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6화.
다음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더구나. 이미 뱉은 말이 있으셔서 어쩔 수 없던 모양이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말이 가진 힘을.”
“세상 말세로군. 그 양반 소갈머리가 완전 밴댕이였잖아.”
“말조심하여라. 듣고 계실 거다.”
“들으라고 해.”
이레이는 어지간히 화가 난 낌새다. 으레 비아냥거리는 장난기조차 없었다. 여자는 그게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린은 있으면서 겁이 없다니 별종이구나.”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 그래서 방법이 뭔데?”
“방법?”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방법이라…….”
“설마 안 물어봤나?”
“그렇다기보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단다. 너무 간단하잖니.”
도통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결국 해시트는 벌떡 일어나 나뭇잎을 걷어 내고 밖으로 나갔다.
이레이가 어떤 여자와 숲 한가운데서 열띤 토론을 주고받고 있었다. 웬 여자냐고 추궁할 필요 없이 정체는 자명했다. 그녀는 바위에 걸터앉은 모습이었는데, 이레이의 뒷모습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해시트는 괜히 손등으로 얼굴을 한 번 어루만진 뒤에야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이레이?”
“아. 깼군.”
바로 이레이가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바위에 걸터앉은 여자도 얼굴을 드러냈다.
한없이 흰색에 가까운 백금발을 발끝까지 늘어뜨린 신비로운 미인. ‘그 여자’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는 간밤 새 인간의 외양으로 변신한 채였다. 망토처럼 긴 회색 원피스를 걸치고서, 가장 예상치 못한 점은 그녀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리가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시종일관 웃거나 찌푸리지 않는 무표정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쌀쌀맞아 보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억양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언성을 높여 댔으니 안 일어날 재간이 있나.”
그러고는 까딱, 해시트를 향해 눈인사한다. 해시트도 더 늦지 않게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잘 잤소.”
하지만 여자에게선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해시트에게 시선을 고정해 둔 채 이레이와 하던 대화를 이어 갔다.
“방법은 알지만 내 입으로 말할 순 없구나.”
“차라리 모른다고 해. 사람 약 올리지 말고.”
“반드시 방법을 알아야만 하나? 어차피 저 애의 시간이 틀어졌을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운명은 의미를 잃었을진대.”
“물론.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셨거든.”
“글쎄. 린 한의 이야기라면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도 하더구나.”
“저어, 둘이 무슨 얘기 중인지 나한테 알려 줄 마음은 없소? 보아하니 내 이야기 같소만.”
해시트가 억지 미소를 띠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라고 어제부터 당사자는 쏙 빼놓고 둘이서 이러쿵저러쿵 심각하게 토론해 대는데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나름 진지한 건의였는데도 이레이와 여자는 즉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레이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해 줘도 되나.”
“네가 결정할 문제로다.”
지켜보던 해시트는 그만 미련을 거두고 빙글 뒤를 돌았다.
“난 배 타고 갈 테니까 넌 날아와라.”
그러나 세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덥석 어깨가 붙들렸다.
“해스!”
“헉…….”
추측건대 한 발만 더 떼었어도 온몸에서 피를 쏟아 냈을 것이다. 어제 보았던 붉은 독초가 어느덧 눈과 심장을 찌를 듯 가까웠다.
심장을 꿰뚫으려던 것은 가까스로 검을 뽑아 썰어 냈고, 눈은 찔리기 직전에 이레이의 손이 다가와 독초를 움켜쥔 참이었다.
“후우…….”
이레이가 떨리는 한숨을 흩트렸다. 동시에 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손에 쥔 줄기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 없앤 뒤에야 버럭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 이거 다 치운 거 아니었나?”
“지능이 낮은 존재다. 인간 스스로 발을 돌렸으니 공격해도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구나. 다시 처리하마.”
이상하게도 여자는 적반하장으로 구는 이레이의 짜증에도 미간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허공을 튕기자 근방까지 다가왔던 독초들이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멀찍이 물러갔다. 해시트는 묘한 위화감을 제쳐 두고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한 여자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의문이 깊어 갔다. 딱히 해시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고맙다는 말에도 일절 기뻐하는 기색이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주는지 모를 노릇이다…….
부모 자식 간의 정 따위 없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을 기울이는 그녀의 머리 위로 대뜸 이레이가 질문을 떨어뜨렸다.
“해스. 네 두 번째 이름, 그거 누가 골라 준 거지?”
“응?”
“‘티플리스’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여자도 그녀의 두 번째 이름을 걸고넘어졌더랬다. 해시트는 갸웃 고개를 기울이다가 대답해 주었다.
“내가 황태자로 책봉될 때 직접 고른 건데.”
“뭐? 왜 하필?”
“티플리스 2세의 업적이 마음에 들었거든.”
덧붙인 순간 웬걸, 이레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미쳤군. 미쳤어. 이런 젠장맞을……!”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너한테 한 거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고! 저기 위에다 대고 한 거야.”
위! 그가 위협적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사이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길래 그녀는 선심껏 반박을 삼켰다. 어차피 잠시 후엔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실직고할 놈이었다.
“해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뭔데 그래?”
“그 티플리스 2세가…… 저 위에 계신 분 여자를 가로챘대. 옛날에.”
위. 이레이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하늘을 가리켰다.
해시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얘기에 그렇게 뜸을 들였나 보다고 생각했다.
“왜 아침부터 헛소리냐.”
“그래.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
전혀 믿지 않는 해시트를 앞에 두고 그는 예상했다는 듯 떨떠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이야기인즉 옛날 옛적……까지는 아니고, 약 삼백칠십여 년 전에 미케나 제국의 티플리스 2세와 ‘신’이라는 작자가 한 여자를 두고 치정극을 벌였다는 숨겨진 야사였다. 크게 실연의 상처를 입은 신은 홧김에 약조하였다는데, 정말로 홧김에.
“앞으로 그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는 반드시 불행해지리라.”
결과적으로 그 운 나쁜 당사자가 해시트라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거짓말이야.”
“사실이란다.”
불쑥 끼어든 여자가 가차 없이 해시트의 부정을 부정했다. 마치 어린아이 타이르듯 나긋한 말투였다. 이레이도 여자와 비슷하게 해시트를 대했다.
“괜히 말해 준 것 같기도 하고…….”
왜들 이래. 해시트는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두 드래곤의 시선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결국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대로 반박해야 했다.
“억울해서 이러는 게 아니고 안 믿겨서 이러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듣자 듣자 하니까…….”
한마디로 전제 조건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내 팔자가 뭐가 사납다는 거요?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았는데. 저기 미케나에 가서 지나가는 어린애 열 명을 붙잡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시오. 열에 여덟은 내 이름을 댈 테니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이 대륙에 나만큼 착실하게 자아실현 한 인간이 또 있을 것 같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필요 이상으로 자만을 내비치긴 했지만,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틀린 구절 하나 없음이라.
막말로 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올라가 천하를 발밑에 두고 호령하였거늘,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위해 장렬하게 이 한 몸 불살랐거늘, 그런 업적을 가지고도 인생이 박복하다는 말로 평가를 절하당한다면 그거야말로 훗날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었다.
여자와 이레이는 잠깐 그대로 서서 해시트를 구경했다. 멀뚱멀뚱. 그러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긍정적인 건 인간의 습성이라지만 역시 신기하군.”
“쟨 좀 심하지. 그 고난과 역경들이 별거 아니었다고 하니 죽도록 힘들었던 나만 억울할밖에.”
이레이가 옳다구나 씁쓸함을 담아 받아쳤다. 그대로 끝날 줄 알았던 대화는 웬일로 여자가 맞장구침으로써 뜻밖의 이름을 뭍에 올렸다.
“린 한도 그랬다.”
“…….”
“너무 긍정적이라서, 내가 떠난 이후에도 십 년이나 알을 품어 너를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알이 깨어난다는 보장 따위 없었음에도.”
문득 불어온 바람결에 여자의 하얀 금발이 나부꼈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밖에 모든 것들은 그저 단단히 멈춰 있었다.
가로로 굳게 다물린 여자의 입술도, 부릅뜨거나 내리깔지 않은 동그란 눈도, 느릿느릿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코도,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매끈한 뺨도, 굽어 있지 않은 허리,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 풀밭 위를 맨발로 디딘 다리, 그 모든 것이 딱딱하기만 해서 전혀 추억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바람결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찰나가 지나갔을 때, 이레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왜 내 아버지의 이름을 여태 기억하고 있나.”
“내가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기억에 남아 있는 거란다.”
“그러는 본인 이름은 잊어버린 주제에.”
“그것도 그렇구나.”
그 순간 여자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 끝만 살짝 움츠린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별안간 여자가 손끝으로 해시트를 가리켰다. 해시트는 영문을 몰라 기다려 보기로 했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손가락이 해시트의 턱을 지나 뺨을 훑다가 코언저리에서 멈춰 가만히 숨결을 느꼈다.
잠시 후 여자가 말했다.
“해시트여. 그대도 알고 있겠지. 저 이기적인 드래곤이 허락도 없이 그대를 바꿔 놓았다는 걸.”
아, 그런 거였나. 해시트는 이제야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군. 그게 조금 딱해서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나 보오.”
한 번의 반문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착각인지 여자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고는 굼뜨게 고개를 돌려 이레이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굳이 섬세함이 필요한 행위는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눈 흰자위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삽시간에 밀려든 죄책감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러나 여전히 후회만은 하지 않겠다고 우기는 얼굴이 영락없는 철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