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89화 (88/104)

89화.

진작 낚아채서 던지고도 남았을 놈이 왜 적당히 봐주고 있냐는 의문이었다. 이레이가 뾰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맞춰 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라피난은 충분히 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오고 계시는군.”

“잘 아는군.”

“공교롭게도.”

애당초 서로 통하는 구석이 없었다면 친구 같은 낯간지지러운 단어로 서로를 부르지 못했을 터다. 이제는 다 옛날 일이 되었지만.

“야만족의 왕이여. 우리가 친구였던 시절은 오늘부로 모두 끝났소.”

이미 라피난은 드래곤과 맺은 친구의 맹세를 깼다. 이제 이레이에겐 그 어떤 의무도, 종족적 본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왔다는 건 살아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겠지.”

일순 이레이가 눈빛을 싸늘하게 식히며 라피난에게 다가섰다.

“내 손에 죽음으로써, 황제가 나를 죽일 각오를 다지게 하려는 건가?”

애타는 말발굽 소리가 어느새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만큼 다가와 있었다.

라피난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지금쯤 산천과 초목을 헤치며 그에게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이 해시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에 시선을 거두었다. 흑단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너울거리는 순간을 눈에 담지 않으려 곧바로 시선을 떼어 내곤 쓰게 웃었다.

“너도 잘 아는군.”

“……애석하게도.”

이레이는 표정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라피난의 차례였다.

“이레이 린, 전쟁의 원인을 네게 뒤집어씌운 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난 사과 안 할 건데. 네 흉내 내고 그 꼬맹이를 죽인 일.”

“상관없어. 네가 안 죽였어도 언젠간 내가 죽였을 거다.”

“그랬겠지.”

확실히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대체로 문제를 대하는 사고방식이 매우 비슷했다. 그런데도 겉보기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던 이유는, 별수 없이 둘 중 하나가 지금껏 위선을 떨어 왔기 때문이다.

이레이에겐 과연 그가 언제까지 위선을 떨 수 있을까 궁금해하던 때가 있었다.

“황제는 사람 보는 눈이 없군. 네가 후세의 평안을 신경 쓸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건 조금만 겪어 봐도 알겠던데 말이야.”

라피난 카일은 숭고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보편적인 목적 아래 주군을 보필하고 싶어 하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중요한 건 먼 훗날 움틀 대의가 아닌, 당대의 태평성대라 믿었다.

그래, 만약 그가 해시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행하고 눈앞에 보여지는 것만 좇아가면서.

라피난은 부정하지 않았다.

“맞다. 나는 단지 폐하의 대의를 핑계 삼아 지금까지 함께해 왔을 뿐.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그 대의에 편승해 사라지고 싶다.”

기실 관심조차 없었던, 단지 당신이 가는 길에 동행하기 위해 핑계 삼았던, 하지만 서서히 변해 가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제법 잘한 일인가 마음속이 간지럽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계획과 달리 여기까지 온 것은.

“이레이. 날 죽이기 싫다면 네가 내 손에 죽으면 된다.”

“죽일 수는 있고?”

“장담은 못 하지. 하지만 날 살려 둔다면 나는 언젠간 네가 바라는 것을 차지하고 말 거다. 그건 장담할 수 있어.”

그 말에 무섭게 표정을 굳히는 이레이를 보며 라피난은 부러 어기댔다.

“그리고 다시는 돌려주지 않을 거야.”

“…….”

“아마 그땐, 그분이 너를 버려 가면서까지 이뤄 낸 이 나라가 멸망하든 말든 나도 신경 쓰지 않겠지. 빼앗기느니 함께 죽어 버리는 쪽을 택하고 말 거다. 폐하가 너를 그리워할 때마다 추하게 질투하면서, 어쩌면 지금 네 모습이 내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 널 죽이면 나는 황제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겠지.”

“그까짓 게 두렵나? 선택은 알아서 해.”

결국 이레이의 입가엔 그가 바라던 미소가 걸렸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술이 뱉어 내는 모든 말이 이질적일 정도로 차가웠다.

“선택이라면 이미 했다.”

풀 수 없는 매듭이라면, 끊어 버리고 말겠다고.

“네가 나와 맺은 친구의 맹세를 저버리던 날에.”

“…….”

때마침 꽃향기 넘실대는 봄바람에 해시트의 목소리가 섞였다. 이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라피난!”

생각해 보면, 일평생 그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 준 사람은 단연코 해시트였다.

“라피난! 잠깐만, 잠깐만 라피난! 잠깐만 기다려 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고!”

이런 상황에서 웬일로 이레이가 아닌 저를 찾는 걸 보니 역시 쥰에게 모든 진실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두려웠을까?

두려웠겠지.

어릴 때부터 겁이 정말 많았으니까.

그 어리광을 들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런데도 어른이 된 해시트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어리광 한 번 들어주지 않은 어른을 만나야 하겠다고, 급기야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두 발로 직접 개울물을 헤치고 있다. 젖은 옷을 반나절만 입고 있어도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는 약골이 대체 왜 저러시나.

라피난은 도통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은 그녀를 옛날에 이해하고 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끝까지 그녀를 보지 않고, 그녀만을 보고 있는 이레이에게 물었다.

“이레이. 이 계곡을 기억하나?”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이레이는 라피난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덕분에 마음 놓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니. 와 본 적 있다. 잘 생각해 봐.”

“……그게 유언이라면.”

드디어 이레이가 그를 봤다. 천 근 같은 걸음을 천천히 내디딘다.

이레이는 역린을 잃어버린 이래 어떤 ‘기분’을 느낄 일이 없었다. 그가 없애 버렸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씁쓸함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검을 높이 쳐든 순간 해시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찢으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안 돼! 그녀의 입술 모양이 애원했다.

라피난은 이미 똑같은 수법에 당한 바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녀를 밀어 냈다. 그러자 해시트도 포기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황금빛 칼날이 번뜩이며 이레이의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라피난의 옷깃에 매달렸다.

“용서할게, 라피난.”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건가? 라피난이 일순 찡그리며 의심을 드러내기 무섭게 해시트가 기다렸다는 듯 반복해 주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어도 용서할 거야. 아니, 용서받기 싫다면 용서하지 않으마. 그러니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

“난 네가 필요해……. 정말로…….”

아마 그 절박함이 저 잔인한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렀을 터다.

해시트의 뒤에 선 이레이의 눈동자에 어느덧 단단한 확신이 세워져 갔다. 라피난은 조금이나마 떨리던 그의 눈이 차가워지는 찰나를 목격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해시트만이 쉼 없이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절대 죽으면 안 돼, 라피난! 내가 얼마나 너를……!”

“이리 와.”

해스. 별안간 이레이가 해시트의 배를 한 손으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라피난과 거리를 벌리자마자 그녀의 얼굴로 손을 옮겨 시야를 잠시 차단하고는 그 틈에 라피난의 가슴을 꿰뚫었다.

푹!

갑옷을 가른 검이 단숨에 박동하는 심장까지 닿았다.

높이 튀어 오른 핏방울이 이레이의 콧등을 스치고 갔다. 해시트는 보지 않고도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러자 아예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아 가둬 버리는 남자의 품을 뚫고, 처절한 울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겨우 울음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그때 해시트는 차라리 세상이 멈추기를 바랐다.

이레이는 라피난의 심장을 관통한 검 끝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해시트를 놓아 주었다. 자조적인 중얼거림과 함께였다.

“어디 나도 용서할 수 있을까 궁금하군.”

그러나 당장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해시트는 라피난에게 달려간 뒤였다.

“라피난!”

이미 여기저기 시체가 흩뿌려진 들판에 곧 뒤따라 죽을 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 해시트가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라피난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라피난은 그냥, 해시트의 큰 눈에서 눈물이 너무 많이 떨어지길래 닦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좀.

예전에 좀 해 줄걸.

그는 또 부질없는 후회를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부질없어라, 묻어 둔 다른 말이나 조심히 꺼낼 따름이었다.

“왜 우십니까. 저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그는 이따금 평범한 당신을 꿈꾸며 어쩌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우리의 관계를 상상해 보곤 했다. 다음 세대이니 대의니 그런 보이지도 않는 먼 미래에 움틀 일 말고, 그저 싱그러운 이 시절에 서로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며 한 철만 살다가는 꽃처럼.

그러나 결국 좋아하게 된 건 평범하지 않은 당신이었으니 어쩌겠는가. 마지막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망설이던 라피난이 손마디를 세워 해시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지막이었지만 그에겐 처음이었다. 따뜻한 눈물이 손끝에 맺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꼭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기분이 벅차면서도 담담했다.

“해시트.”

그래도 마지막엔 이름을 불러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젠간 내가 당신 때문에 죽을 거란 걸, 당신 빼고 모두가 다 알았습니다.”

정말로 그녀만 뺀 모두가 다 알던 사실이다. 어차피 죽을 팔자에 당신의 다정함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운이 좋았지. 라피난은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네.”

이제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네.”

열일곱 살이었다. 라피난은 경호 자세를 풀지 않고 꼿꼿하게 대답했다.

“따님 없으시잖습니까.”

“어허, 따님이라니! 공주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러니까 그 존재하지 않는 공주님을 제가 무슨 수로 부를까요.”

“와……. 넌 정말 이상…… 특별한 아이구나.”

“망극합니다만, 굳이 포장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당시 그는 아버지를 따라 갓 성에 들어온 신입 중의 신입이었지만, 집안의 권세와 출중한 실력 덕분에 곧바로 황비궁으로 배정받아 근무하는 중이었다. 집안의 권세와 그의 실력 중에 뭐가 더 큰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따라야 하는 명령에는 변함없었다.

그가 받은 명은 ‘몸이 약한 황비가 수시로 피를 토하니 몸의 병이 마음까지 옮겨가지 않도록 말벗이라도 되어주어라’는 것이었다. 글쎄, 그런 일이라면 가족이나 친구가 훨씬 낫지 않나? 그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것도 굳이 토를 달진 않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깊이 곱씹을 만큼 한가한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황비는 좀…… 한가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라피난에게 말을 걸며 아들 자랑을 했다.

“해스가 벌써 성서를 다 외웠대. 대단하지 않니?”

“예. 대단하시네요.”

“해스가 걸음마도 되게 빠르긴 했어. 말도 빨리 뗐고.”

“예. 위엄은 익히 들었습니다.”

“라피난. 너 해스 본 적 있니?”

“외람되지만 전하, 제가 성에 들어온 지 딱 보름 됐는데 그중 십사 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만났다는 소리야 못 만났다는 소리야?”

“……혹시 뵙게 되면 안부 전해드리겠다는 소립니다.”

“어머나, 고마워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