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화.
“너 그딴 식으로 꼬여낼 생각…….”
“나도 도와줄게.”
“생각…….”
“응?”
“으으음…….”
해시트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명감이 부족한 건 그녀나 그나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핑계를 대자면 해시트의 경우엔 과거 황제로 지내면서 그녀에게 할당된 사명감을 남김없이 전소시킨 바였으나, 결과적으로 제 손으로 직접 여행 짐을 쌌으니 양심에 찔리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출발 전 이레이의 옷깃을 쥐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너 가서 또 생모를 죽이네 마네 헛소리만 해 봐.”
그러자 으쓱, 이레이가 어깨를 들썩이고 대답했다.
“그쪽에서 먼저 죽이려 들지 않는 이상 나도 안 건드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네가 위험해진다면 물론.”
“대단히 감동적이군.”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게 합격점이었다. 해시트는 고민하지 않고 이레이의 옷깃을 놓아 주었다.
그녀가 담장 구석에 대학 관계자들을 위한 서찰을 숨겨 두는 동안 이레이는 병원 출입구에 커다란 휴업 팻말을 박고 있었다. <장기 휴업> 중에 ‘장기’라는 단어가 몹시 강조된 채였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가 찾아올세라 잽싸게 대문까지 걸어 잠근 뒤엔 후다닥 해시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출발하자. 갈 길이 멀다.”
필요 이상으로 단단한 손길이었지만 그쯤이야 이젠 아주 익숙했다. 시도 때도 없이 뜨거워지는 체온도 더는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그녀는 이레이에게 반쯤 몸을 기댄 채 질문했다.
“카렌까지 다녀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글쎄……, 중간중간 관광까지 한다는 가정하에 아마도 왕복 반년? 뱃길이 마뜩잖으면 넉넉히 일곱 달 정도 걸릴 수도 있고.”
“어지간히도 오래 걸리는군. 벌써 삭신이 쑤신다.”
“걱정하지 마. 도중에 여비가 바닥나는 한이 있어도 노숙은 안 시킬게.”
“무슨 수로? 비늘이라도 가져다 팔게?”
“뭐, 하룻밤 정도 암살자로 복귀해도 괜찮고. 나 제법 비싸거든.”
“됐다. 말을 말자…….”
암만 손이 따뜻해졌다고는 하나 농담만은 여전히 살벌했다. 물론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가장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
동네 마방집에 빌려주었던 말 두 필을 되찾아 도시 한복판을 지나려니 주민들이 하나둘씩 인사를 얹어 왔다.
“닥터! 어디 멀리 놀러 가시나 봐요? 짐이 참 많으시네요.”
“관심 꺼.”
“어? 해스 선생님이다! 선생님! 저 지난번에 빌려주신 책 다 읽었어요!”
“오, 생각보다 빨리 읽었구나. 혹시 나 없는 동안 다른 책을 읽고 싶거든 데이나에게 가 봐라. 한꺼번에 잔뜩 빌려 갔으니 몇 권은 다 읽었을 거야.”
이레이는 몇 년이 넘어가도록 단 한 명의 주민과도 친해지지 못했고 해시트는 아이들 한정으로 비교적 왕래가 잦았다.
사실 정착할 때까지만 해도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간절하게 기원했더랬다. 그러나 몇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도시 제일가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는 슬픈 결말이다.
그야 어느 날 갑자기 개업한 병원에서 다 죽어 가는 반송장을 연달아 살려 내질 않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절세미인이 매일 광장에서 학자들과 삿대질하며 토론을 벌여 댔으니 유명세를 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다시 말해, 의사 대 환자로 만났을 땐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 죽는 꼴을 못 보는 이레이나 허점투성이 이론을 발견한 이상 그냥은 못 넘어가는 해시트나 거기서 거기란 소리였다.
역시 좀 더 작은 마을에 정착할 걸 그랬다.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새로 지을 것을…….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 아니! 두 분은 어째서 말을 따로 타셨습니까? 닥터! 아름다운 부인께서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엎질러진 물이고 자시고 저놈 주둥이는 한 대 때려야겠다.
해시트는 당장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이레이에게 골절 수술을 받은 청년 하나가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부인! 말이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그러다 저처럼 다리가 똑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하하. 이미 부러진 다리를 다시 부러뜨릴 수도 없고 돌겠군.”
황당함에 찬 그녀의 중얼거림에 이레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대신 손봐 줄까? 난 환자도 패.”
“필요 없어. 나 먼저 간다.”
“아, 해스, 잠깐……!”
휙, 그길로 말머리를 돌려 버리는 해시트의 행동에 뽀얀 흙먼지만 날렸다. 이레이가 부르거나 말거나 완벽하게 본체만체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레이가 돌연 고개를 돌려 청년을 내려다봤다.
“야.”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청년의 이마에서 삐질삐질 배어 나온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어진 이레이의 질문은 청년의 긴장감을 다소 허무하게 만들었다.
“쟤 방금 내 부인이라는 소리에 부정 안 했지?”
“……예?”
“안 했지. 안 한 것 같은데. 그냥 말 타는 걸로 시비 걸려서 짜증 난 듯한데……. 아닌가?”
“어어음…….”
부정했다고 말하면 죽여 버릴 것 같았고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걷어차일 것 같았다. 어쩌면 기껏 제 손으로 붙여 놓은 발목을 뎅강 다시 부러뜨려 놓을지도. 결국 청년은 살기 위해서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 부정 안 하셨습니다. 안 하셨고말고요!”
“좋아. 이번엔 특별히 봐주마.”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레이는 청년의 긍정을 받자마자 흡족한 표정으로 고삐를 쥐었다. 그런 주제에 한 번만 더 저 여자를 모욕했다간 발목이 아니라 목을 분질러 버리겠다는 과격한 협박을 남기고 떠났다.
청년이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지켜보던 노인 하나가 혀를 쯧쯧 차며 청년에게 잔소리를 끼얹었다.
“이런 바보. 딱 보면 몰라? 둘이 부부 아니잖아.”
딱콩, 지팡이가 이마를 때린다. 당장 청년이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항변했다.
“부부도 아닌데 남녀가 왜 같이 살아요? 남매도 아니라던데?”
“그게 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사람 관계가 뭐든 그렇게 딱딱 맞는 단어로 정의되는 줄 알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여태 결혼을 미뤘을 수도 있지! 네가 아직 전쟁을 못 겪어 봐서 그런가 본데, 살다 보면 별…….”
“아이참! 갑자기 여기서 전쟁 얘기가 왜 나오는데요. 미케나하고 크샨이 겨우 일천 파라상 땅 때문에 백 년 넘게 전쟁 중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글쎄 쓸데없는 사연을 묻지 말라는 거지! 남의 사연을 왜 궁금해해?”
“궁금할 수도 있죠! 사람인데!”
노인과 청년이 한창 투덕거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 거리를 지나던 중년 한 명이 넌지시 노인의 편을 들고 나섰다.
“어르신 말씀이 맞아. 보면 모르니? 선생님 왼손에는 반지가 있지만 닥터 손가락엔 아무것도 없잖아.”
“어? 그, 그러고 보니…….”
“여자 쪽이 창창한 나이에 남편 잃고 사람들 눈총이 무서워서 예까지 도망쳐 온 모양이지. 말씨가 딱 미케나 출신이잖아? 네 말대로 미케나와 크샨 사이에 허구한 날 전쟁이 벌어지니, 전쟁통에 남편만 잃었으면 다행이게?”
“아이고.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입 조심해. 조용히 잘 사는 사람들을 왜 들쑤시니? 자꾸 그러다 여기에도 정착 못 하고 떠나 버릴라.”
조용조용 타이르는 어조였지만 내용에는 핀잔이 가득했다.
멀뚱히 눈만 끔뻑거리던 청년은 이내 이레이와 해시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흙먼지조차 남지 않은 넓은 길목엔 어느새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저 멀리서 미케나와 크샨이 고작 일천 파라상의 영토 때문에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결국 청년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전쟁이 나쁘네.”
그러자 노인이 크게 맞장구를 쳐 왔다.
“그렇다니까. 도대체가 그놈의 영토가 뭔지, 크샨이든 미케나든 똑같아!”
해시트가 들었다면 어떻게 위대한 미케나를 개같은 크샨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 있느냐며 밤새 분통을 터뜨리고 말 소리였다.
*
“해스. 사람들이 너 끼고 있는 그거 결혼반지인 줄 알더라.”
“……뭐라고?”
“덕분에 나는 과부와 도망친 사연 많은 남자가 되어 있더군.”
“돌았나 봐……. 다들 상상력하고는…….”
해시트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혹시 약지에 끼운 게 문제였나? 부랴부랴 반지를 빼내 검지로 옮겨 끼우려니 이레이가 옅게 웃으며 손을 뻗어 왔다. 그는 능숙하게 해시트의 손을 헤집어 반지를 빼앗은 뒤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차라리 오른손에 끼우면?”
“그럼 펜 잡을 때 불편해.”
“이 반지가 꼭 필요한가? 크기만 크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너도 별로 안 예쁜데 슬슬 갖다 버릴까?”
“통촉해 주시지.”
“하는 거 봐서.”
이번엔 좀 더 가뿐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는 더 이상 미적거리지 않고 해시트의 검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어느덧 도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너른 들판이 펼쳐진 한복판에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자 그들은 곧장 그늘로 내려가 말들을 쉬게 해 주었다.
풀썩, 해시트의 옆자리에 퍼질러 앉으며 이레이가 감상했다.
“이를테면 추억 같은 건가.”
“뭐…….”
비슷해. 해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이라기엔 소극적이었고 부정이라기엔 침착하다.
당연하게도, 흔한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밋밋한 반지가 설마 황제의 결혼반지일 리 없었다. 라피난의 전사 이후에도 오랫동안 해시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그 물건은, 성을 나와 첫 번째로 맞이하던 라피난의 기일에 풍등에 매달아 띄워 주었다.
진작 그렇게 해 줬어야 했는데, 그전까지는 황제로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핑계로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에 걸쳐 있는 화려한 결혼반지를 볼 때마다 대신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은 새로운 배우자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못했더랬다. 그리하여 마침내 멀어지는 풍등을 올려다보았을 적에 해시트는 마지막으로 사죄했다.
당신의 죽음마저 대의를 위해 이용했던 나를 용서해 달라.
그런 그녀를 지켜보면서 이레이는 못내 씁쓸해했다. 신을 믿지도 않는 여자가 죽은 사람의 기일은 꼬박꼬박 챙겨 준다는 게 어지간히 신기했는지…….
결국 지금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결혼반지 따위가 아니다. 그저 해시트의 또 다른, 그리고 이제는 하나뿐인 추억이었다.
반지에 보석은 없었으나 대신 선명한 황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가문의 증표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들고 온 삶의 긍지. 그러나 스스로 대를 멸족시킴으로써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게 된 역사의 흔적.
“좀 궁금하긴 하군. 더 먼 미래에 내가 어떤 황제로 역사에 기록될지.”
문득 해시트가 옷소매를 올려 반지를 내보였다. 슬쩍 입꼬리를 당기기 무섭게 이레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해시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눈 깜짝할 새 입술을 세게 부딪치더니 귓가로 미끄러뜨려 속삭였다.
“소용없어.”
“…….”
“난 미안하단 말 안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