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7화.
여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이, 그래서 이제는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이 가진 힘, 너는 그것을 간과하고 수도 없이 속삭였을 것이다. ‘오래 살아라.’ 그 말에 영혼이 생겨 하늘에 닿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해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그대 육신의 시간이 멈추었던 그날부터 그대는 하루하루 인간사의 허망함만을 좇았을 것이다. 학자라. 언젠간 현자가 되겠지. 하기야 인간의 그릇으로 이 긴 시간을 버티기 위해선 진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겠구나. 벌써부터 두려움이 가득하다니 애석한 일이다. 저치는 그대가 느끼는 허망함의 반 푼조차 알지 못할 텐데, 원망스럽지 않느냐?”
해시트는 망설임 없이 턱을 치켜들었다.
“전혀. 모르고 그랬는데 어쩌겠소.”
“용서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해랄까. 그래 봐야 당신 말처럼 인간의 그릇이 아니오. 한계를 다하는 순간 바스러질 테고 결국 이레이 혼자 남게 될 텐데 원망보다는 애달파 해야겠지.”
“위선이로다. 그대는 우리와 달리 뿌리 내리지 않고는 영혼의 허기짐을 달랠 수 없도록 설계됐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 번번이 터전을 떠나는 삶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나.”
“좀 귀찮긴 하지만 이 섬의 독초만큼 귀찮지는 않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무례는 용서해 드리리다.”
주고받는 족족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그녀의 속에서 수도 없는 갈등 끝에 내려진 결론일 수도, 혹은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이레이가 비난받는 날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온 변론일 수도 있었다.
기실 여자의 말마따나 그는 매우 이기적인 드래곤이었으나 제게 쏟아지는 비난을 반박하려는 의지만큼은 아주 희박한 편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도 안 미안하다며 박박 우기는 것뿐.
해시트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여자에게 핀잔을 돌렸다.
“무엇보다 드래곤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교육시켜 주지 않은 건 당신이잖소. 따지자면 저놈 혼자 미안해할 일도 아니오.”
그 순간, 여자의 푸른 눈이 반짝 뜨였다.
“그래, 교육. 안다면 저지르지 못하는 짓. 바로 그것이다.”
“…….”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질적인 광채가 해시트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또다시 홀릴 듯한 기분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만이 선명히 공간을 잠식한다.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린 한에게 죄짓지 못하였단다.”
“…….”
어느덧 여자는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는 양 천천히 미소 짓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다시 가물어질 제 꼭 그 안으로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알을 낳아 두고 떠나면서 말했지. ‘태어나 봤자 필요 없는 감정으로 인해 고통만을 배울 존재요. 아직은 생명이 깃들기 전이니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망치로 깨부수시오. 그 안에 든 보석일랑 가져다 팔고 그 돈으로 평생을 놀고먹으시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비는 소원이외다.’ 몰랐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주제에 십 년 동안 알을 품어 너를 태어나게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제 여자의 시선은 오도카니 이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색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서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 해시트는 뒤이은 이레이의 구시렁거림을 듣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려 했단 소리를 자랑스럽게도 하시는군.”
“어쨌든 태어나지 않았니.”
“죽일 거면 직접 죽이든가, 왜 남에게 떠넘겼나? 의사인 양반이 퍽이나 제 자식을 죽일 수 있었겠다고.”
“내가 자웅동체로 혼자 낳은 자식도 아닌데 상대방에게 슬픔 좀 전가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핑계 대지 마. 당신은 슬픔이 뭔지도 모르잖아.”
“알았지. 그 당시에는.”
“알긴 뭘, ……알았다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던 이레이가 일순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때마침 해시트의 머릿속으로는 무수한 조약돌로 반짝이던 섬의 모래사장이 물처럼 밀려들었다. 오색찬란한 빛깔들,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던 황홀함.
그 황홀경에 알맞게 신비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허공을 짚어 갔다.
“린 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나의 역린을 뽑아 바다에 빠뜨렸다.”
풍덩! 오래된 기억이 보이지 않는 파도에 실려 해변으로 밀려든다.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지. 하지만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긴 금발을 걷어 내 발목을 드러냈다. 수풀에 파묻힌 맨발에 왼쪽 뒤꿈치 바로 윗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다. 너무나 오래된 상처였다. 결코 새살이 돋아날 것 같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흉했다. 그녀는 후유증으로 평생을 절뚝이며 살았을 게 틀림없었다.
파도에 떠밀려 온 수많은 조약돌 중에 드래곤의 역린은 몇이나 되었을까.
해시트는 그저 상상할 따름이었다.
다들 그렇게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며 뿌리 깊은 감정을 뽑아내었을까. 그렇다면 그곳은 무덤이었나…….
혹시 너도 그랬을까.
울컥 목이 메었을 때, 여자가 이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레이 린.”
“…….”
해시트는 이레이의 침묵을 지켜보았다. 미처 말을 잊었거나, 아직 말을 고르는 중이거나.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깊이 이해하면서.
역린을 가진 드래곤들이란 대개 그런 선택을 하는가 보지.
묻고픈 말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그는 한마디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저 과거의 고통에 사무친 여자의 목소리만이 사라진 감정을 뒤로한 채 현실을 애석해하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너도 나처럼 진작 역린을 뽑아 없앴어야 했다. 그랬다면 연모하는 인간에게 원망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살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내 실수를 되돌릴 방법이 있겠지. 찾으면 된다.”
긴 침묵 끝에 이레이가 내놓은 대답은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역린을 뽑은 적이 있다고, 그런데 다시 자라 감정을 되찾고 말았다고, 역린을 잃어버렸던 그 시절에도 이상하게도 사랑이 눈에 밟혀 견딜 수 없었다거나, 그 말고도 가타부타 기나긴 이야기를 아무것도 늘어놓지 않고서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해시트는 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껍질 안을 비워 낸 뒤에야 오롯이 평안해진 여자를 위하여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한시라도 빨리 섬을 떠나 주는 것뿐이었기에.
*
“미안해.”
“응? 평생 사과 안 할 거라면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미안하다는 말에 해시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변으로 나가기 위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선 여자가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배웅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쪼록 섬의 붉은 넝쿨이 해시트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마지막까지 배려해 주려는 듯했다.
그리고 이레이는 민망해 보였다. 곧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슬슬 이사 갈 때가 됐어.”
“그러네. 바샤마일에서도 벌써 오 년 넘게 살았으니까.”
“나름 살기 괜찮았는데 아쉽군.”
“맞아. 뒷마당에 거대 지렁이들이 묻혀 있었던 것만 빼면.”
“……다음번엔 미케나로 갈까? 어때.”
해시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금 전의 미안하다는 말도 그랬다. 여태 억지로 미뤄 왔던 것을 지금이라도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다급했을 것이다.
이렇게 알기 쉬운 놈이었나, 문득 해시트는 이레이의 속이 투명해진 건지 자신의 속이 곰삭아 버린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괜히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글쎄, 그 동네엔 내 동상이 너무 많아서 좀…….”
“아. 그러게, 또 세웠더군. 네 고향 정말 이상해. 전제 국가도 아니면서 무슨 동상이 그렇게 많지? 이러다 네 강령식이라도 벌일까 봐 가끔 걱정된다니까.”
“……네놈은 아무튼 삼 초를 못 가는군.”
“…….”
“됐다. 난 베누스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어.”
“그럼 크샨은…….”
“알테.”
“뭐야? 상관없다더니.”
“그래도 최소한의 기호성은 가려야지. 나는 크샨어 쓰기 싫어.”
해시트는 뻔뻔하게 했던 말을 번복했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는 하나, 황제로 재위하던 내내 죽이네 살리네 으르렁거리던 나라에 가서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 아직까지는 말이다.
다행히 이레이는 그녀의 선택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고, 으쓱 어깨를 들썩이며 가벼운 너스레만을 떨었다.
“이러다 온 대륙을 다 돌아다니겠어.”
“부동산 재벌이 되는 길이지. 다음 집은 내 명의로 해.”
“언젠 아니셨나? 쭉 그래 왔으면서.”
“그렇게 정색하면 내가 뭐가 되나.”
“뭐가 되든. 난 네가 좋아.”
“……실없는 놈.”
결국 떫은 감 씹은 표정이 되어 걸음을 재촉한 건 해시트였다.
그래서 이제 와 밝혀 보자면, 어느 날 자신의 시간이 멈췄음을 깨닫던 순간 그녀가 느낀 감정은 선명한 공포였다. 이 남은 억겁을 당신에 대한 원망 없이 버틸 수 있을지.
“혼자 있게 해 줘.”
“해스.”
“좀 내버려 두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잡히는 모든 물건을 그에게 집어 던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방을 따로 쓰기 시작했고 한번 어긋난 관계는 아무리 완벽하게 복구해도 깨졌던 자국이 비쳤다. 그래도 괜찮을까? 이래도 괜찮은 걸까.
확신이 없어 두렵기만 했다. 그토록 지독한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모든 것을 아닌 척 덮어 버리고 만 이유는, 그래. 이미 이레이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린을 뽑아낸 자리를 부여잡고 죽음과 가까운 절벽으로 비행하는 기분…….
모를 수 없었다. 모르더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도 그랬을 테니까.
“이레이. 그런데 넌 베누스의 왕으로 지낼 때 어땠나? 재미있었나?”
“적성에야 제법 맞았지. 매일 죽이고 고문하는 게 일상인 동네잖아.”
“으음, 하긴. 그땐 역린도 없었을 테니까.”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었더니 금세 해변에 다다랐음이다. 해시트는 배에 오르기 전 물끄러미 뒤를 돌아보았다. 이레이가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한 그 자리에 여전히 여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