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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90화 (89/104)

90화.

애석하게도 황비가 매일 자랑하는 그녀의 아들은 벌써 일 년째 황비궁에 걸음이 끊긴 채였다. 아직 나이가 어려 잔병치레가 잦을 때이니 병든 황비와 거리를 두는 게 당연했다. 황자가 야박해서가 아니라 황실의 법도가 야멸찼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 따위 없이 튼튼하던 라피난은 황비의 말벗으로 지내는 생활이 어지간히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는 황비가 약사발을 내려놓자마자 기계적으로 사탕 그릇을 내밀곤 했다. 아주 가끔은 그답지 않게 상냥한 말을 함께 건넬 때도 있었다.

“물론 제가 황자 전하를 만나 뵙는 것보다 황비 전하께서 빨리 쾌차하시는 게 빠르겠지만요. 자, 사탕 드십시오.”

비록 그 말투야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보다 더 쌀쌀맞았다고는 하나 딴에는 진심을 담은 위로였다.

그럴 때마다 황비는 까르르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말아 동그란 사탕 한 알을 집으며 말했다.

“아이고, 맛없다.”

“아직 드시기 전이시잖습니까.”

“안 먹어도 알아. 맛없는 건 맛없는 거야. 아 참, 이거 진짜 맛없으니까 넌 절대 먹을 생각 마.”

줘도 안 먹는다고 받아치려다 참았다.

“너 지금 줘도 안 먹는다고 생각했지.”

“……예.”

“발뺌도 안 하니?”

“……해야 했습니까?”

“아니. 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참 뻔뻔하고, 융통성 없고.”

그게 뭐가 맘에 든다는 건지, 그보다 칭찬은 맞는 건지. 대뜸 황비는 체통없이 실실대는 낯으로 덧붙였다.

“진짜로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을 텐데.”

이 얘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더 이상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아서 라피난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황비 전하께서는 공주님을 꼭 낳고 싶으신가 봅니다.”

“응? 왜. 낳으면 부마 후보에 올려줄까?”

“송구하오나, 전하. 저는 남녀관계의 나이 차이에 있어서 비교적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따르는 편이라서요. 차라리 제가 근시일내에 결혼하여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와 짝지어주심이 옳지 않나 싶습니다.”

“어쩜……. 얘. 너는 농담 좀 배워야겠다. 뭘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

어쩌면 황비는 말벗이 아니라 그저 놀릴 상대를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외양적인 아름다움을 떠나서, 볕 아래 있을 때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무척 따스했다. 황제는 어째서 이런 황비를 두고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는가. 날이 거듭될수록 라피난의 궁금증은 하나둘 쌓여만 갔다.

황비는 가끔 피를 토하기도 했다.

그걸 가끔이라고 해야 하나? 하루에 두 번씩은 그랬다.

보통은 약을 먹은 직후에. 그러나 반대로 피를 토한 직후에 약을 먹어야 할 때면 황비는 으레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도 저 멀리 치우고 하얗게 질린 입술을 떨었다.

“으아아, 오늘은 사탕 먹을 힘도 없구나.”

라피난은 피 묻은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옅게 한숨짓고 말했다.

“두십시오. 제가 먹겠습니다.”

단 건 질색이었지만 한 번 황비궁에 들어온 음식은 다시 밖으로 내는 게 금지되어 있다니 어쩔 수 없었다. 딱히 선심 쓰려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라피난이 대수롭지 않게 사탕 그릇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철썩 손등이 내리쳐졌다.

“안 돼! 맛없다니까!”

그런 거친 목소리를 내는 황비는 흔치 않았다. 그녀는 그날따라 엄하게 행동했다.

“빨리 가서 손 씻어라. 설탕 묻었다.”

“…….”

그날 라피난은 처음으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사탕, 사탕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어쨌든 황비가 시키는 대로 연못에 손을 씻었다. 정말로 설탕 가루가 손에 묻어 끈적거렸다. 아니, 화끈거렸다. 설탕이 왜 화끈거리지?

“……기분 탓이겠지.”

만약 그날 단순한 기분 탓으로 넘기지 않았다면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라피난은 이따금 상상해 보곤 했지만 아무리 상상을 거듭해 보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리란 결론뿐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날 황비가 죽었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자는 중에 수명이 다했다. 잠결에 피를 토하지도 않아서 고운 침상에 핏자국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손톱과 발톱과 입술이 푸르딩딩했다. 이토록 병든 색을 숨기고 있었구나. 살아생전에는 매일 고운 화장을 하고서 볕 아래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장례식 시종들은 황비의 입술을 붉게 칠하고, 그녀의 몸에 손톱과 발톱까지 모두 가리는 아름다운 수의를 덧씌웠다. 그들의 노련한 몸짓을 지켜보려니 문득 라피난의 머릿속엔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내가 안 먹으면 이거 네가 먹어야 할걸.”

아. 그랬나.

그랬구나.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황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슬펐냐면, 당연히 슬펐다. 그렇다고 해서 비통했느냐, 글쎄 그렇게까지 감정을 소모하기엔 황비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어쨌든 모시던 분이 돌아가셨으므로 예를 갖춰 장례식에 참석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이어지던 장례식의 첫날, 황비와 전혀 닮지 않은 키 작은 황자를 만났다.

“전하. 어마마마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리시지요.”

의젓하게 자리에 서서 헌화하는 어린아이를 본 순간 라피난은 번뜩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황비의 죽음에 비통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꽃 말고 다른 꽃은 없나. 어마마마께서는 흰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 하지만 흰타 꽃이 액운을 쫓아 준답니다. 주무시는 동안 악몽을 꾸시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군…….”

황자는 얼굴이 아주 희었고 반대로 머리는 새카만 색이었다. 눈동자는 하필 금색이라 물기가 조금만 어려도 요란하게 태가 났다. 그러나 절대 울지는 않고 황제의 곁에서 양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댈 법도 한데 결코 의자가 있는 곳을 힐끔거리지 않았다.

과연 황비가 황제를 그토록 칭찬하던 이유가 있었다. 의젓하고, 귀엽고, 또 총명…… 그건 제대로 대화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장례식의 마지막 날에 황자에게 사탕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 웃는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얼핏 보기엔 하나도 안 닮았던데, 혹시 웃는 얼굴은 황비와 조금 닮았을지. 결과는 말투부터가 완전히 딴판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돌아가신 황비 전하의 말벗이었다고 소개하기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황비에게 독을 퍼다 나른 죄책감도 가슴을 짓눌렀다. 무지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라 변명하는 것은 자백하느니만 못했다. 대신 복수해 줄 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위선을 떨긴 싫었다.

라피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일 가문의 장자 라피난입니다.”

“그래? 처음 보는군.”

당시 황자의 키는 라피난의 허리까지 왔다. 조그만 게 말투는 웬만한 어른 귀족 못지않게 오만했다. 하기야 황자니까 당연할 터다.

라피난은 가만히 서서 황자가 사탕을 뜯는 걸 구경했다. 포장이 너무 단단했는지 잘 뜯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일부러 도와주지 않았다. 내심 새 사탕의 포장을 뜯는 데 익숙해지길 바랐다. 이것으로 죄책감을 떨쳐 버리자는 비겁한 속셈도 있었다.

“오, 됐다.”

“잘하셨습니다.”

마침내 황자가 사탕을 다 뜯고 살짝 웃었을 때야 그는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뒤를 돌았다. 황자의 미소에 함께 웃어 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땐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

라피난은 더 이상 황자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에겐 황비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슬픔만으로도 오랫동안 버거웠다.

하지만 반년 뒤, 황제의 비공식적 연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도무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황자가 아직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레오니스 황제와 세르히라 양은 신전의 허락을 기다리느라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만일 해시트 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에 세르히라 양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리고 그게 아들이라면 신전은 더 이상 재혼 허가를 미루지 못할 터였다. 또 그렇게 된다면 황자가 황비 꼴이 나지 말란 보장도 없었다.

라피난은 고민 끝에 해시트를 찾아갔다.

빈손으로 찾아가기 머쓱해서 또 사탕을 사 갔다. 어린애니까 사탕을 좋아하겠지, 막연한 짐작이었지만 실제로 좋아하는 게 티가 나서 오히려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좀 작으시군요.”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있을지도요.”

“이거 웃기는 놈이군. 꺼져라.”

“…….”

놈이라. 꺼지라고…….

라피난은 허공에 깊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보아하니 해시트는 반년 동안 키가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사탕 포장도 잘 뜯지 못했다. 이상했다. 사람들 말로는 세상에 다시없을 영특한 신동이라던데, 누가 봐도 위엄 넘치는 차기 황제감이라던데, 왜인지 라피난이 보기엔 영 미덥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생전 황비를 통해 너무 많은 호들갑을 들어 온 탓일까 싶었다.

그는 그날 성 밖으로 나가 적당한 말 두 필을 사 왔다. 그리고 웬 말을 사 왔느냐고 의아해하는 아버지에게 대뜸 선언했다.

“저 앞으로 해시트 황자 전하를 모시려고 합니다. 일단 키가 좀 크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그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역시, 반년 전 황비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는 게 틀림없었다.

“너 미쳤느냐? 제정신이야? 나중에 황자 전하가 사실을 알면 널 가만히 둘 것 같으냐!”

그저 황제에게 충성해서 그랬겠지.

라피난은 쉽게 아버지를 이해했다. 자신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해시트 전하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실 몸입니다.”

“그분께서 황제가 되시면 너는 죽는다.”

“아니오. 결국 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황실에 충성할 뿐입니다.”

“황제가 될 일도 없는 황자 때문에 죽겠다는 거냐! 이런 멍청한!”

“원래 멍청해야 충신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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