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화.
턱이 잡아당겨지고 몸이 뒤로 밀렸다. 등에 닿는 딱딱한 나무줄기에 해시트가 슬쩍 인상을 찡그리자 이레이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녹색으로 번졌다.
머잖아 퍼지는 아득한 감각이 그녀를 눈 감은 채로도 눈부시게 만든다. 해시트는 고개를 좀 더 비틀어 이레이의 그림자 아래로 숨었다. 다시 부딪힌 입술이 희미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만족할 만큼 깊이 파고드는 그를 굳이 밀어 내지 않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딱히 미안하단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닌데…….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은 단지 자격에 대해 의문이 들어서였다.
너는 정말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마 해시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레이는 며칠은 거뜬히 쌀쌀맞게 굴 것이다. 그래서 해시트는 오늘도 제 속내를 아꼈다.
*
이레이는 하늘을 날지 않고 ‘여행’하는 건 실로 오래간만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사람들 눈을 피하는 법을 잘 몰라서 하릴없이 말을 타거나 마차를 잡고 뚜벅뚜벅 걷기 일쑤였단다. 최근 이삼백 년 사이에야 퍽 다양한 방법을 터득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한데 왜 이번만큼은 평범한 인간들처럼 하릴없이 말을 타고 마차를 잡고 뚜벅뚜벅 걷느냐, 보아하니 해시트 앞에서 본모습으로 돌아가길 꺼리는 눈치라서 해시트는 대충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 지경으로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에 여전히 그녀가 제 본모습을 무서워할까 봐 걱정한다는 게 조금 웃기긴 했지만 어쨌든.
어차피 그녀도 긴 여행 틈틈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논문 집필 이외에도 말이다.
“뭐야. 그건 언제 챙겨 왔대?”
이른 밤, 해시트의 객실에 찾아온 이레이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방금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푹 젖어 있길래 해시트는 얼른 협탁 위의 수건 하나를 그에게 집어 던졌다.
“머리 말리고 들어와라. 바닥에 물기 떨어져.”
“아, 고마워.”
이레이는 가뿐히 수건을 낚아채 머리에 얹었다. 순식간에 해시트가 엎드려 있는 침대로 다가와 다시 질문한다.
“그 책 예전에 다 읽지 않았었나?”
“오래됐잖아. 복습 중이다. 드래곤들이 우글거리는 섬에 찾아가는데 웬만한 건 숙지하고 있는 게 좋겠지.”
심드렁한 대답과 함께 해시트가 책장을 넘겼다. 스륵, 넘어가는 책장 사이로 언뜻 긴 제목이 비쳤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아무튼 누가 공부벌레 아니랄까 봐. 이레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허락도 없이 남의 침대에 모로 드러누웠다.
“그래 봐야 우리 아버지 일기장 같은 거지. 상상력으로 쓰였을지 알 게 뭐야.”
팔을 괴고 뚫어져라 바라본 보람이 있었다. 내내 책 속에만 틀어박혀 있던 해시트의 시선이 결국엔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너무 가까운 이레이의 얼굴이 부담스럽다는 듯,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꾹 밀어 내며 핀잔했다.
“너한테 빗대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없던데. 특히 여기 이…… ‘드래곤은 인간과의 관계를 쌓을 때 통성명에 집착한다. 이름을 못 부르게 하면 크게 토라지는데, 그 투정의 정도가 귀여운 수준에선 한참 벗어나 있다.’ 이 부분 말이야. 찔리는 거 없나?”
“없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없어.”
“생각해 봤는데 나 이름을 바꿔야 하겠더라고. 새 이름 결정해서 알려 줄 테니 빨리 적응해라.”
“아, 그럼 나도 의사 때려치우고 암살 의뢰받아도 돼?”
“……안 찔린다?”
“……조금은.”
가만 생각해 보면 책에 적용된 연구 표본이 이레이와 그의 모친뿐이었으니 들어맞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이레이는 대뜸 언짢아져 해시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툭, 협탁으로 치워 버린 뒤엔 다시 집을 수 없도록 단단히 앞을 가로막았다. 해시트의 눈빛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하는 짓이지?”
“저런 거 볼 필요 없어. 통성명할 걱정은 더더욱 안 해도 되고.”
“네가 어떻게 알아.”
“장담하지. 그놈들 중에 단 한 놈도 우리에게 관심 주지 않을 거다. 혹시 내 역린을 알아보고 기웃거린다면 모를까.”
그런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인 집단에서, 고작 인간 혼혈이 인간 순혈 하나 끼고 나타난들 썩 신기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원래 드래곤들이란 사랑은커녕 종족 보존의 본능조차 느끼지 않아 점점 그 개체 수가 줄어 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해시트가 멀뚱히 눈을 깜박이다가 되물었다.
“드래곤들 사이에선 혼혈이 흔치 않나 보네?”
그러니까 역린, 다시 말해 인간과 드래곤 사이의 혼혈종에서만 간간이 발견된다는 감정의 편린이 문제였다.
혼혈이라고 해 봐야 드래곤의 성질이 워낙 월등한 탓에 굳이 구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때때로 그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그 때문에 존재를 부정할 정도의 혼돈을 겪는다는 증언은 그들처럼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이 듣기에도 꽤나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인간을 속이고 아이를 낳는 드래곤들도 있지. 산모의 뱃속에서 핏덩이가 아니라 알이 태어나는 순간 남녀노소 까무러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이레이의 설명은 아주 담담했다. 듣는 입장에서야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너도 그런 경우였나?”
조심스런 목소리와 달리 해시트의 시선은 똑바로 이레이를 향해 있었다. 눈 맞추길 피한다는 의심을 사기 싫어서였다. 그런 의심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상처 주기 싫을 뿐이라는 걸 이레이도 잘 알고 있었다.
피식, 불시에 엷은 미소를 터뜨린 이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이번에 가면 그것도 물어봐야겠군.”
그러고는 슬쩍 해시트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덧붙였다.
“들어올 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너 열난다. 약 가져다주마.”
“응?”
“그래서 대체 언제쯤이면 아프기 전에 미리 힘들다고 말해 줄 생각이신지?”
“아…….”
그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고 하기에……. 해시트는 머쓱하게 그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긁적였다. 이레이 혼자면 며칠이면 다녀올 거리를 해시트 때문에 몇 달이나 걸려 이동하고 있다고 하니 못내 마음에 걸려 그랬다.
잠시 밖으로 나갔던 이레이는 곧 새콤한 향이 나는 차와 가루약 한 포를 가지고 돌아왔다. 차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약은 너무 써서 내일 아침까지 입맛이 사라질 예정이 됐다.
“더럽게 맛없군.”
이지러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이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미리 쉬었으면 안 아팠겠지. 벌이라고 생각해.”
“별로 안 아팠어.”
“너 예전에도 똑같은 말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어떻게 해 줬더라?”
“난 이제 자야겠다. 빨리 나가라.”
계속 듣고 있어 봤자 저만 손해였다. 그녀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릴 심산으로 이불을 코 밑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다행히 이레이는 이불을 걷어 내면서까지 그녀를 놀려 먹지는 않았다. 새삼 다감한 손길로 이마를 두어 번 더 쓸어 주더니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래. 푹 쉬어라.”
램프 불이 꺼지자 편안한 어둠이 방 안을 휩쓸었다. 나긋이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에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뺐다.
“이레이.”
“응?”
이레이가 방문을 열다 말고 해시트를 돌아보았다.
열린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림자 진 남자의 옆모습에선 무척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매사 나잇값 못 하고 어린애처럼 억지를 쓰는가 싶다가도, 이럴 때 보면 그런 생각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멋지다.
“왜. 할 얘기 있어?”
문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그가 질문했다.
할 얘기 같은 건 없고 그저 괜한 아쉬움에 불러 본 것이었으나, 직고하기엔 아직 이마에 오른 열이 내려가기 전이었다. 해시트는 슬며시 이불을 걷어 내고 또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나 열나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내 방까지 찾아온 거냐?”
“아아, 그거.”
이레이의 고개가 슬쩍 아래로 떨어졌다. 몰래 숨기는 표정이 웃는 듯 민망해하는 듯 아리송했다. 그러나 잠깐의 꾸물거림 끝에 다시 들어 올린 얼굴은 완연하게 짓궂었다.
“사실 오늘 밤새 천둥이 몰아칠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좀 변경했지. 어쩔 수 없이.”
“…….”
“잘 자. 해스.”
저…… 변태 새끼가……. 해시트의 입술이 마구 물결쳤지만 정작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천둥 번개를 배경으로 깔아 두어서 해시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로 즐기려는 취향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결코 익숙해질 일 없으리라.
해시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고 심호흡을 연발했다. 좀 전에 삼킨 것이 해열제가 아니라 발열제래도 믿길 성싶었다.
*
베누스의 해안선에서 배를 갈아타고도 꼬박 두 달을 더 항해했다.
사실 해시트는 베누스 국민 중에 이레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역사서에 외모 묘사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결과적으로 완전히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재차 확인하게 된 바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이 탄 배를 약탈하러 다가왔던 베누스 사람들은 이레이의 손짓 한 방에 꼬르륵 물에 잠기길 반복했다. 그렇게 몇 척의 배가 반파되고 나서야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꼴이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놈이 왕이었다 이거지…….”
해시트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이레이가 보란 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역모지. 역모는 곧 참형이고.”
“그래. 물어본 내가 바보다.”
“어쨌든 지금은 들어가서 자 둬. 익숙해질 때까진 뱃멀미 좀 할 거다.”
“멀미보다는 음식이 걱정인데. 난 생선 안 좋아해.”
“그럼 어떡하지. 가다가 펭귄이라도 잡아 줘야 하나?”
“펭귄? 그게 뭔데.”
“음……. 가다가 봐.”
그래서 삼 주 뒤, 이레이가 말한 ‘펭귄’의 실물을 보게 된 해시트는 하마터면 이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찰 뻔했다. 한 대 쥐어박으면 으앙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긴 짐승들을 가지고 잡아먹네 마네 심각하게 토론했던 자신이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생선 먹을게.”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배 안에는 먹을 게 넘쳐났다.
서른 명은 족히 태울 법한 배에 고작 두 명이 타면서 음식은 또 가득가득 채워 왔으니 당연했다.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유실수도 몇 그루 있어 종종 열매를 따 먹기도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뱃멀미도 심하지 않았다.
단지 항해가 길어질수록 지루함이 깊어 갔다. 편식이나 뱃멀미보다도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결국 뭍을 떠나온 지 한 달쯤 됐을 무렵, 해시트는 진지하게 건의해 보았다.
“지금부터라도 날아가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