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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93화 (92/104)

93화.

전쟁은 휴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말만 휴전일 뿐 실제로는 피해 보상 방법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뒤, 해시트와 이레이는 아직 꽃이 지지 않은 계곡 아래에서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다. 일부러 야외에 자리 잡은 이유는 별것 없었다. 어느 한쪽을 다른 쪽의 성으로 초대하기엔 아직 양 국가 백성 간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해시트는 준비된 자리에 앉으며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재상, 서류를…….”

하다가 멈칫, 내밀었던 손을 내리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쳐 말했다.

“쥰. 서류 좀 가져다주겠나.”

“예, 폐하.”

근위대장 자격으로 동석한 쥰은 부상을 말끔히 씻어 낸 모습이었다. 그녀가 차분한 단발머리를 뽐내며 해시트에게 준비된 서류를 건네주자, 해시트는 곧장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더니 다리를 꼬고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약간은 거만한 듯 위엄 있었다. 이내 흘긋, 옆자리의 이레이를 곁눈질하며 투덜댔다.

“남의 나라에서 어지간히 활개 치고 다녔군. 너희 나라에 돈 많나?”

이레이는 슬그머니 팔짱을 꼈다.

“국고는 열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동안 약탈한 게 있으니 많지 않을까.”

“미친놈아. 너 왕 맞아?”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난 왕 같은 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머잖아 국왕 같은 거 때려치우고 잠적할 게 훤히 내다보이는 발언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태 모르고 날뛴 세월을 배상하라고 해야 할지, 고르자니 그것도 머리가 아파 왔다. 해시트는 한껏 찌푸린 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몇 가지 사안을 논하던 도중 퍼뜩 이레이의 말투가 달라졌음을 깨달았지만 굳이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늦봄이 한창이라 약간은 더운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꽃향기와 뜨거운 햇볕이 오후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해가 달궈질수록 시종들은 차양 막을 더욱더 넓게 펼쳤다. 적당한 그늘 아래 계곡물 떨어지는 소리가 맑았다.

문득 이레이는 높은 절벽인지 계곡인지 모를 높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나.”

“있었지.”

해시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서류에 마저 서명했다. 그야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장소고 라피난이 목숨을 다한 자리였으니 고민해 볼 것도 없었다.

이레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고, 더 전에.”

“더 전이면 언제를…… 아, 그러고 보니 여기가 바로 그곳이군.”

“그곳?”

되묻자, 해시트는 그간 서류에 빠뜨렸던 시선을 들어 올려 뒤늦게 이레이를 바라보더니 조금 뒤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억력이 나빠졌다더니 정말이었나.”

“정확히 말하면 나빠진 게 아니고 정렬이 뒤죽박죽으로 변한 거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기억할지 잘 모르겠군. 붉은 전갈이라고 하면 알까, 아니면…….”

“우리가 첫 출정 다녀오던 그 길목 말이지. 붉은 전갈 떼가 나오고 바위산에서 바위 하나가 떨어져 내렸던 그.”

“…….”

해시트의 고개가 말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번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정확했다. 함께 다녀왔던 첫 출정길, 정확히 세 명의 희생자를 남겼던 바로 그 사고 지점이었다. 기억력이 나빠졌다던 놈이…….

한편 이레이는 그녀의 당황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찌푸린 그대로 계속 계곡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바위산과 계곡 골짜기가 좀 닮은 느낌이었다. 곰곰이 입술을 달싹였다.

“신기하군. 그땐 분명 버려진 사막이었는데.”

“육 년 전 전국적으로 수로를 설치했다. 외곽 지역까지 물 공급이 충분해지자 메말랐던 강이 돌아왔고, 덕분에 버려졌던 땅에도 풀이 자라기 시작하더군. 아마 옛날에는 더 거대한 숲이었을 거다. 가뭄이 들어 사막이 되었을 뿐……. 지금은 아주 울창하진 않지만 사람이 살 정도는 돼. 최근의 영토 확장은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그래. 그렇군…….”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다.”

태연하게 말을 끊어 내긴 했지만 어딘가 씁쓸한 낌새였다. 그런데 씁쓸하달까, 아니면 그립달까.

마침 초원 한쪽에 검은 꼬리 사슴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슴은 참 보기 드문 짐승이다. 아름답고 연약한 데다 눈에 띄어서 사냥당하기 딱 좋으니까.

한데 저 사슴은 덩치가 아주 큰 걸 보니, 그래서 살아남았나 싶기도 했다. 그녀는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어 괜히 사슴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기 봐. 사슴이 있군.”

그러자 이레이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더니 대뜸 딴죽을 걸어왔다.

“저 정도면 사슴이 아니라 말 같은데. 색깔도 그렇고.”

“뭐? 네놈은 뿔 달린 말 본 적 있나?”

“있을걸.”

“웃기는군. 그게 퍽이나 말이었겠다.”

“넌 그게 문제야. 사슴 한 마리쯤 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도 괜찮지 않나?”

“뭐라는 거야. 그럼 너는 내가 저 말더러 사슴이라고 우기면 믿겠나?”

해시트는 지지 않고 저편에 매어 둔 이레이의 말을 삿대질했다. 이레이가 당장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이봐, 그건 다른 문제지. 누가 말을 보고 사슴이라고…….”

“오, 누가 그랬더라.”

“……내가 그랬었군.”

맞다, 예전엔 그랬던 날도 있었다. 황제의 말을 사슴이라 우겼다가 감옥에 갇혔던 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깜빡거리는 눈꺼풀은 수심이라기보다 추억이 깊었다.

이레이는 어째서 그날의 그녀가 그토록 화를 내며 사슴과 말에 대해 열변을 토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러니까 사슴이 사슴인 것처럼, 그리고 말이 말인 것처럼.

“해스.”

“왜.”

“너는 어째서 황제가 되고 싶었나?”

“…….”

만남 이래 처음으로 가장 듣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해시트는 모처럼 미소를 띠었다. ‘내가 황제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나지막이 흩어지는 목소리가 이레이의 귓가에 쏙쏙 박혔다.

그러니까 그에게 사랑이 사랑이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새 세상이 새 세상이었던 것처럼. 절대로 잊히지 않고 반드시 와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그토록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났을 땐 이레이가 먼저 모르는 척 질문했다.

“그럼 해스, 내가 저 말더러 사슴이라고 한다면 너도 저 사슴을…….”

“아니. 그래도 사슴은 사슴이야.”

단칼에 잘라 내는 해시트의 앞에서 그는 웬일로 서럽단 말 하나 없이 턱을 괬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그때 해시트는 보았다.

슬쩍 기울인 그의 목덜미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에, 어느덧 새로운 역린이 자라나고 있음을. 분명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단지 그와 마찬가지로 턱을 괼 뿐이었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면 라피난을 비롯한 선열들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

전쟁은 끝났다.

그 증거와도 같은 장례식 날, 해시트는 직접 만든 풍등을 밤하늘에 띄워 올리면서 이제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라피난.”

확신컨대 그녀가 살아온 동안 가장 많이 반복한 단어일 것이다.

“내가 널 너무 오해했나 봐.”

오래 살 거라 생각했다. 둘 중에 먼저 죽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해시트 자신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녀는 울컥 조여 드는 숨통을 억지로 삼켰다. 백성들이 보고 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그래도 숙제를 많이 남겨 주고 가서 한동안 심심하진 않겠네.”

불 밝힌 풍등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고 높이 멀리 날아갔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해시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라피난에게는 신앙심이라고 부를 만할 것이 있었다. 부디 그가 믿는 신에게 닿았기를,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남은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열흘간의 장례식이 모두 끝나던 날 백성들 앞에서 공표했다.

“과인에게 새 남편은 필요 없다.”

“폐하!”

당장 맨 앞줄에 있는 대신들부터 놀라 까무러칠 줄 알았더니 그마저도 제대로 언성을 높이지 못하고 말을 아꼈다. 눈시울이 붉어진 자도 있었고 광장의 무리 중에는 아예 통곡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마침 로브를 뒤집어쓰고 관중 속에 섞여 있던 이레이는 흐느끼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나직이 읊조렸다.

“대의 따위 관심 없다더니.”

어떻게, 오해받은 김에 너무 열심히 위선을 떨었는가 보다. 그래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할 정도로 영웅 노릇을 잘했는가 보다.

이레이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갔다. 도중 인파에 휩쓸려 로브가 벗겨지고 그의 빨간 머리카락이 볕에 드러나기도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아주 어색하고도 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조금, 세월이 흘렀다.

“쥰, 준비 다 했느냐?”

“앗, 잠시만요! 폐하!”

해시트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풍성한 흑발을 높이 올려 질긴 가죽 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쥰과 단둘이 사냥을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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