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5화.
“그게 무슨 말이오?”
[아아! 하지만 ‘그분’께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스스로 뱉은 말이 있으시니……. 하필 신앙심조차 없다고 했나. 그 또한 운명인지 우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여자는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도 않은 채 연신 뜻 모를 말만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선은 해시트가 아닌 이레이에게 돌아가 있었다.
[내가 섣불리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다. 계시를 받으러 가야겠구나.]
“그럼 가는 김에 한 가지만 더 물어봐 줘.”
[무얼.]
한결같이 평온하면서도 다정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물음이었다. 책에 쓰인 대로다. 드래곤들이란 정말로 감정의 높낮이를 느끼지 못하는가……. 해시트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물끄러미 이레이를 바라보았다. 역린. 역린이 없었다면 그도 아마…….
그때, 이레이가 말했다.
“이 애의 시간, 그것도 ‘그분’의 뜻인지.”
[…….]
“아니면 내 탓일까 궁금하군.”
[…….]
어쩐 일인지 여자는 잠시 침묵하며 쌔근거리는 숨만 내쉬었다. 착각이겠지만, 꼭 한숨처럼 들렸다.
여자의 턱이 불현듯 가까운 바닥을 짚었다. 스르륵, 기대며 눈을 감는데 다시 잠들 준비를 하는 듯했다. 이제 보니 이레이와 여자의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이레이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여자의 뺨을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레이는 허공에 손을 한 번 스쳤다. 다만 그 반경이 너무 좁아 제대로 닿지는 못했다.
완전히 감긴 여자의 눈 밑으로 황금빛 타래가 천천히 나풀댔다. 느린 숨결이 점점 고요해져 갈 무렵,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 읊었다.
[린 한의 아들. 너는 이름이 무어냐.]
이레이는 지금껏 본 적도 없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레이 린.”
[그렇군.]
“당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그렇군…….”
그 말에 이레이의 목소리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레이 린. 우리는 태초에 신과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을 지녔고 늙지 않으며 죽을 확률도 아주 희박하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지경이 된 후에도 억겁의 시간을 지나야만 겨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토록 길게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 수 있다니 그 또한 재주라면 재주였다.
[봐라.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수백 년 전이거늘 나는 아직도 비늘이 완전히 세지 않았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감정이 없다. 감정보다는 죄책감이 없다. 태초에 우리가 설계될 때 신께서 베풀어 주신 가장 큰 은총은 그것이다. 죄책감의 부재. 제아무리 역린을 가진 자래도 죄책감만큼은 피해 가도록 설계되어 있지. 그래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까.]
“…….”
[하지만 너는 지금 그것을 느끼고 있구나. 신기하게도……. 역시 사랑의 부작용인가?]
“그럴 수도. 둘은 함께 움직이더군.”
[언제 봐도 쓸모없구나.]
드문드문, 느리게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는 어느덧 무기력함에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죽을상을 한 상대를 앞에 두고 계속 떠들어 대는 데야 굳이 활기찰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네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받아들여라. 이레이 린. 저 인간은…….]
“그만.”
[…….]
“그만하고 계시나 받고 와. 우리 시간 없어.”
[……그러마.]
내내 나풀거리던 황금빛 타래가 서서히 움직임을 멎어 갔다. 여자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레이는 고개를 돌려 해시트를 찾았다.
“해스.”
“아.”
해시트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펼쳤다.
안아 줄 속셈이었지만 결국 안긴 것은 그녀였다. 바람 소리 새어 나갈 틈조차 없이 꽁꽁 붙들려서, 겨우 더듬어 붙잡은 날갯죽지는 잔뜩 긴장한 탓에 뾰족했다.
그녀는 숨 막히는 기분을 참으며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박자박 빠르게 뛰었다. 슬금슬금 머리카락에 뺨을 문지르는 느낌은 좋았다. 따뜻했다. 조금 전 이레이와 여자의 대화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체온의 원인이 사랑이냐 죄책감이냐, 구분 짓는 것은 두고두고 무의미했다.
달싹일 틈 없는 곳에서 해시트가 말했다.
“이레이. 돌아갈 땐 제리 해변에 들르자.”
“가서 뭐 하게.”
이레이는 그녀의 귀 언저리 여기저기에 짧게 입 맞추며 대꾸했다. 초조해 보였다. 해시트는 일부러 목소리 끝을 내렸다.
“가서 일출도 보고…….”
“너 또 몰래 타라네 집 구경하려고 그러지. 관둬라. 걘 너 진짜 싫어한다니까.”
“어차피 이제 거기 안 살잖아.”
“걔 증손주는 뭐 널 좋아할 것 같아? 유령인 줄이나 알겠지.”
그것도 일리 있었다. 씁쓸하게 끄덕이던 그녀가 불시 말을 돌렸다.
“그럼 우린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하나.”
“계시를 들으러 갔으니, 못해도 하룻밤은.”
다행히 대화의 방향은 달라졌으나 이레이는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볼과 귀 사이를 지분대던 입술이 어느새 귓바퀴를 잘근거리고 있었다. 간지럽다고 느낄 새도 없이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그러나 옴짝달싹 못 하게 꽉 끌어안긴 꼴은 여전했다.
해시트의 허벅지를 한쪽 팔로 받친 이레이가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목도리를 풀어 버려서 목덜미가 휑했다. 흰 줄기를 타고 억센 손가락이 타고 오르자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윽, 짧게 신음하며 해시트가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비틀자 거침없이 입술이 다가오기에 가까스로 반대로 피했다.
“옆에 사람 있잖아.”
“사람 아닌데.”
반쯤 정신이 나간 목소리였다. 이 변태 새끼를 정말 어쩌면 좋지……. 해시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재차 그를 설득했다.
“이러다 깨서 창피를 당하면 난 너를 죽일 거야.”
“계시받는 중엔 영혼이 여기 없다고 봐도 무방하거든.”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후…….”
정작 한숨 나오는 사람이 누군데 땅이 꺼져라 푹푹 잘도 쉬어 댄다. 그래도 이 이상 제멋대로 굴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레이는 그녀를 땅에 내려놓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낮게 꺼진 목소리로 다정히 의견을 구했다.
“배로 가서 기다릴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이 천천히 내려와 입술을 스칠락 말락 배회하고 있었다. 대답 여부에 따라 집어삼킬까 말까 재고 있을 게 뻔했다. 해시트는 눈을 감고 도리질을 쳤다.
“아니. 여기 있을래.”
“……그래. 그럼.”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전과는 다르게 가볍게 포옹해 오는 손길이 따뜻했다.
*
밤이 오자 그들은 모처럼 모닥불을 피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지는 않았다.
외딴 섬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별이 무성했지만, 흙바닥 곳곳에 널브러진 아름다운 비늘에 가려져 구경하는 맛이 예전만 못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카락이 빠지듯 드래곤도 비늘이 빠지는 걸까. 해시트는 또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겨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비늘들을 헤아리고 있자니 이레이가 확 찡그린 낯으로 다가왔다.
“거기서 뭐 해?”
“보는 거야. 색깔이 저마다 가지각색이길래. 아, 이건 녹색이군. 에메랄드라고 해도 믿겠어.”
“탐나면 몇 개 챙기던지.”
“딱히. 호기심과 욕망은 엄연히 다른 거다.”
“그럼 너무 관심 가지지 마라. 자기 얘기 하는 줄 알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제법 진지하게 들리는 타박에 해시트는 눈이 동그래져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섬에 다른 드래곤이 또 있나? 안 보여서 다들 외출 나간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야. 워낙 서로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 족속들이라.”
글쎄, 그새를 못 참고 남의 등에 착 달라붙어 부대끼는 족속이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해 봤자 하나도 신빙성이 없었다. 안 지겹나? 아니, 안 지치나? 해시트는 좀 매몰차다 싶을 만큼 단호하게 그의 팔을 떼어 냈다.
그리고 애먼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웅얼거렸다.
“저……, 아까 듣자 하니 ‘신’이 어쩌고 하던데.”
“그랬지.”
“정말인가? 그런 존재가 정말 실재…….”
“물론. 어디에나 있되 어디에도 없는 분이지.”
이레이는 아주 자연스레 해시트의 말을 끊었다. 마음이 급해서라기보다 쓸데없는 고민을 안겨 주지 않겠다는 각오 같았다.
“해스. 그분이 여태껏 너의 삶에 한 번도 헌신한 적 없다면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
“…….”
“나는 상관없으니.”
그러나 그 말에 잠긴 각오가 너무 뚜렷해 오히려 쉽게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상관없다, 혹시 신께서 당신을 노여워한 나머지 나까지 미워하게 된대도 하등 상관없다, 그런 선택은 이미 아주 옛날에 끝나 버렸다고…….
밤이 물씬 깊어 가고 있었다.
달빛과 별빛과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잠든 드래곤의 비늘에 사정없이 부딪히고 튕겨 나오길 반복했다. 두 사람은 그 요란한 빛깔을 고스란히 눈과 뺨에 투과시킨 채로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해시트는 만약 신이 어디에나 있는 존재라면 이레이의 뺨에 피어난 무지개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라면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인간 여자에게만큼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레이.”
“응.”
“설마 신이란 자가 백성에게 연좌제를 물릴 정도로 속이 좁은 왕은 아니겠지?”
“…….”
“왜 말이 없어?”
“아니, 그게 설마 그렇게 나올 줄은 몰라서.”
찰나 드러난 이레이의 표정은 어떻게든 웃음을 참아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역력했다.
큭, 깨문 입술이 보일락 말락 떨리더니 그마저도 손등으로 가려 숨겨 버리고, 슬쩍 떨군 고개 아래 눈동자만 굴려 해시트를 바라보았는데 어쩐지 그들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작정하고 사람 놀려 먹던 그 눈빛 말이다.
딴에는 진지해 죽겠는데 그토록 웃겨 하니 억울할 따름이다. 해시트는 뚱하게 팔짱을 꼈다.
“뭐.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섬기지도 않을 분을 섬기겠다 하면 그거야말로 신성모독 아닌가.”
“맞지. 맞는데.”
“근데 왜 웃어.”
“보통 선빵, 아니, 선제공격이라고 하지.”
“뭐가?”
“네가 먼저 못 박은 이상 진짜로 ‘속 좁은 분’ 되기 싫으면 쩨쩨하게 굴 수가 없단 뜻이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
“몰라도 돼. 그만 자자.”
마땅한 이부자리도 없는 곳에 손바닥을 팡팡 쳐 대는 꼴이 딱, 대충 상황을 모면하고 보겠다는 심보가 여실했다. 해시트는 마뜩잖은 척 그를 노려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가물가물한 눈이 감기기 직전, 그녀는 때마침 떠오른 핀잔 하나를 허공에 스르륵 흩트렸다.
“노숙 안 시킨다더니.”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사실 옛날 생각 나서 좋았다.
*
잘 잤다. 얼마나 잘 잤느냐면 깨어난 뒤에도 좀체 몸을 일으키지 못할 만큼.
따끈따끈한 햇살이 그늘 밖을 내리쬐고 있었다. 슬쩍 몸을 더듬어 보니 이레이의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가지런히 덮어 주고 있었더. 머리맡에는 커다란 나뭇잎이 한껏 늘어져 차양막을 대신했으니, 조만간 해일이 밀려들어 온대도 당장은 일어나고 싶지 않은 편안한 상황이었다.
겨우겨우 한쪽 눈을 뜨고 확인한 옆자리는 텅 빈 패다. 이레이가 일찍 일어났다면 이쪽은 좀 늦잠을 자도 괜찮지 않을까…… 해시트는 노곤한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몽롱한 귓가로 흘러드는 말소리를 차단하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렇게 된…….’ 꿈결처럼 조곤조곤하게 울려 퍼지다가 한순간 확 볼륨을 높인다.
“뭐?! 고작 그딴 이유로 쟤한테 저따위 운명을 내렸다고?!”
아 깜짝이야. 해시트가 움찔 어깨를 떨며 두 눈을 비볐다. 이레이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