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94화 (93/104)

94화.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쥰이 한가득 짊어지고 온 바구니를 흔들며 물었다.

“폐하. 활대는 어떤 걸로 챙길까요?”

그녀는 모처럼 나가는 사냥에 몹시 신이 난 모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씩씩함을 보자니 해시트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거나 상관없다. 활시위만 팽팽하면 됐지.”

“그럼 제가 고르겠습니다.”

“그래라.”

그녀는 어느새 다 묶은 머리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사냥을 나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몇 년 전 라피난이 휘두른 칼에 왼팔이 잘릴 뻔한 뒤로 약간의 후유증이 남은 탓이었다. 활시위를 당기려면 양팔을 모두 사용해야 해서 자연히 멀리하게 되었다.

각자의 말을 타고 사냥터로 들어가면서, 해시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올해 선출된 의회는 어때 보이나?”

바로 ‘의회 제도’에 관한 질문이었다.

백성들이 직접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 대표를 선출하여 국정에 참여하는 정치 방법으로서,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는 불분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대륙에서 미케나가 가장 먼저 도입하게 된 바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백성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책 한 권이 그 시작이었다. 이해하기 쉽도록 쓰인 책은 백성들 사이에 불씨처럼 번져 나갔고 곧 신분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직결됐다. 백성들의 열망이 극에 달했을 즈음, 해시트도 대신들과의 지난한 설전 끝에 의회 제도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쥰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작년에도 좋았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낫습니다. 확실히 해가 갈수록 안정되는 것 같아요.”

“잘됐군.”

덕분에 해시트는 국정에서 한발 벗어나 그 외의 제도와 문제들을 연구하는 데 한창 매진 중이었다.

조만간 미케나는 제국이라는 칭호를 떼어 내야 할 것이다. 이미 해시트는 적당한 대체어들을 찾아 공책에 적어 둔 지 오래였다.

다시 쥰이 말했다.

“아직도 신기해요. 카일 재상님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그 바쁘신 와중에 그만한 자료를 다 조사해 두신 걸까요? 저는 재상님이 모아 두신 걸 읽기만 해도 밤낮이 부족하던데요.”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그래서 내 업무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그렇게 들들 볶아 댔나 봐. 저 혼자만 과로하는 게 억울해서.”

“하하. 정말로 그랬을 수도요…….”

라피난이 정리해 둔 자료를 토대로 책을 쓴 건 해시트였고 첨삭하고 교정을 본 건 쥰이었다.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 약 스무 배의 종이가 소모됐다.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이러다 오른손마저 망가지는 게 아닐까 진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다 잘된 일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코앞이었다.

*

자주 들여다보지 않은 사냥터에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해시트는 당장 활대를 꺼내 들려는 쥰을 제지하고 말했다.

“잠깐만. 쥰.”

“예?”

“잠깐만 같이 걷자꾸나.”

“아……. 좋습니다!”

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전에 잠시 눈동자를 굴려 해시트의 화살통을 흘끔거렸다. 뒤늦게 해시트가 활쏘기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낸 듯했다.

연못가에 개구리가 폴짝 뜀박질을 했다. 해시트와 쥰은 그 옆길로 걸었다.

“너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랑 싸웠다면서?”

“폐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왜 싸웠는데.”

“아니, 그게 말이에요…….”

대부분 시시콜콜한 주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떠들어 댔다. 동료와 싸운 이야기, 이번 부모님 생신 땐 무얼 선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얼마 전에 알게 된 남자가 신경 쓰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해시트는 제법 심각하게 잔소리를 했다.

“쥰, 내 생각에 너는 남자 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으니 꼭 주변 사람들 셋 이상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알겠지?”

쥰은 언제나 그렇듯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알겠다고 했지만, 뭐랄까, 본능적인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자꾸만 걸음이 느려져 갔다. 우물쭈물하다가 툭 내뱉었다.

“폐하.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안 될까요?”

“…….”

이미 걸음만으로 사냥터를 거의 한 바퀴 다 돌았을 즈음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문득 해시트는 품속을 뒤져 네모나게 접힌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손수건이 아니라 안에 물건이 싸여 있는 형상이었다.

“안대가 많이 낡았길래 새로 준비했는데, 마침 손수건도 필요하겠구나.”

쥰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뭉개진 발음으로 몇 마디를 더 했다.

지금껏 해시트가 늘 밤잠을 못 이루는 것도,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이유로 내면에서부터 곰삭아 가고 있었다는 것도, 최대한 빨리 많은 일을 해 놓고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 계속 울 거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좀 닦지 그러니 제안하자 아까워서 어떻게 쓰느냐 더 서러워했다.

해시트는 가만히 서서 쥰을 달랬다. 그러다 빨갛게 노을 진 하늘을 발견하고 가만히 입을 열었다.

“쥰, 나는 괜찮은 황제였니?”

그 말에 쥰은 결국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얇은 실크 손수건이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흐어엉. 이제 나이깨나 먹은 녀석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하죠!”

“고맙다.”

사실 너무 편파적인 의견이라 그다지 신임은 가지 않았지만, 해시트에게 마지막으로 이보다 나은 인사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가장 따스하게 웃으며 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오늘 사냥은 나 혼자 가는 게 낫겠구나.”

“……예, 알겠습니다.”

쥰이 억지로 눈물을 삼켜 내더니 자리에 똑바로 섰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힘겹게 표정을 다잡고 거수경례를 했다. 늘 그래 왔지만 오늘따라 더욱 힘찬 동작이었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폐하.”

해시트는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그리고 쥰을 내버려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금세 낭떠러지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오래된 기억을 헤집었다. 지금껏 자신을 살게 했고, 동시에 그 밖의 모든 것을 앗아 간 기억들에 대해서.

그건 해시트로 하여금 세상의 그 어떤 유희도 즐길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 어떤 아름다움도 빛난다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잠 못 드는 수많은 밤이면 그저 추억에 잠겨 현실의 고통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내가 당신 때문에 죽을 거란 걸, 당신 빼고 모두가 다 알았습니다.”

유일한 가족이었으나 결국 그녀 때문에 죽게 된 남자의 말처럼 해시트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아직까지도 답을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 언제…….”

중얼거리며 내디딘 발이 낭떠러지 밑으로 푹 꺼졌다. 해시트는 눈을 감았다. 그제야 비로소 정답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널 지켜 주는 건 어때?”

이런, 그때였나?

그때 이미.

“네가 살아 있는 편이 내 생에도 좀 더 위로가 될 테니까.”

그녀 생의 존재 자체를 위로로 여겨 준다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증이 해소되었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질 것도 없었다.

제국력, 아니, 미케나 공화정 1년, 가을.

해시트 미케나 티플리스 3세는 역대 황제 중 가장 큰 업적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공식적인 사인은 실족사. 늦은 저녁 홀로 사냥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시체는 찾지 못했으나 추모식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래서 비공식적 사인은 자살.

훗날의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위해 스스로 사라졌노라 평가하곤 했다.

*

“그런데 티플리스라는 이름은 누구한테서 따온 거야?”

이레이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바로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그러나 어루만지는 손길은 지나칠 정도로 애틋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해시트는 홀린 듯이 그의 양 뺨을 감싸 쥐고 물었다. 사실 너무 놀라서 뺨을 후려칠 뻔했다.

“혹시 주마등이냐?”

“어?”

“아니면 환상인가. 왜 손이 따뜻하지? 맙소사. 얼굴도 뜨거워…….”

“아아, 아마 너 때문일걸.”

“뭐?”

“너 때문이라고.”

아마 이 정도로 뻔뻔한 걸 보면…… 환상은 아닌 것 같은데…….

해시트의 눈이 멍하니 깜박였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낭떠러지 중간쯤이었다.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는 남자에게 바짝 안겨 있는 꼴이다. 저도 모르게 협박이 튀어나왔다.

“떨어뜨리면 죽여 버릴 거야.”

“어련하시겠어.”

이레이는 숨죽여 웃었다.

그가 키득거릴 때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해시트에게 전해졌다. 두근두근 뛰다가 콩닥콩닥 빨라진다. 그런데 심장 소리고 자시고 목소리를 좀 더 들어 봐야 알겠는데. 울컥 차오른 불만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바로 입을 열었다.

“해스. 그나저나 티플리스라는 이름은 어디서…….”

“몰라! 그딴 건 역사책에서 찾아봐!”

그러나 정작 질문이 이어졌을 때 그녀는 대뜸 그의 말을 자르고 뺨을 끌어당겨 버렸다. 휙 당기기 무섭게 훅 끌려와 닿는다. 이레이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입술을 벌리며 부딪쳤다. 미소가 번지는 입맞춤 틈으로 못다 한 말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해스. 이제 어디로 갈까?”

“넌 어디서 지냈는데?”

“나야 뭐……. 웬만하면 네 근처에 있었지.”

“지금까지 날 감시해 왔다고?”

“……‘카렌’ 가 볼래? 나도 한번 가 보고 안 가 봤거든.”

이레이는 냉큼 말을 돌렸고 해시트는 못 이긴 척 넘어가 주었다.

“거기 가면 뭐 할 건데.”

“음, 글쎄. 아직 내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죽이고 와도 좋고…….”

“안 본 사이에 돌았나. 혼자 가.”

“그래. 딴 데 가자.”

그는 또다시 잽싸게 수긍하며 방향을 틀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아무렇게나 갔다.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져, 아주 멀고 황량하고 척박한 땅으로 가는 두 사람이 있다. 역린이 새로 자라난 반쪽짜리 드래곤과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남지 않은 역사 속의 황제.

이제 사슴을 사슴이라 불러도 되는 세상이 왔으니, 고작 두 사람이 함께한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 당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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