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쥰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순순히 책을 고쳐 들었다. 그대로 눈을 기울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럭 고개를 쳐든 쥰의 표정은 심각했다.
“폐하. 외람되지만 이 일이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다행히 쥰은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며 허공에 성호를 긋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면서 해시트가 헛웃음 쳤다.
“지금이어야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으니까.”
“…….”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만약 그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끝까지 남아 백성들을 책임질 거야. 그래도 늘 최악은 대비해 둬야 하니까.”
그래. 최악의 경우 베누스가 역으로 쳐들어온다면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해시트는 더 이상 이레이의 무자비함에 희망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계획을 앞당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비록 제 손으로 열매를 수확하지 못하더라도 씨앗은 심고 가야 했으므로.
하지만 어째서 라피난이 이토록 빨리, 그리고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 둔 건지는 그녀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해시트에게도 비밀로 하다니? 마치 죽을 날을 내다본 노인이 사후의 일을 미리 처리해 두는 것처럼…….
불현듯 그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해시트가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쥰이 무어라 떠들고 있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쥰의 어깨 너머, 텅 빈 책장에 달랑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서적만이 선명했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그 책의 제목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 순간, 신기하게 쥰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폐하. 이레이 대장님은 도대체 이번 전쟁으로 뭘 얻고 싶으신 걸까요?”
“……너 지금 뭐라고 했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해시트는 당황했다. 쥰이 이레이를 알고 있었다.
“헉, 죄송합니다! 아직 입에 안 익어서……. 베누스의 왕이요. 이레이 린, 그자…….”
“네가 그 자식을 어떻게 알아. 아니, 어떻게 기억해?”
“그, 그건…….”
쥰은 갑작스러운 해시트의 다그침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서 답변을 유보했다. 그래 봐야 해시트의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한차례 허공을 배회하더니, 재차 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쥰. 그날 라피난이 왜 너를 공격했지?”
아. 너 돌아오지 않을 셈이구나.
그의 손에 죽으려고…….
비로소 해시트는 라피난의 속셈을 알았다.
#2. 이름을 잃은 채 부유하는 기억
왜 해협을 건너 죄인들의 왕이 되었던가. 여자와 밤을 보낸 날 이레이는 기억나지 않는 감각을 깨우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생각해 보자.
어느 날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 융단에 수백의 시체가 깔려 있었다. 인간들이 시체를 비집고 그에게 절을 해 댔다. 그를 왕이라고 추앙했다.
언제 또 그렇게 됐나 보다. 이레이는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으며 그 상태에 머물렀다.
이따금씩 미케나에서 쫓겨 온 죄인들이 멋모르고 그의 앞에서 제국의 풍문을 읊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한 명씩 맞은편에 앉혀 두고 황제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제법 성군이라 칭송받는다고. 덕분에 범죄자들 살기 힘들어졌다고. 의외로 남편과는 사이가 좋은 듯하다고. 근데 신전이랑은 사이가 안 좋다고……. 그렇군. 그렇군. 그렇군. 매번 똑같은 이야기가 바닥나면 슬슬 이자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그렇게 열 명이 넘는 죄인을 죽였을 즈음, 문득 부하 한 명이 말했다.
“전하께선 미케나를 아주 싫어하시나 보군요.”
그런가. 그래 그게 또 그렇게 되었나 보다. 이레이는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으며 그 상태에 머물렀다.
그래서 또 어느 날 제국에서 찾아온 밀정들을 발견했을 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초상화를 그려 오라고 했겠다, 아름다운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이전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뒤죽박죽 뒤엉겨 두둥실 떠오른 기억들엔 순서가 없었다.
그는 두근두근 빠르게 박동하던 여자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손이 저절로 목덜미를 짚었다. 턱. 빈자리가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비로소 모든 걸 이해했다.
“나의 역린이 사라졌다는 걸.”
끼이익……! 방문이 닫히고 있었다. 지금은 늦은 밤이다.
이레이는 문틈으로 사라지려 하는 여자를 붙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채 닫히지 못한 문짝이 세차게 부서질 듯 흔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이미 다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 꺼진 자리에 살아 숨 쉬는 건 오직 이레이와 여자뿐이었다.
여자, 해시트는 별안간 끌어안고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그에게 내던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방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그의 소행이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책은 이레이의 이마를 찧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가 물끄러미 그것을 보았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제목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여자는 이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목덜미에서 뽑아낸 붉은 비늘의 정체도 모를 수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주고 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나.”
알지 못할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몰라야 하는 감정이었다. 알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잊어버렸어야. 분명 버렸는데. 없앴는데.
이레이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대가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올 때까지.”
그녀에게 고백할 말과 물어볼 말이 떠올라서 모탈루아 해변에서 걸음을 되돌렸던 새벽이었다. 이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짝 붙어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와 속삭임이었다. 불쌍한 제릴을 죽인 이는 그가 아닌 나라고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누가 지어 준 것이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단지 새벽녘 다녀간 도둑처럼 소심한 비나 흩뿌렸고 지금 이 밤, 양손을 흠뻑 피로 물들인 채 그녀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구석으로 몰린 해시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해시트는 이레이의 몸통에 가려진 창문을 연신 힐끔거리며 뻔한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그것이 우스워서 이레이가 말했다.
“진실을 알려 줄까?”
제 귀에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토끼 사냥을 하듯 여자를 몰아넣고 머리 위 벽 위를 짚자 선명한 핏자국이 찍혔다. 당연히 그의 것은 아니었다.
해시트는 지척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숨을 참았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이레이가 말을 이어 갔다.
“맞아. 처음엔 고백할 것이 있어서 왔는데…….”
“원하는 게 뭐야.”
덜컥 끼어들어 따진 순간, 몽롱하던 그의 표정에 한기가 들어찼다.
“왜 그런 걸 묻나.”
그러나 금세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단조로움으로 돌아갔다. 그는 차분했다. 해시트를 원망할 때조차도.
“내가 원하는 걸 말해 봤자 당신은 결코 주지 못할 테고, 내 원망이 끝나기도 전에 덧없이 죽어 버릴 텐데 내가 왜 그걸 알려 줘야 하지. 시간은 언제나 당신의 편이고, 결국엔 나 혼자 남아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나 이따금 꺼내 보며 또 서러워지겠지. 하지만 기억은 기억일 뿐, 나는 이제 추억조차 남길 수가 없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
이상하다. 분명 알 텐데, 여자는 전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다.
동그란 얼굴 속에 차오른 혼란은 가증이라 하기엔 너무나 진실되어 보였다. 이레이는 해시트를 향해 뻗어 가던 손끝을 맥없이 떨어뜨렸다. 또다시 속고 싶은 자신에게 증오심을 느꼈다.
그가 다시 질문했다.
“황제. 내가 죽길 원했나?”
“뭐……?”
해시트의 눈빛이 더욱 묘해졌다. 두려움과 혼란이 가득한 자리에. 얼마 없는 빈틈을 비집고 서러움이 들끓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곧 눈자위를 떨며 반문했다.
“너는 기어코 내가 너의 죽음을 바랄 때까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할 작정인가?”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이레이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현듯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부서진 문짝과 여기저기 흐트러진 방 안의 물건들이 그의 정신을 사납게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까짓 게 이 여자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니? 그는 역시 납득할 수 없었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해시트를 잡아당겼다. 곧장 큰 소리가 번졌다.
“놔!”
“이리 와. 와서 네 눈으로 직접 봐라.”
모퉁이를 붙잡고 버티는 몸뚱이를 통째로 끌어냈다. 다친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끌어안고서.
“당신이 저런 것들을 아낀다고? 저런 하찮은 것들을?”
죽은 경비병을 삿대질하면서 윽박지르자 서로를 물어뜯기까진 또 금방이었다.
“닥쳐! 네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정말 소중한 것을 앗아 간 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알아, 너잖아!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아니. 당신은 몰라. 그래서 진실을 알려 주려고 왔다.”
둘 다 말의 날을 뾰족하게 세워 할퀴고 베었다. 그에겐 더 이상 난도질당할 자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베인 곳이 쓰라렸다. 몸부림치는 해시트를 통제하기 위해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벌이다 보니 갈 데라곤 찬 바닥뿐이었다.
그는 냉큼 위에 올라타 그녀를 품속에 가뒀다. 그리고 결코 외면할 수 없게 속삭였다. 아니, 속삭이려 했다. 이레이의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해시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 마! 라피난에게 직접 들을 거야!”
버럭, 천둥 같은 호통에 그는 머릿속이 새까맣게 번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까마득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으로 해시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그것만이 별처럼 반짝이며 수놓아졌다.
“나도 알아. 쥰이 전부 말해 줬어! 하지만 라피난에게 직접 듣고 싶단 말이야!”
영영 사위어지지 않는 별빛 아래서 비참함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내 감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줘. 원망하든 용서하든 내가 결정하겠어.”
“……그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렁이던 푸른 눈에 어느새 맥이 쭉 빠져 있었다. 해시트를 일으켜 세워 줄 기력도 없다는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이윽고 창가에 기대어 서서 난장판이 된 침실을 둘러본 뒤 중얼거렸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선택하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