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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85화 (84/104)

85화.

귀환해서 전해 들은 쥰의 상태는 한마디로 만신창이였다. 전신 타박상에 늑골을 포함한 골절만 세 군데였고, 목의 상처는 기도를 건드리지 않은 게 천운이라면서 의사가 호들갑 섞인 설명을 연달았다. 하마터면 평생 놋쇠 관을 옆에 끼고 살 뻔했다나.

당연히 이번 출정에서도 열외당했다. 결과적으로 일당백까지는 아니어도 일당서른 정도는 거뜬할 병력을 아군끼리 까먹은 셈이었다.

“이제 말해 봐라. 왜 그랬어.”

“사소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소한 오해로 황명까지 거슬러 가며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실 근위대장의 목을 졸랐다고?”

“그건…….”

“말해. 더는 짐에게 숨기는 거 없다면서.”

작정하고 추궁하는 해시트 앞에서 라피난도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진 못했다. 한편으로 그는 생사가 불분명한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에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이런 모양새라는 데 섭섭함을 느꼈다.

일순 라피난이 입술을 깨물며 해시트에게 다가섰다.

“시간이 없군요. 죄송하지만 그 문제는 쥰 경에게 직접 물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장난하나?”

“어차피 제가 답을 드려도 쥰 경에게 다시 물어보실 거잖습니까.”

“너 뭐가 그렇게 당당해?”

“쥰 경은 믿을 만한 충신이지요. 폐하껜 더할 나위 없이 말입니다.”

“아아, 벌써 입단속을 끝내 뒀다는 거군…….”

해시트가 빈정거렸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었다. 라피난은 차라리 지금 출정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걱정 마십시오. 쥰 경이 제 눈치를 보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에서 제가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막말에 해시트의 눈썹이 당장 세모꼴로 찌그러졌다.

“이젠 나한테까지 협박을 치냐?”

“아직 협박거리는 됩니까? 기쁘군요.”

“……너 요 며칠 내가 좀 못되게 굴었다고 비뚤어진 모양인데 그건…….”

찡그림이 무색하도록 금세 물러지고 만다.

해시트는 굳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라피난 앞에서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레이 린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며 라피난은 습관처럼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예고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축복을 원합니다.”

“뭐, 뭐야.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해시트가 말을 더듬었다. 어차피 라피난의 방 안이라 볼 사람도 없는데 허겁지겁 주위를 살핀 건 덤이었다. 퍼뜩 허리를 굽혀 라피난의 귓가에 소곤댄다.

“너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낯간지러우신가 봅니다.”

“안 간지럽겠나?”

“좋습니다. 그럼 이따가 출정식에서 청하지요.”

“…….”

이번에야말로 협박이 따로 없었다.

백만 대군이 보는 앞에서 거사를 치를 테냐, 아니면 아무도 안 볼 때 단둘이 해치워 버릴 테냐. 해시트는 기가 막혀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차츰 다른 의미로 표정이 무거워져 갔다. 잠시 후엔 한결 담담해진 목소리로 운을 뗐다.

“라피난.”

“예.”

“이 몸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 그런 나의 축복이 의미가 있겠나?”

“유효합니다. 저는 신의 종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폐하를 바라니까요.”

원한다고 했고 바란다고 했다. 기실 소리 내어 읊은 것만으로도 그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입 밖에 낸 순간 새로운 욕심이 생겨나서 물러서지 못하는 것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가 버티고 우긴다면 끝내 져 주고 말 여자를 잘 알기 때문에. 과연 머뭇거리던 해시트의 손은 머잖아 그를 향해 뻗어 간다.

너무 느려 답답했지만 라피난은 조급한 기색 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손끝이 설핏 스친 순간에야 그 손을 단단히 잡아당겨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의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은 곳은 손가락과 손등 사이 어디쯤이었다.

해시트의 시선에서, 라피난은 숨조차 멈춘 듯했다.

손등에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마땅한 축복의 말을 찾지 못한 탓이다.

그녀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라피난은 기꺼이 축복을 염원했다. 그런 이 앞에서조차 믿지 않는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는 싫었다. 고민 끝에 해시트는 띄엄띄엄 말을 골라냈다.

“승리하고……. 으음, 웬만하면 다치지 말고……. 국정은 이 몸이 잘 돌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색함에 말꼬리가 한없이 늘어지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평소만큼 단단해졌다. 그러나 긴장과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당부에는 사뭇 절절함마저 담겨 있었다.

“돌아오면 우리는 나눌 얘기가 좀 많겠군.”

떼어 내기 싫었지만 이제 놓아 줄 때였다. 이미 해시트의 손이 먼저 빠져나가고 있었다. 라피난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세게 고쳐 쥐었다. 그리고 흠칫 놀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뭐가.”

“적국의 왕을 죽여서 그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해 주셔야지요. 늘 그러하셨듯이.”

“…….”

해시트는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치졸한 심보더냐. 라피난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침묵하는 해시트를 올려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몸을 일으킬 때는 슬쩍 웃었다.

“농담입니다.”

“…….”

“그리고 이건 진담입니다만, 폐하.”

그는 아직 굳어 있는 해시트를 지나쳐 창가로 걸어갔다.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열자 썰렁한 겨울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긴 느낌이다. 곧 지나가겠지. 금방 봄이 올 것이다. 라피난은 새벽녘 푸른빛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하던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레이 린은 저를 죽일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종족의 특성상 죽이지 못하는 거죠.”

“알아. 그래서 너를 보내는 거다.”

“예. 그래서 저는 이번에 그와 마주치게 되면 최선을 다해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

해시트는 또 침묵했다. 라피난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새삼 손에 잡히는 바람이 시리게 느껴졌다.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춥게 만들까 봐 라피난은 얼른 창을 닫았다. 다시 돌아서서, 이번에 그는 똑바로 해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제가 만약 그를 놓친다면 폐하께서 마무리해 주십시오. 그 검의 용도는 이제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그리고…….”

“너 오늘따라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해시트가 불쑥 그의 말을 끊었다. 망설이다 덧붙인다.

“다녀와서 해도 되잖아.”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라피난은 무던히 굴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랬습니다.”

일부러 천천히 걸었지만 원체 보폭이 커서 금세 코앞 거리였다.

“어쨌든, 폐하.”

보다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잠깐 손을 맞잡을까 싶다가도, 조금 전 바깥바람을 잔뜩 쥐었던 터라 그만두어야 했다. 대신 그는 허리를 굽혀 해시트와 시선을 맞췄다. 예전엔 한참 굽혀야 했는데 이제는 그 절반 정도로 충분했다. 요즘 들어 그는 자꾸만 옛날이 생각났다. 이상한 일이다. 아니, 당연할지도…….

“제 추측에 폐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레이의 가장 연약한 피부를.”

“…….”

“그의 비늘이 빠진 곳. 그곳을 겨냥하시면 됩니다.”

내심 그더러 야멸치다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라피난이 굳이 잔소리를 두르지 않았더라도 응당 알아서 그를 처단했을 수도 있다. 해시트는 황제니까. 그리고 그는 적국의 왕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괜한 노파심을 못 이겨 잔소리를 건네야만 직성이 풀렸다. 라피난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을 각오했을 때 대부분이 그러하듯.

“만일 제가 돌아오지 않거든 제 서고는 태워 주십시오.”

아, 마침내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결혼하기 전에 살던 집 지하실에 있습니다.”

*

모탈루아 해변에 못 보던 바위 덩어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장정 몇이 손을 터는 모습으로 미루어 설치를 끝낸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슬슬 바다를 건너 베누스로 돌아가려던 이레이는 생각지 못한 구경거리에 또 걸음이 느려졌다. 설렁설렁 모래사장을 밟아 가까이 기웃거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몇 달 전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사상자를 기리는 위령비였다.

위령비의 글귀를 쓱 읽어내린 이레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몇 명만 더 죽였으면 신전이라도 세워 줬겠군.”

그때 떠난 줄 알았던 장정들이 다시 등장해 그에게 손짓했다.

“어이, 거기 형씨! 비켜! 공사 중인 거 안 보여?”

“……끝난 거 아니었나?”

이레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떤 여자가 보았다면 군말 없이 비켜 줘도 될 걸 꼭 토를 단다며 언짢아했을 광경이었다. 장정은 이레이의 덩치를 가까이서 확인하자마자 한결 정중하게 표현을 다듬었다.

“하하. 아직 한 개가 더 남았거든요. 위험하오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어깨 너머를 흘깃 보자, 정말로 새 바위 덩어리가 줄에 칭칭 감겨 이쪽으로 실려 오고 있었다. 이번 건 크기가 더 컸다. 이레이는 순순히 한 걸음을 물러서 주었다. 그리고 마치 그가 이 현장의 감독관이라도 되는 양 새로운 위령비가 설치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마침내 두 번째 위령비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변을 떠났다.

위령비에는 한 가지 내용이 두 가지 언어로 반복해서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이제는 사료 속에만 남아 있는 언어를 굳이 찾아내어 바위 덩어리에 새겨 두었는지는…… 그로선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위령비는 미케나 제국어와 모탈루아 족의 언어로 병기되어 있었다. 자세히 눈여겨보지는 않았으나 드문드문 눈에 들어와 기억하고 있었다.

‘확인된 유골 수 142구’

‘부끄러운 역사를 밝힘으로써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모탈루아 부족민들의 명복을’

‘제국력 567년’

‘티플리스 3세’

그러고 보니 티플리스라는 이름은 어느 조상에게서 따온 걸까. 고요한 해변을 날아가는 동안 이레이는 그동안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문제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바다 위를 날아가다 말고 두둥실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바다가 그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콱 빠져 죽으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너희 종족은 진실로 수치를 모르냐고, 자꾸만 물었다.

“왜 신경 쓰이지.”

고민하던 그가 불시 방향을 바꿔 날갯짓을 시작했다. 사소한 거짓말이 눈에 밟혀 아무래도 밝히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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