그녀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욕심내지는 않겠다는 듯이.

해시트는 푸스스 웃다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긴 세월 무겁던 자리가 갑자기 비어 허전했던 탓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길 바랐다. 그때까지는 너른 등에 기대 쉬어 보기로 했다.

“아, 맞다. 이레이.”

“응?”

“너 내 이름에 붙은 저주인지 뭔지, 그거 푼답시고 괜히 머리 쓰지 마라.”

퍼뜩 미친 걱정에 경고하기 무섭게 이레이가 대번 까칠해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안 쓰게 생겼나? 그분께서 그렇게 속이 좁다 하시면서 사방팔방 소문을 다 내고 계신데.”

“그래서 네가 뭘 어쩌겠다고.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해 봐야지. 나도 악마는 만나 본 적 없지만 필요하다면.”

“허……. 이거 이제 보니 순 멍청이였군.”

이 뒤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내가 옳네 네가 옳네 마구 겨뤄 대는 꼴이었다. 이레이의 눈빛이 불퉁해졌다.

“말이라도 감동했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실까?”

“어지간히 멍청해야지!”

해시트는 갖은 짜증을 내며 그의 등에서 떨어져 나왔다. 못내 아쉬웠는지 엉거주춤 붙잡는 손길도 뿌리치고 이레이와 마주 보았다.

“카렌의 언질을 벌써 잊었나?”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언제 언질을…….”

퍽 억울해하던 이레이의 말끝이 도중에 흐려졌다. 이런, 낭패감에 젖은 탄식이 이어진다. 그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단다. 너무 간단하거든.”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천기누설을 피해 그녀가 건네준 실마리였다는 사실을.

해시트는 냉큼 쐐기를 박았다.

“그래. 바보야. 내가 그 이름을 버리면 그만이잖아.”

여전히 신앙심 같은 건 없었지만 더 이상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게 된 고로, 그 정도는 신의 편의를 봐주어도 괜찮을 성싶다. 어차피 미케나 황조의 이름으로 그녀를 불러 줄 사람도 이제 없는걸. 진작 멸족한 황제의 이름 따위 무어 대수라고.

별안간 이레이는 묘하게 멋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 너한테 되게 친절했군.”

“뭐래. 너한테 친절했던 거겠지.”

“……그런가.”

입술을 깨무는 이레이를 뒤로하고 해시트는 난간에 두 팔을 걸쳤다.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나름 맞을 만했다. 금세 옆자리로 다가온 이레이가 그녀와 같은 자세를 취하자, 해시트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제대로 인사하고 오지 그래?”

까딱, 그녀가 턱 끝으로 가리킨 방향에 반짝이는 붉은 섬이 있었다. 그새 손바닥 하나로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모습이 아쉬웠다.

이레이는 섬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듯 잠시 눈자위를 좁혔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괜찮아. 배 돌리는 게 더 귀찮군.”

“금방 갔다 올 수 있으면서.”

“…….”

이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해시트의 진심을 좇는 눈동자에 얕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러든 말든 해시트의 시선은 줄곧 이레이가 아닌 바다 저편에 고정된 채였다. 그러나 즐거운 기색을 감추진 않았다. 담담하고 홀가분한 미소를 만면에 퍼뜨린다. 그런 눈으로 흘긋, 뒤늦게 이레이를 일별했다.

“왜. 아직도 나한테 보여 주기 싫으냐?”

마치 얼마나 더 확신을 주어야 두려워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처럼 말이다.

곧 이레이의 입가에도 시시각각 웃음이 번져 나갔다. 처음엔 얼떨떨했다가 나중엔 제법 설레는 티가 났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또다시 멋쩍어져서 큰 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네가 기절할까 봐 그러지.”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군. 그리 심약한 이 몸이 카렌 옆에선 어떻게 숙면했게?”

“음, 하긴. 심지어 그냥 잠만 잔 것도 아니네.”

“미친놈아, 좀 닥쳐.”

해시트가 당장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튼 잘 나가다가도 늘 이런 식이다. 속으로 두덜거린 순간 이레이가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투덜거렸다.

“잘 나가다가 또 이런 식인가.”

누가 할 소릴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럴 틈이 없었다. 곧장 이레이가 덧붙였다.

“보고 더 반하면 책임지기 힘들어서.”

떼어 낸 해시트의 손 위에 길게 입 맞출 적에, 씨익 끌어당긴 입꼬리가 여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해 보였다. 해시트도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봤자 네 녀석 얼굴인데 뭐 얼마나 특별하다고.”

“지금 내 얼굴이 별로라는 건가?”

“우리가 얼굴 보고 산 지 몇 년인데 지겨울 때도 됐지.”

“전혀? 안 됐는데?”

“한 십 년쯤 안 보고 살면 새삼스러워지려나.”

“진짜 안 되겠네. 좋아. 잠깐 눈 감고 있어 봐.”

“뜸 들이긴.”

벼르고 벼른 만큼 도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한차례 카렌의 본모습을 마주한 뒤다. 아무렴 처음이 놀랍지 설마 두 번째가 더하겠냐는 자신감이었다. 드래곤도 인간처럼 저마다 생김새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인간이 팔다리가 두 개씩이고 눈 코 입 박혀 있는 위치는 비슷비슷하듯이 카렌이나 이레이나 외양이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의 비늘이 어떤 붉은 빛으로 빛나는지는 질리도록 확인하지 않았나. 해시트는 가능한 한 시큰둥하게 이레이의 본모습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잠시 이레이의 요구대로 눈을 감고 있자니, 찰나 번쩍이는 섬광이 어둠을 적셨다 사라졌다. 빛이 지나간 자리엔 어둠이 더욱 깊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태양을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운 느낌. 익숙하다. 그게 눈을 떠도 좋다는 신호라는 것을 해시트는 쉽게 알아차렸다. 이내 그녀가 왼쪽 눈꺼풀을 살그머니 들어 올리며 이레이의 눈치를 봤다.

“…….”

흐읍,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헛숨을 삼켰다.

[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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