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분하지만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역린이 존재할 땐 휘둘려 끌려다니기 바빴고, 역린을 버린 이후엔 방향을 잃었다. 기억이 순서를 잃어버리자 그중에 무엇이 더없이 소중한 추억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디로 향해도 헤아리지 못할 미로 속이었다. 그러나 갇힌 곳에서도 마지막엔 당신을 찾고 있었다. 그게 억울했다.
그런데 해시트도 억울해 보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레이를 노려보는 것인지 서러워하는 것인지, 한참이나 젖은 눈을 부릅뜬 채로 버티다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전쟁을 일으킨 건 너잖아.”
“…….”
아. 이레이는 그제야 그녀의 동그란 얼굴에 차오른 혼란을 해석할 기분이 들었다.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은 금방 멎었다. 어느새 무기력함이 그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되었나.”
그래, 결국 내 꾀에 내가 넘어갔나……. 들릴락 말락 한 그의 혼잣말에 해시트는 보란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호한 말로 속일 생각하지 마라. 이제 안 통해.”
“그래. 그것도 그렇게 되었나 보군.”
그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그에게도 선택권이 넘어온 참이었다. 기꺼이 한 패를 고르기로 했다.
“풀 수 없는 매듭은 잘라 버려야겠지. 하지만 당신을 자를 수는 없으니.”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 한에서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해시트가 그를 잘라 내기로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그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내색하고 싶어서 이레이는 작별 인사 없이 자리를 떠났다.
*
혼자 남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시트는 피비린내 가득한 침실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하고 스러진 이들의 육신을 추슬렀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부딪히고 멍이 든 곳들이 다 아팠다. 한 명 한 명 숨이 붙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나약한 자신의 마음이 싫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을 쉼 없이 빼앗겨 가면서도, 아직까지 선택을 버겁다 여기는 이 고장 난 마음이.
그래도 아침이 되었을 땐 늦지 않게 갑옷을 꺼내 입었다. 유사시에 그녀는 후방을 맡기로 라피난과 약속한 바 있었다. 금일 밤 성을 찾아온 야만족의 왕은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챙긴 것은 오직 한 자루 검뿐.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나가고 마침내 봄이 가까워졌다.
시린 겨울에 출발한 미케나 군의 행렬은 황홀한 봄에 딱 맞춰 베누스의 바다를 갈랐다. 미케나 해군의 위용에 놀란 베누스의 함선들이 우왕좌왕 뱃머리를 돌려 댔다. 그들이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틈을 타 라피난은 무차별적인 선제공격을 명했다.
갑판으로 달려온 병사 한 명이 급히 라피난에게 보고했다.
“지휘관님! 적들이 대화를 요청해 오고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라피난은 마침 격추당하는 베누스의 함선을 갑판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고민없이 대답한다.
“전부 침몰시켜.”
“전부 말입니까? 그럼 협정은 누구와…….”
“협정이라니. 야만국과 화친이라도 맺을 셈인가?”
“아, 아닙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병사가 황급히 경례하고 사라졌다. 라피난은 그제야 흘긋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최대한 힘을 빼 둬야 해.”
미케나 군의 공격 앞에서 베누스의 함선들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제대로 된 군 통솔자가 없으니 뻔한 결과였다. 각개 떼어 놓고 보면 흉악한 범죄자들이었지만 힘을 합칠 줄 모르는 족속들이었으므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존재가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 협동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대륙 연합군을 이뤄 베누스를 격파하러 온 제국과 상대가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이곳 섬에 아직 이레이가 없다는 말이렷다. 라피난은 그가 돌아오기 전에 졸개 한 놈도 빠짐없이 수장시킬 작정이었다. 이레이가 나타난 뒤엔 그 하나만 상대하더라도 벅찰 터다.
“적함 한 척당 우리 연합군 배 세 척씩 따라붙어서 격파하도록. 암초로 몰아넣는 전략은 좋지만 같이 휘말려 침몰하는 바보 천치는 없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포로 안 받아. 투항해 오는 놈들 구조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무자비한 사령관의 명령에 우렁찬 대답이 따라붙었다. 다들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혀를 내두른 게 사실이었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가끔 보면 정말 무섭다니까. 폐하 앞에서도 저러시려나?”
뭐 그런 문제라면 라피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열일곱 살에 처음 입궐하던 때만 해도 자신이 이토록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자라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분명 죽은 황비도 이런 ‘결과물’은 상상도 못 하고 그런 소리를 떠들어 댔을 것이다.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네.’ 하필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서…….
라피난은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령실로 방향을 틀면서 방금 전 너스레를 떤 궁수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악!”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활이나 쏘도록. 네 활약상은 전투가 끝난 뒤 직접 확인하겠다.”
“죄, 죄송합니다!”
궁수가 부리나케 활을 챙겨 달려갔다. 그거 좀 맞았다고 절뚝거리기는. 라피난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다가, 찰나 허공에 낙하하는 빗줄기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뚝.
“비다!”
구름을 읽는 항해사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아무려면, 해상 전투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단연 날씨였다. 갑작스레 먹구름이 몰려들자 늠름하던 미케나 군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댈 수밖에 없었다. 봄비치고는 빗방울이 너무 굵었다.
“소나기다! 다들 위치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판에 선 이들 중에 비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은 당연히 라피난 하나뿐이었다.
“왔군.”
그는 먹구름이 가장 깊은 자리를 찾아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의 명령을 받기 위해 병사들이 몰려오자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육지로 진입해서 퇴로를 끊는 데 집중한다. 해가 뜨면 연합군 지원 부대가 몰려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도록.”
“지휘관님, 항해사 말로는 소나기 같다는데 꼭 육지로 들어가야 할까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적함을 침몰시키는 편이…….”
“소나기가 아니야.”
라피난의 목소리는 재고의 여지조차 없이 확신에 차 있었다.
이레이라면 보나 마나 몇 날 며칠 폭풍우를 쏟아부어 전세를 역전시키려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짓이 가능한 상대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줘 봤자 아군의 사기만 꺾을 테니, 현재로선 지원군이 합류할 때까지 육지에서 버티는 게 최선이다.
만약 연합군의 공격에 이레이가 수세에 몰려 정체를 드러낸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은 결과이리라. 그때부터는 온 대륙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돌릴 테니까.
문제는, 라피난의 예상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빗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비 그쳤습니다! 다시 위치로!”
“위치로!”
직전까지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이제는 거짓말처럼 태양 볕이 쨍쨍했다. 라피난은 눈부심도 잊은 채 한껏 눈을 홉떠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었다. 그 갑작스러운 비는 분명히…….
그때, 갑자기 대륙으로 뻗어 가고 있는 먹구름 떼가 라피난의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아래에서 거대한 군함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라피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배 돌려! 섬은 미끼였다!”
벌겋게 핏발 선 눈이 곧장 조타실로 향했다.
아무리 야만족이라 할지라도 왕은 왕이라고 판단 내린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었는데. ‘그’ 이레이 린에게 권세니 영광이니, 당연히 백성이니 영토이니 하는 것들이 중요할 리 없었다.
남의 나라가 쑥대밭이 되든 말든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제 나라의 존망에까지 무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라피난은 한달음에 조타실로 달려가서 직접 뱃머리를 돌렸다.
갑판 위에 선 젊은 병사가 악을 쓰듯 소리치고 있었다.
“베누스 함선이 제국으로 향하고 있다! 다들 배를 돌려라!”
같은 시각, 미케나의 수도에서 황제의 지원군이 후방을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3. 가엾은 짐승들
산천과 초목이 아름다웠다. 이렇게 드넓은 계곡과 들판은 온 세계를 돌아다닌 이레이에게도 처음이었다.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들판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봄이다. 그의 일원화된 기억 속에서 봄은 분홍 꽃의 계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나오는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꽃잎이 아니라 핏물이었다. 이레이와 그의 병사들은 군관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베었다. 살아남은 자를 남기지 않으려고 꼼꼼히도 수색했기에 여정히 비교적 느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잡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늘 간발의 차로 도망치곤 했다. 추격대를 기만하기 위해 일부러 어정거렸대도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을 터다.
이레이와 그의 병사들이 바다를 갈라 제국에 쳐들어왔을 때, 새파란 바다에선 수백 척의 배가 그를 뒤쫓고 있었고 육지에선 몇 필의 말이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게 벌써 두 달 전이었으니 슬슬 양쪽 모두 맞닥뜨릴 때가 됐다.
두 달.
베누스의 영토에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칠십 일이 넘도록 미케나를 들쑤셨다. 이레이는 그 칠십 일 동안 미케나의 곳곳을 밟았다. 한때 사막이 다수를 차지하던 미케나의 영토에는 어째서인지 어딜 가도 알록달록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진 못했다.
철퍽! 또 한 구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이레이는 칼에 밴 핏물을 털어 내며 말했다.
“왜 혼자 왔나.”
무심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딱히 상대방에게 원한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원한 없이 이 정도 살육을 저지르는 게 가능하다면 그건 인간도, 심지어 드래곤도 아니고 악마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라피난은 묵묵히 검을 들었다. 휘두르기 직전에야 질문했다.
“이 나라를 멸망시키면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나?”
제국은 그의 뿌리가 있는 나라다.
라피난은 이레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선을 그었던 제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하지만 사과할 길이 없었다. 그 말에 서러워하던 이레이는 이제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종한 남자 대신 세상을 발밑에 두기로 했다는 남자는 아무려면 어떻냐는 듯 어깨만 가볍게 들썩일 뿐이다.
“설마. 대미케나 제국이 어디 나 같은 떠돌이에게 멸망당할 나라던가.”
“의미 없는 학살은 그만둬.”
“투항해 오는 포로들까지 모두 죽이라던 지휘관이 할 소리는 아닌 듯한데.”
“같은 취급 마라. 그들은 베누스로 쫓겨나기 전에도 이미 죄인이었어.”
“인간이 세운 죄의 잣대를 내게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의미 없는 일이지.”
“적당히 해. 꼭 이렇게까지 폐하를 몰아붙여야겠나?”
“그러는 너는.”
이레이가 반듯하던 입술을 뒤틀었다.
“꼭 황제의 입에서 날 죽이란 명령을 끌어내고 싶었나?”
평이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그들은 벌써 세 차례가 넘게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한 자루가 부러지자 라피난은 지체하지 않고 단검을 뽑아 이레이의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이레이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는 것으로 피했다. 라피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왜 시간을 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