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이번 농사도 망했다.
어린애 손바닥보다 자그마한 하얀 당근을 뽑아 놓고, 침묵하던 이레이와 해시트는 이내 멀뚱하게 서로를 돌아보고 말했다.
“포기하자. 우린 재능이 없어.”
“아니. 땅이 척박한 거야.”
“젠장. 결국 새 핑계를 찾으셨군.”
“핑계라니? 합리적 추론이다.”
“어련하시겠어.”
그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것이다.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이 지긋지긋한 헛수고의 시초는, 갑자기 뒤뜰에 무성한 잡초가 신경 쓰여서 작정하고 뽑아내었던 어느 봄날이었다. 정작 잡초가 사라지자 휑한 빈자리가 거슬리더라. 하필 심심했던 차, 해시트는 소싯적 감상하던 황제의 개인 정원을 떠올리면서 혹시 제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를 조경 실력을 발휘해 보고자 결심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흔하디흔한 헤라꽃 구근을 구해다 심었는데, 다음 날 나가 보니 죄다 짓밟혀 죽어 버린 게 아닌가?
당장 이레이에게 달려가 네놈이 그랬냐고 추궁하자 그는 매우 뻔뻔한 낯으로 ‘아. 그거 관상용이었어? 난 또 네가 통째로 씹어 먹으려는 줄 알고 되게 화났지 뭐야.’라며 남의 오래된 과거를 걸고넘어졌다. 할 말이 없어진 해시트는 그저 책임지고 원상 복구해 두라 일러두어야 했다.
이레이는 이마를 긁적이더니 그길로 어디론가 떠났다. 이때다 싶었는지 병원 문까지 닫고서. 며칠 뒤에야 돌아온 그의 양손에는 하얀 꽃봉오리가 나풀나풀 매달린 꽃나무 두 그루가 들려 있었다.
글쎄 그새 협곡 너머까지 날아가서 치자나무를 통째로 뽑아 왔단다. 대관절 동쪽의 요오른 협곡 너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나라가 있다는 소리를 해시트는 아직까지도 믿기 힘들다.
그 이름하여 치자꽃, 다른 말로 가드니아라고 했던가, 옛날 옛적 이레이가 해시트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좀 뜬금없긴 해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향기도 딱 적당했던 고로 해시트는 긴말할 것 없이 식수(植樹)를 허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시 벌목을 명령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치자꽃 향기를 맡고 온 동네 벌레들이 꼬여 들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해시트의 얼굴만 한 불나방이 출몰한 날, 이레이는 그녀가 아주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기 전에 알아서 도끼를 들었다. 이후엔 미관이고 자시고 향기 좋은 꽃 대신 실용적인 작물을 심기로 무언의 합의를 봤다. 문제는 그마저도 심는 족족 결과물이 영 시원찮았다는 것이다.
양파는 도토리만 했고 딸기는 색이 노랬으며 마지막 보루였던 파스닙은 크기도 비루했지만 맛도 너무 떫었다.
이레이는 해시트에게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이쪽으론 재능이 없는 듯하니 적성에 맞지 않는 취미 생활일랑 그만두고 이럴 시간에 모자란 낮잠이나 채우자고 제안했다. 그런 말을 꼭 천둥 번개까지 내리치며 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쨌든 그땐 이미 해시트의 오기가 독기처럼 바짝 솟아난 뒤였다.
그녀는 대낮부터 치대는 이레이의 뺨을 밀어 내면서 비장하게 선포했다.
“아무래도 땅을 손봐야겠어.”
결국 이레이는 창고에서 쇠스랑을 찾아와 뒤뜰을 뒤집어엎었다. 쇠스랑질 내내 끊임없는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젠장, 너 솔직히 말해 봐. 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맞지?”
그때 해시트는 무얼 했느냐, 바로 뒤뜰 난간에 쪼그려 앉아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로 입술만 달싹달싹.
“그럴 리가.”
“이번에 의뢰받은 연구 기한이 언제까지라고 했더라?”
“……아직 여유 있어.”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 앞에선 애써 시치미를 뗄 뿐이었다.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은 이후, 일련의 과정을 겪은 끝에 마침내 그녀가 고른 새로운 직업은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것들을 배우고 시험 치르고 통과해 왔으니 적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적용이 알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느 날부터인가 쓸데없이 유명세가 번지더니, 강연이다 학술회다 듣기만 해도 간담 서늘한 요청이 물밀듯 들어왔다. 아무리 단호하게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이들에겐 두려움이 없는 법. 급기야 그들이 해시트와 이레이의 보금자리를 알아내어 대문을 노크하기에 이르자, 해시트는 행여 이레이가 그들을 죽여 버릴까 봐 다급하게 외치고 말았다. ‘책 정도는 써 줄 테니 일단 돌아가시오!’라고.
일전에 한 번 써 본 적이 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도’가 한 권에서 안 끝날 줄 몰랐으니 벌인 일이다.
“다음번엔 고료를 한 열 배로 불러 봐. 그럼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봐서.”
“맞다. 이미 장학재단까지 요구했는데 그쪽에서 덥석 물었다고 했지? 대단한걸.”
“놀리지 마라.”
“아예 소설가로 전향해 보는 건 어때?”
“놀리지 말랬지.”
“흠, 대중에 먹힐 만한 자극적인 이야기라면 내가 몇 개 알고 있다만.”
어느덧 입장이 뒤바뀌어 이레이가 해시트의 반응을 구경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트집만은 안 잡히겠다는 건지 나름 쇠스랑질에 열심이다. 해시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네가 써라, 이 망할 놈아. 써! 안 쓰기만 해 봐!”
“난 별로. 밤낮없이 환자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 어, 여기 뭐가 걸리는군.”
턱, 그 순간 쇠스랑 끄트머리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이레이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상자 같은데.”
“뭐?”
해시트도 입술이 동그래져 냉큼 그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하던 얘기를 모두 잊고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사슬이 칭칭 감긴 커다란 나무 상자였다. 한눈에도 수상한 외양이 꼭 보물 상자처럼 보였다.
한데 왜였을까. 제 손으로 직접 상자를 끌어 올리던 이레이가 도중에 움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짧은 탄식에 짙은 후회가 엿보였다. 해시트가 그걸 놓쳤을 리 없었다.
“뭐야. 네가 묻어 둔 거였냐?”
“음, 그게……. 옛날에 봉인해 두고 까먹었었나 봐.”
“봉인?”
“별건 아니고…….”
이레이가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현재 그들이 사는 집터의 역사가 제법 깊다고 했다. 이레이의 설명으로는 그가 아주 옛날에 잠깐 머물렀던 곳이라는데, 어째서인지 여태 아무도 안 사는 데다가 마침 땅문서도 건재하길래 냉큼 새집을 지어 올렸다나 어쨌다나.
아주 옛날이라……. 해시트는 가만 눈을 굴리다가 툭 내뱉었다.
“열어 봐.”
“…….”
아예 팔짱까지 끼고 버티는 데야 이레이로선 무시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상자의 사슬을 슬금슬금 풀어냈다. 최대한 늦장을 부린 끝에 마지막 자물쇠가 풀렸다. 달칵! 드디어 뚜껑이 열린 순간이었다. 해시트의 동공이 한계까지 확장됐다.
“그……것들이 대체 뭐지?”
“윽, 아직 안 죽었네. 징그러운 것들.”
이레이가 즉각 상자의 뚜껑을 덮어 버렸다. 쾅! 소리가 나야 마땅했지만 웬걸, 콰득! 질긴 것이 끊어지는 소리만 났다. 잘려 나간 새빨간 줄기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져 흙바닥을 꿈틀댄다. 이레이는 그것마저 집어 주먹으로 터뜨렸다. 해시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거 만져도 되는 거야?”
“물론, 넌 안 돼.”
그가 씨익 웃으며 터뜨린 잔해들을 허공에 불살랐다.
화르륵! 성냥도 없이 불이 붙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통 저런 잔재주를 부릴 땐 적게나마 해시트의 눈치를 보더라니 오늘은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해시트는 떨떠름하게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굳게 닫힌 상자 밖으로 스멀스멀 기분 나쁜 기운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조금 전 저 속에 들어 있던 물체, 아니 생명체, 아니 생명체가 맞긴 한가……. 어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넝쿨을 목격한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윽고 이레이가 기껏 풀어냈던 쇠사슬을 종전보다 더 단단하게 감으며 설명해 주었다.
“옛날에 ‘카렌’에서 따온 독초다. 번식력이 좋아 순식간에 집을 뒤덮으려고 하길래 가둬서 땅에 묻어 두었지. 완전히 죽여서 볕에 말리면 독약이나 마취제로 이래저래 효용은 꽤 좋은 편인데, 살아 있는 채로 관리하는 건 아무래도 귀찮아서.”
말인즉슨 정말로 땅이 안 좋았다는 거다. 아무렴 작물들이 몽땅 죽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여태 아무도 살지 않고 공터로 남아 있던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살 수 없었을 터, 심지어 이런 땅 위에서 그간 먹고 자고 매일같이 한 침대에서 뒹굴었다니. 해시트가 헛숨을 차거나 말거나 이레이는 뻔뻔하게 혼잣말을 이어 갔다.
“흐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종종 계시를 받는다고 했던가……. 겸사겸사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또 무슨 꿍꿍이냐. 가긴 어딜 가려고?”
해시트가 물씬 피곤해진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이레이는 그새 벌떡 일어나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당장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겠어. ‘카렌’이지. 너도 같이 갈 거니까 준비해.”
“그러니까 갑자기 거긴 왜, 잠깐, 그런데 그곳 꽤 멀지 않나? 그동안 병원은 어쩌려고? 또 문 닫게? 안 돼! 지난번에 꽃 따러 간답시고 며칠 문 닫았을 때도 환자들이 얼마나 허탕 치고 돌아갔는지 알아? 열 살짜리 꼬마 애가 자기 엄마 살려 달라고 찾아왔을 때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아느냐고. 도대체가 넌 의사로서의 사명감 그런 게 없느냔 말이다!”
“없는데.”
“허.”
“이 도시에 의사가 나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뭘.”
아주 당당했다. 하기야 이레이는 애당초 다시 의사를 직업 삼을 생각조차 없어 했으니까.
그저 탱자탱자 놀고먹으며 이따금 문화생활도 즐기고 각종 취미 생활도 섭렵하고, 단란하고도 지속 가능한 백수 생활을 해시트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녀가 황제 노릇으로 과로에 시달리는 내내 저 딴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었단다. 그런 노력을 늘어놓으며 뿌듯해하는 그를 보았을 때, 해시트는 단박에 초를 쳤다.
“저기,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살다간 마음에 병이 들거든?”
그래서 기왕 자리 잡고 살 거라면 다시 의사가 되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이레이를 설득했다. 지금까지 저지른 살인도 속죄할 겸 말이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 죽인 만큼 사람을 살리려면 야전병원 의사가 되어 백 년쯤 봉사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지만…… 그리고 그 전에 속죄라는 개념부터 배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그들은 사막 하나를 건너 바샤마일이라는 작은 나라에 입성했다. 그중에서도 적당한 대도시에 터를 잡았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제법 큰 정착금을 냈다.
바샤마일은 한때 꽤 오랫동안 미케나의 섭정을 받아 왔던지라, 국민 대부분이 구 제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정착하기 쉬웠다. 이레이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의사 시험을 치렀고 해시트는 언제나 그렇듯 도서관에 틀어박혀 독서에 매진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해 발표된 수학 공식의 오류를 대학에 투고했다가 이 귀찮은 상황에 이르렀음이라.
내친김에 좀 더 딴 얘기를 하자면, 처음에 이레이가 매입하고자 했던 저택은 전직 황제인 해시트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규모였다. 도피 생활을 이런 대저택에서 하겠다고?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도대체 그 막대한 돈이 다 어디서 났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혹시 암시장에 가서 비늘이라도 팔고 다녔나?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암살자로 생활하면서 받은 수임료라고…….
대관절 이 망할 놈이 지금껏 몇 명이나 죽이고 다녔는지 상상하기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해시트는 그날만큼 자신의 호기심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결국 원만한 상의 끝에 대저택은 포기하고 병원 딸린 이층집을 지었다. 아담한 규모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환자들과 학자들 때문에 여유로운 전원생활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해시트는 오늘도 의뢰받은 연구 마감일에 쫓기는 신세였다.
“해스.”
“응?”
이레이가 불쑥 싱글싱글한 낯을 들이댔다.
“집 떠나 있는 동안은 마감 생각 안 해도 돼.”
“……이 능구렁이가.”
“뭐. 고맙다고?”
“필요 없다고! 난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 지성인이야!”
“누가 약속을 저버리래? 책 쓰는 일은 여행 다니면서도 할 수 있잖아?”
과연 간계가 재주인 종족답게 감언이설이 수준급이었다.
“좋은 공기 마시면 글 쓸 맛도 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