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만일 제가 돌아오지 않거든 제 서재는 태워 주십시오. 결혼하기 전에 살던 집 지하실에 있습니다.”
“미친놈아. 이걸 진짜 한 대 칠 수도 없고.”
해시트는 거칠게 그의 손을 낚아챘다. 행여 ‘마지막’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기세였다.
“너 계속 눈 감고 있어라.”
“예?”
“뜨지 마. 뜨기만 해.”
“예…….”
라피난은 기세에 눌려 얼떨결에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해시트가 깍지 낀 그의 손을 더듬어 제법 진지하게 입술을 맞춰 왔다.
어째서인지 입술이 떨렸다. 다행히 라피난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해시트는 그가 그녀를 배려해 준 것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다.
해시트가 말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
“그래……. 그대가 적의 목을 베어 돌아올 때까지.”
“…….”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원한다고 하여 그녀가 해 준 말이었으니까. 아마 그들이 서로를 죽고 죽일 수 없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맹세가 이미 깨진 줄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그때, 창밖에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둘 중에 하나라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그쳐 버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나중에야 젖어 있는 땅을 보고 하늘이나 한 번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결국 어떤 선택에도 후회는 남겠지만, 그 모든 후회를 합한대도 이것만큼은 퍽 애석한 일이었다.
*
서재.
해시트는 그 한 단어를 기억해 뒀다가 출정식이 끝나자마자 라피난의 옛 처소로 이동했다.
원래 성 안의 저택들이란 신분과 직급에 따라 분배되는 기숙사와 같았다. 라피난이 떠난 지금은 다른 이에게 돌아갔어야 옳았으나, 황태자 근위대장에서 재상이 됐다가 무려 황제의 남편 자리까지 겸직하게 된 자가 도통 짐을 빼 주지 않으니 아무도 건의할 엄두를 못 냈나 보다.
“이 녀석이 권력을 이런 데 쓰고 있었다니.”
해시트가 허탈한 헛숨을 찼다.
라피난이 쓰던 저택 대문과 현관에는 거의 어린애 머리통만 한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팔뚝 굵기의 쇠사슬까지 아낌없이 감겨 있는 걸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제길, 열쇠라도 주고 가던지.”
결국 검을 뽑아 뎅강뎅강 끊어 먹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설마설마했는데 죽순보다 쉽게 잘리는 무쇠붙이들을 보면서 해시트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놀랍게도 검날에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정말 그를…….”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이레이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은 금세 조소가 되어 돌아왔다. 무엇을 믿었기에 배신감을 느끼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콤한 말과 따뜻한 눈빛을 증거로 대기엔 그 존재 자체가 간계와 모략을 일삼는 종족이었다. 함께할 수 없음을 알아 이미 한 번 떠나보냈으면서 또다시 신기루를 좇은 셈이다.
“흉내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씁쓸히 중얼거리며 해시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오 년 넘게 비워 둔 저택은 온통 하얀 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구며 그림이며 빛과 먼지가 닿지 않도록 톡톡히 신경 쓴 느낌이었다. 덕분에 지하실 입구를 찾는 건 조금 힘들었다. 한참이나 바닥과 씨름한 끝에 희미한 정사각형 틈새를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아 다시 기를 쓰고 장치를 찾아다녔다.
아무튼 누가 벽창호 안 같달까 봐, 달랑 ‘서재’라고 힌트만 주고 떠나면 어쩌자는 것인지.
슬슬 짜증이 치밀었을 무렵 해시트는 유일하게 천이 드리워지지 않은 거울을 발견했다. 냉큼 몸을 일으켜 거울을 더듬어 보았다. 벽에 붙어 있는 형태다. 옳다구나 옆으로 비튼 순간 덜컹!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열렸다.
“……깨끗하군.”
촛대 하나를 손에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잘 정돈된 서재가 한눈에 들어왔다.
예상외로 소박한 크기에 장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부창부수라고 한다면 과연 맞는 말이겠지만, 최소한 해시트의 경우엔 서고의 역할만은 충실했더랬다.
이곳은 서고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책장이 텅 비어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책장이 달랑 두 개, 그리고 그에 비해 너무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먼지 같은 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마 사람을 시켜 가끔 청소했거나 본인이 직접 관리한 모양인데, 그 성격에 이런 비밀 공간에 남의 손을 태웠을 리 없으니 바쁜 틈틈이 들러서 먼지를 털어 댔을 게 뻔했다. 묵묵히 청소하는 라피난의 모습을 상상하자 때아닌 웃음이 샜다.
“여기 어디쯤 등이 있을 건데.”
과연 그녀가 더듬은 자리에 난로 겸용으로 사용하는 기름 램프가 있었다. 해시트는 냉큼 들고 온 촛대를 기울였다.
화르륵! 불이 붙으며 서고가 더욱 밝아졌다. 책장을 올려다보던 해시트의 눈이 커졌다. 텅 빈 책장의 단 한 칸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똑같은 책으로.
“카이렌.”
대충 헤아려도 열 권은 넘을 성싶다.
아마 해시트가 찾을 수 없도록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을 몽땅 털어 왔는가 보다. 그녀는 멍하니 책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비교적 꽉 찬 책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꽂혀 있는 서책들은 모양과 크기가 가지각색이었으며 제국어로 쓰이지 않은 것도 다수 눈에 띄었다.
왠지 저쪽을 먼저 들춰 봐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해시트는 홀린 듯이 촛대를 내려놓고 반대편으로 다가갔다.
한 권을 뽑아 펼쳐 보니 곳곳에 종이를 끼워 표시해 둔 자국들이 많았다. 또 표시해 둔 페이지마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색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외국어로 쓰인 서책엔 해석이 줄글로 따라붙어 있었다. 뭔가를 연구한 흔적이 틀림없었다. 선 자리에서 단숨에 몇 권을 들춰 보던 해시트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말도 안 돼. 이럴 시간이 있었을 리가…….”
하지만 실제였다.
그가 기록해 둔 날짜로 추측건대 지난 오 년간 차곡차곡 조사해 온 결과물임이 확실했다. 해시트가 십 년은 걸릴 거라 여겼던 일을 라피난은 고작 오 년 동안 혼자서 끝낸 것이다.
별안간 그녀는 마구잡이로 책을 껴안고 책상으로 날랐다. 널찍한 책상에 수십 권의 책을 모조리 펼쳐 놓고도 모자라서 미친 사람처럼 책상 서랍을 뒤졌다.
서랍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는데, 개중에 가장 커다란 한 칸만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방 안을 샅샅히 뒤져 보아도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습관처럼 검을 뽑아 내려치려다가 문득 자리에 멈춰 중얼거렸다.
“쥰.”
믿을 만한 충신이지요. 라피난이 흔치 않게 남긴 칭찬을 머릿속으로 되뇌었을 때.
“쥰을 찾아가라고 했어…….”
해시트는 벌써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중이었다.
*
“쥰!”
해시트는 쥰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한동안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판단 덕에 쥰은 개인 병동으로 격리되어 심심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입원 첫날 찾아왔던 라피난을 마지막으로 병문안도 원천 봉쇄되었다.
해시트가 아픈 사람을 억지로 찾아가서 귀찮게 구는 성격도 아니었고, 또 출정 준비로 며칠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기에, 결국 쥰이 의사 이외의 손님을 맞이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헉, 폐하! 제가 지금 절을 못 올…….”
“쥰! 혹시 라피난이 네게 맡긴 물건 없느냐?”
“예?”
놀란 쥰의 반문에도 아랑곳 않고 해시트는 당장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생각해 봐라. 네게 주고 간 물건이 있지 않니?”
“아뇨. 그런데 폐하, 팔의 상처는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대충 붙고 있대. 그보다 잘 생각해 보라니까. 그가 너를 찾아온 적 없나?”
“있긴…… 있죠……. 하지만 딱히 맡기신 물건은…….”
쥰은 해시트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그야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과거사와 함께 안대를 돌려주고 가긴 했으니까.
그러나 쥰이 무어라 덧붙일 새 없이 해시트가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직접 맡긴 게 아닌가? 그럼 집? 집인가.”
그러더니 부랴부랴 병실을 나서려 했다. 깜짝 놀란 쥰이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폐하! 뭔지 모르겠지만 같이 가요!”
그녀가 황급히 나갈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해 봤자 일주일 넘게 협탁 위에 방치 중인 안대를 꺼내 차는 것뿐이었다. 검은 손수건에 싸인 안대 위로 손을 뻗는다는 게 그만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전부 마음이 급했던 탓이다. 겨우 이 정도 수를 쓰는 게 고작이었던 라피난도, 그런 그가 남긴 흔적을 찾아 나서야 하는 해시트도. 다들 마음이 급했다.
짤랑!
작은 금속이 튕겨져 오르는 소리에, 해시트와 쥰의 시선이 곧바로 같은 곳을 향했다.
“이게 뭐…….”
“거봐. 역시 네게 맡겼잖아.”
해시트가 환한 미소로 반색했다.
바닥에 떨어진 까만 손수건 옆으로 새끼손가락만 한 금빛 열쇠가 반짝거렸다.
*
잠겨 있던 서랍은 엄청난 양의 종이와 잉크, 그리고 수십 자루의 펜대로 채워져 있었다.
“세상에. 이 정도 종이면 제 십 년 치 월급은 족히 되겠어요.”
쥰은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지만 해시트는 속으로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글쎄 그녀도 십 년이 족히 걸릴 줄 알았지. 라피난이 한번 시작한 이상 얼마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인지 깜빡한 그녀의 실책이었다.
당연하게도 라피난이 이 정도 종잇값이 아까워 서랍을 잠가 뒀을 리 없었다. 기실 내용물만 보자면 지극히 평범한 편이다. 다만 쥰에게 열쇠를 맡겼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혼자 하기엔 버거운 숙제니 이 정도 도움은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다.
해시트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오른팔을 걷어붙였다.
“오른팔을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군.”
그녀가 곧장 책상에 앉자 쥰이 그 옆으로 따라와 질문했다.
“폐하. 이게 다 뭔가요? 여기 펼쳐진 책들은 또…….”
“라피난이 두고 간 숙제.”
“네?”
“나라 걱정으로도 밤이 부족한 시국에 밤잠 쪼개 가며 연장 근무까지 하게 생겼단 소리야. 젠장, 얼마나 걸리려나. 한 번이라도 책을 써 본 적이 있어야지. 필사는 많이 해 보긴 했는데.”
“그러니까…… 네?”
“책을 쓸 거다.”
해시트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진 부연은 비교적 시무룩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못 해. 쥰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내 문장력은 굉장히 한정적이거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적장에게 보내는 경고문 외에는 별로……. 으음, 그렇다고 대신들이 올리는 보고서처럼 썼다간 완벽하게 외면당할 게 뻔하고 말이야……. 이해하기 쉽고 간결해야 해. 다섯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 네가 딱이야.”
그녀 딴에는 아주 솔직한 대답, 그러나 쥰에겐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됐다. 옛말에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 했지. 해시트는 연신 갸우뚱거리는 쥰의 품에 책 한 권을 안겨 주었다.
“표시된 부분들을 읽어 봐. 읽다 보면 감이 잡힐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