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화.
“기각.”
“왜!”
“널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적정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럼 열흘은 걸려. 제리 해변에서 제국 수도까지야 몇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 충분히 재워서 데려갈 수 있었다지만, 네가 설마 열흘 동안이나 굶어 가면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거든.”
“으으음…….”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해. 책 써야 한다며?”
이레이는 그녀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얄미운 핀잔을 더했다. 해시트는 입술을 비죽이며 방으로 들어갈 따름이었다.
“나쁜 놈.”
“오, 기왕 욕먹은 김에 오늘이야말로 천재지변을 일으켜 볼까.”
“닥쳐.”
“왜? 낮이라 부끄러워? 그럼 해를 떨어뜨리지. 밤 절기를 몇 달 앞당기면 돼.”
“아니. 누가 부끄럽대?”
해시트가 코웃음 쳤다. 언제까지 그의 수작질에 그녀가 허둥대 줄 거라 믿었다면 큰 착각이다. 그녀는 방 문고리를 잡고 얼굴만 쏙 내밀었다.
“갑자기 밤이 오면 펭귄들이 놀랄 거 아니냐.”
“뭐?”
“당연히 너보단 펭귄이 더 귀여우니까. 걔네들을 위해 조용히 항해해 주자고.”
“뭐라는 거야. 펭귄? 지금 펭귄이라고 했어?”
이레이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찌그러졌다. 그는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다며 몇 번이나 질문을 반복했지만 해시트의 대답은 번번이 똑같았다. 펭귄, 그래. 펭귄! 그리고 이레이에게 붙잡힐세라 냅다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럼 이 몸은 할 일이 많아서 이만.”
솔직히 이러다 논문의 머리글도 완성하지 못할까 봐 슬슬 걱정이 되긴 했다.
*
그 뒤로는 꽁꽁 싸매고 갑판에 앉아 종이에 펜을 놀리는 나날이었다.
이레이는 바람이 차가우니 일할 거면 들어가서 하라고 몇 번인가 잔소리를 둘렀지만, 말과는 달리 아예 책상과 텐트를 가져다가 단단히 설치해 주었다. 저도 혼자 있긴 싫었던 게지.
해시트는 이레이가 바람을 보는 척 간간이 그녀를 본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민망한 내색을 참았다. 그때마다 일일이 반응했다간 일할 시간이 남아나질 않았기에.
마침내 한 달을 더 항해한 끝에 저 멀리 붉은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렌.’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섬 전체가 반짝반짝 광채로 뒤덮여 있었다. 비단 붉은 빛만이 아니라 오팔과 무지개를 섞어 놓은 듯 온갖 색으로 찬란했다. 그녀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은, 뱃머리가 슬슬 해변에 닿아 갈 즈음이었다.
“맙소사…….”
감탄사와 함께 해시트가 난간에 바짝 허리를 걸쳤다. 해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조약돌이 이런 빛을 내지?”
모래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약돌들이 저마다 맹렬한 빛깔을 뽐내며 볕에 부서지고 있었다. 금색, 녹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 보라색, 푸른색…….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황홀경이 이 파도에 녹아 있는 듯했다.
그때 이레이가 해시트를 배 안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조심해. 떨어질라.”
“봐, 이레이. 아무래도 평범한 조약돌이 아닌 것 같지? 아, 드래곤 비늘! 비늘이 바닷물에 녹아서 저렇게 작아진 건가? 여름엔 해안가 해수 온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니까!”
“너 좀 신난 것 같다.”
피식, 이레이가 묘하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해시트의 코를 꼬집었다. 신비로운 해변 풍경에 넋이 빠진 해시트는 그의 무례를 지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운 해변을 만들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그저 찬탄하며 감상할 뿐.
문득 고개를 내려 보니 이레이가 두꺼운 부츠를 들고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신발을 신겨 주면서 말했다.
“겉보기에야 아름답지만 들어가면 독초가 가득해. 기억하지? 징그럽게 꿈틀거리던 빨간 놈들. 명심해라. 맨손으로 만져도 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는 부츠에 이어 장갑, 나중엔 어디선가 목도리까지 가져와서는 그녀의 얼굴을 절반이 넘도록 감아 댔다. 그러고도 내내 마뜩잖은 표정이길래 해시트는 거의 눈사람 꼴이 되어 뚱하게 따져 물어야 했다.
“이럴 거면 나는 왜 데려왔나?”
“백문이 불여일견. 아무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보여 주는 게 빠를 테니까.”
“뭐?”
“일단 가지. 내 손 절대 놓지 마.”
“알겠어.”
“그 여자한테 홀리지도 말고. 그럼 진짜 그 여자를 죽여 버릴…….”
“아, 글쎄 알겠다고!”
출발 직전까지 황당한 신신당부가 끊이질 않았다. 이 자식은 이젠 하다못해 내가 여자한테 반할까 봐 걱정이 되나? 해시트는 푹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나섰다.
*
드래곤이 사는 섬이라면서 이상하게도 드래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척에 즐비한 붉은 독초만이 꿈틀거리며 해시트를 반겨 주었는데, 이레이는 쏙 빼고 해시트만 공격하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그녀가 인간임을 인지한 듯했다. 우글거리는 붉은 독초와 씨름을 연달았더니 불현듯 해시트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너 옛날에 나한테 먹였던 마취제 말이야……. 혹시…… 아니지?”
“난 먹인 적 없다. 네가 삼킨 거지.”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해시트가 이를 악물었다.
“망할! 이런 징그러운 놈들인 줄 알았으면 안 삼켰겠지!”
“독약은 잘도 삼키면서 왜.”
“언제 적 얘기를 하나?”
“네가 먼저 언제 적 얘기 꺼냈잖아.”
이레이는 해시트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로 독초를 짓밟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본들 꼭 한두 가닥씩 남아서 해시트의 부츠를 타고 올라온다. 이대로 한참을 씨름한 듯한데도 도무지 진척이 없을 성싶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해시트의 인내심이 먼저 폭발해 버렸다.
“답답해서 못 살겠군.”
“해스.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
“그러니까 피부에만 안 닿으면 되는 거 아냐?”
“어?”
“닿기 전에 썰어 버리면 되잖아?”
왜 여태 미적거리고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해시트는 아낌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모처럼 볕을 본 황금빛 칼날이 몇 번인가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식물의 단면에서 흘러나온 점액질이 땅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뭉툭하게 몽우리 진다. 몇 달 전 뒤뜰에서 본 풍경과는 좀 달랐다. 잘려 나간 단면이 새카만 색으로 썩어 들어갔다.
검을 제련할 때 사용한 드래곤 비늘 덕분일까? 해시트는 신기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요리조리 돌려 보다가 밝게 웃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군.”
“잘했어. 덕분에 그 여자도 깨어났고 말이야.”
“누구……. 너희 어머니?”
해시트의 눈꺼풀이 동그래져 깜빡였다. 무척 놀랐으니 웬만하면 빨리 대답해 달라는 표현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레이는 대답하는 대신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고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쪽을 택했다.
쿠구궁!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자리를 박차기 무섭게 대지가 흔들렸다. 이레이가 당부했다.
“아 참, 해스. 혹시 그 여자가 너한테 그 검 어디서 났냐고 묻거든 내가 줬다고 해.”
“왜?”
“그 검에 들어간 비늘이 그 여자 거야.”
“……농담이지?”
“진담이긴 한데 괜찮아. 나이 들어서 그런가, 별로 살생을 즐기진 않더라고…… 생각보다는.”
“뭐? 야!”
“쉿, 온다.”
합. 해시트는 목도리 속에 감춰진 입술을 세차게 다물었다. 그 순간 웬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왔구나. 린 한의 아들.]
음절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평온한 말투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가까운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이번엔 날 죽이러 온 것 같지는 않구나.]
여자의 목소리는 전설 속의 인어처럼 아름다웠으며, 신앙심 없는 해시트가 듣기에도 굉장히 성스러웠다. 굳이 인간의 언어를 골라 읊조려 준 이유가 어쩌면 해시트를 배려해 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반면 이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 건들거리는 말투를 활용했다.
“그래서 땅은 언제까지 흔들고 있을 거야. 내려가게 멈춰 봐.”
[흐음, 땅이 흔들리는 게 너에게 문제가 될 줄은…….]
쿠쿠쿵, 또 한 번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시트가 퍼뜩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그 여자’를 발견하고는 우뚝 시선을 고정한다.
여자의 몸은 산 하나를 통째로 굽어 놓은 양 군데군데 수풀이 돋아나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몸 위에 맺혀 있던 진흙이 떨어져 나갈수록 투명한 황금빛이 확연해졌다. 아, 깊은 바닷속에 잠긴 황금이 저런 빛을 띨까. 한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옅은 금색 비늘이 쌔근거리는 들숨과 날숨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목덜미 끝으로 존재하는 날렵한 두상, 설핏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는 해시트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반짝이는 뺨 위에 놓인 거대한 눈동자는 또다시 공포심을 이겨 낼 만큼 황홀한 푸른빛이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놀라우리만치 이레이와 같았다.
여자가 천천히 눈꺼풀을 껌뻑이자, 다이아몬드처럼 희고 단단한 속눈썹이 반짝이며 이동했다. 이내 여자의 시선은 이레이가 아닌 해시트에게 향해 있었다. 해시트는 그녀의 눈빛을 읽지 못해 그저 기다릴 따름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말했다.
[그렇군. 인간이 있다면 문제가 됐겠어.]
다행히 위협적으로 들리진 않았다. 아니, 느릿느릿 이어지는 음절은 침착함을 넘어 오히려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어 살생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주 잘못된 건 아니었나 보다.
여자가 몇 번 더 눈을 깜빡이자 대지를 덮고 있던 붉은 독초들이 빠르게 꽁무니를 뺐다. 이레이는 땅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당장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톡, 땅을 디디며 작게 속삭인다.
“홀리지 말랬지.”
“…….”
해시트는 그제야 자신이 방금 전까지 여자에게 느끼던 감정이 ‘홀리다’에 가까웠음을 인정했다. 갑자기 손바닥에 땀이 차는 기분이었다. 더워서 장갑과 목도리를 벗어 버리려니 곧 여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주 아름다운 인간이구나. 하지만 영혼이 훨씬 더 흥미롭군.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당신도 처음 겪나?”
[처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그걸 물어보러 예까지 온 건데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나?]
“음, 일단 신앙심은 전혀 없는 애야.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쩨쩨하시잖아. 그에 대한 벌은 천둥 번개를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이지.”
[하기야…….]
두 사람, 아니 두 드래곤의 대화가 몽롱하게 해시트의 귓전을 때렸다.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먹기 힘든 와중에 자신을 향해 있는 거대한 푸른 동공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해시트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으론 책에서 읽었던 구절들이 두서없이 떠다니는 중이었다. 아, 그렇지, 통성명!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내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반갑소. 나의 이름은 해시트 미케나 티플리스. 한때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지금은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요.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미케나?]
그러자 새파란 동공 속에 불시 황금빛 안광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명백하게 흥미가 깃든 눈빛이다.
[신성제국 미케나 말인가.]
“그렇소. 이제 그런 이름으로 불리진 않지만.”
[호오, 이제 알겠군.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나. 미케나…… 티플리스……. 그래, 그대가 티플리스 3세로구나. 운이 나빴어. 이름을 잘못 고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